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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31화 (1,52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31화

조우, 해후(9)

1기영에게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계속해서 돼지 새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절실할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면 평생을 박덕구와 함께 보내고 싶을 것이다.

그간 돼지를 그리워한 시간에 비한다면 지금 박덕구와 보낸 시간을 찰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이 이렇게 자리를 빨리 마무리하려는 데는 아마 많은 이유가 존재할 것이다.

‘나한테는 다행이자너.’

미련이 남을까 두려워서이지 않을까. 계속해서 시간을 함께 보내면 보낼수록 돼지를 떠나보내는 게 더 힘들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게 녀석이 원하는 엔딩인지 원하지 않는 엔딩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돼지 새끼가 행복해 보이는 곳에서 좋은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정말로 녀석에게는 이게 전부였던 것이리라.

그 자리에 자기 자신의 자리가 없는 게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1기영은 현재 자기 자신이 박덕구의 옆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녀석의 분위기가 변한 것도, 녀석의 태도가 변한 것도 모두 박덕구의 맛대가리 없는 고기 스튜를 먹고 난 이후가 아니었던가.

추가로,

녀석이 조금 더 일찍 작별 인사를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김현성이 오고 있구나.’

지금 이곳으로 김현성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김현성과 내가 만난다고 해서 일이 전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미카엘이라는 보험이 사라진 입장에서 2회차로 어떻게 행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답이 없었으니까.

이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녀석은 곧바로 2회차가 시작이라도 되는 것마냥 판단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와중에 눈치 빠른 돼지 역시 분위기가 변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중, 그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1기영을 보고 있노라면 눈치채기 싫어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그렇게 녀석이 다시 한번 더 박덕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인사 아닌, 작별인사를 건네려고 했던 때였다.

갑작스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빤히 1기영을 바라보는 돼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 것이다.

“왜 갑자기 사라질 사람처럼 행동하고 그러는 거요?”

“…….”

“…….”

“뭐? 내가 언제?”

“잘 모르겠소. 갑자기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처럼 보입디다. 이제 막 밥 한 끼 먹은 거 아니요. 형님이 좋아하는 커피도 먹고, 또 밤에는 와인도 같이 한잔하고 해야지. 밀린 이야기는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니까. 내가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그러오. 아니, 들을 이야기도 많고 말이요. 지금까지 내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어디… 형님 이야기도 한번 들어봅시다.”

“…….”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굳이 네가 알 필요는 없어. 새끼야. 그리고….”

“형님 이야기를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주나.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말해줄 때까지 이 손은 안 놓을 거요.”

그것으로 모자라 1기영의 어깨를 꽉 붙잡는 모습이 눈에 띈다.

“뭐… 뭐야! 이 돼지 새끼! 뭐야!? 뭐… 이거 놔! 이 돼지 새끼야!”

“못 놓는다니까!”

“아니, 이 미친 돼지 새끼!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대체! 할 이야기는 다 했어! 새끼야! 내가 하면 너는 더 잘할 수 있다! 그걸로 끝이야! 어깨 아파! 돼지 시바! 어깨 아프다고!”

“아니, 못 놓는다니까! 어딜 이대로 도망가려고! 우리 할매가 하는 말이! 속에 있는 말을 가슴에 꽁꽁 숨기고 살면 그것도 다 병이 된답디다! 형님 얼굴이 지금 딱 속에 있는 말을 숨기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인데! 어디 형님 말도 한번 들어나 봅시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시바! 누가 도대체 뭘 숨긴다고 대체! 시바! 애초에 내가 너한테 할 이야기가 뭐가 있겠어?! 새끼야! 이 멍청한 새끼가! 갑자기 상담사라도 된 듯 지껄이지 마! 이걸로 끝이라고! 돼지 새끼!”

“아니 그러니까 대체 뭐가 끝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다니까!”

“이익! 으이익! 도대체 뭐가 끝이긴, 이 눈치 없는! 너도 알잖아! 내가 네 형님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이거 놔!”

“그건 관계없소! 형님은 형님이라니까! 그러니까 나를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요! 그래서 처음에 그렇게 울고불고 질질 짠 거 아니냐니까! 그걸 두고 이 박덕구가 어떻게 형님을 형님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냐니까! 형님도 형님이요! 약초 냄새가 나든, 피 냄새가 나든, 형님은 형님이요!”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놔!”

“못 놓을 거요!”

“놓으라면 좀 놔!”

“안 놔!”

“너 이 새끼! 지금 반말했어?!”

“형님 말이! 자기 형님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소! 그럼 반말해도 되지!”

“이… 이 미친 돼지가!”

“아무튼 이렇게는 못 보낸다니까!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그러는 거요!”

“네 형님이나 따라가라고!”

“일단 형님 이야기부터 전부 다 듣고 갈 거요! 이대로는 똥 싸고 나서 안 닦은 것처럼 찝찝해서 못 참겠소!”

‘진짜 난리자너. 막장이자너.’

그리고 저게 박덕구자너.

‘다시 봐도 당황스럽기는 해.’

나조차도 도망치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얼굴이 뻘겋게 변해버린 1기영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이미 속으로 작별인사를 전부 마친 상황이었던지라 녀석이 느끼는 민망함을 일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며 서로 손을 흔들었건만, 집 방향이 같아 졸지에 같은 버스에 갇히게 된 것 같은 표정이다.

나름대로 그 이별이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했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민망함은 배가 된다.

거기에 박덕구가 몸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으니 놈에게 있어서는 미치고 팔짝 뛸 상황일 것이다.

심지어 얼떨결에 자신이 네 형님이 아니라고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의 태도는 변화가 없다.

단언하건대 녀석 역시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워낙 절절하고 감동적인 분위기에 곧바로 자리가 마무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돼지 새끼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제나 이 새끼였자너.’

일이 꼬이게 만드는 데는 선수가 아니었던가. 이 돼지 새끼의 예측 불가능한 무빙에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당연히 2기영에게만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다. 1기영도 돼지 새끼와 지내면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황당한 일들을 겪었을 것이 분명했다.

녀석 역시 박덕구와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랜만이었던 터라 놈이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 거라는 걸 깜빡한 것이다.

“이거 놔! 시바! 쫌!”

“못 놓는다니까!”

‘진짜 미치겠자너. 시바.’

여관 전체에 놈의 목소리와 박덕구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상황, 쓸데없이 고증을 지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여관의 방음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어떻게 봐도 김현성을 맞이할 만한 장소로는 적절하지 않았다는 거다.

우당탕!

“아잇! 시바! 하지 마! 하지 마! 돼지 새끼!”

“어차피 형님은 붙잡으면 꼼짝 못 한다 이거 아니요! 더 이상 반항하지 말라니까!”

“이 미친!!”

쾅! 우당탕탕!

‘진짜 시바 개막장이네.’

여기서 김현성을 맞이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선다. 이 여관은 저 새끼들이 전세를 낸 것 같았으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내가 떠나는 것이 맞다.

사실 더 이상 저 듀오한테는 신경을 쓸 시간도 없다. 1기영 녀석이 빨리 마무리를 한 걸 보면, 어쩌면 정말로 김현성이 코앞에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이스터 에그와 비슷한 공간에는 들어와 있을 것이다.

일단은 가면을 챙기는 것이 먼저, 이후에는 지하실에서 1층으로 올라가자, 놈들이 해놓은 음식 냄새가 코를 찌른다.

‘시바 진짜. 뒷정리 좀 해놓지. 아니, 환기를 좀 해놓든가. 이게 어디 봐서 1회차 최고 빌런의 은신처냐고. 사람 냄새 나는 거 실화냐고.’

놈들이 올라가 있는 2층에서 나는 소리는 더욱더 시끄럽게 들려온다. 심지어 차는 언제 탔는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카스가노 역시 눈에 띄는 중, 이쪽을 바라보자 반가운 얼굴로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녀 역시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얼굴, 그야 박덕구를 이곳으로 불러온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보면 도박이기도 했고 어쩌면 내 이익에 상충되는 행동일 수도 있었으니 걱정이 될 만도 하다.

그 표정을 보고서는 잠깐이지만 그녀를 의심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안녕하셨습니까. 그리고… 저….”

“고생했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죄송하다는 것밖에는 드릴 말씀이….”

“아니야. 죄송할 것도 없고,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 유노 네가 왜 돼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는 알 것 같거든. 네가 단순히 녀석을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이게 답이라는 걸 봤기 때문인 건지, 아니,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네 행동이 날 위해서라는 건 알고 있어. 결과적으로는 네 행동이 옳았던 거야.”

“아닙니다. 그저….”

“나는 태생이 누군가를 믿기 힘들어하는 성격이라는 건 알 거야. 또 여기까지 와서 네게 감상적인 말들을 늘어놓는 것도 나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1회차의 이기영과 내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김현성을 만났다는 게 가장 크기는 했지만….”

“…….”

“아마 너처럼 믿을 만한 사람들이 많아서였을 거야. 1회차의 이기영은 끊임없이 배신당하는 과정에서 돼지 외에는 다른 이들을 믿는 방법을 까먹었을 테니까. 어쩌면 녀석에게도 모든 일을 되돌리고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을지도 몰라. 또 나 역시 시작은 좋았지만 결국에는 일을 망쳐 버렸을지도 모르고. 아직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네가 한 일에 모든 것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감… 감사합니다. 주인님.”

“그래서, 이 뒤에 이야기는 알고 있어? 아니, 본 적이 있나?”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했던 카스가노 유노가 내 질문에는 고개를 젓는다. 그녀 역시,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떻게 다시 이걸 되돌릴 수 있을지 정확히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리라.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예상했던 바였다. 지금은 그저 그녀 덕분에 커다란 분기점을 넘었다는 것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옳은 선택을 하실 것임을, 좋은 결과를 손에 쥘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옳은 선택이라면 이미 한참 전에 했어.”

“…….”

“…….”

“그럼 다녀올게. 집에서 보자.”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짝 인사를 마친 이후에는, 곧바로 여관의 문을 연다.

“후우….”

괜스레 크게 한숨을 쉰 이후에는 위를 바라본다. 비둘기 둥지의 내부였던 터라, 딱히 하늘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시 한번 봐도 덩그러니 놓여 있는 싸구려 여관 하나만 자리해 있는 풍경은 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괜스레 지금까지 참 많이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지금 박덕구와 함께 실랑이를 하고 있는 녀석도 그렇고, 나도 그랬다.

많은 것들을 알게 됐고 겪었다. 성지훈처럼 이야기하기는 싫지만, 또 인간적으로 성장했다는 표현 같은 것은 쓰기 싫었지만, 조금은 내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이 스친다.

본질은 그대로 이기는 하다. 솔직히 이 시스템이 원하는 것이 나를 신으로서 성장시키는 튜토리얼이 아닐까 하는 추측 때문에 아니꼬워 성장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조금은 자랐다는 것은 아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인간은 아주 작은 일로도 많은 것은 느끼고 자라는 족속이 아니었던가.

이쪽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많은 일들에서 많은 것들을 느꼈고 겪었다.

빅보이 새끼나, 살롱의 영애들, 정하얀, 그냥 기적을 바라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감명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마 거짓말일 것이다.

물론 바뀌지 않은 부분도 존재하기야 한다. 아니, 오히려 확고해진 부분도 존재한다.

“…….”

“…….”

‘절대로 못 나가.’

한 번 들어온 건 절대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시선을 돌리자 마찬가지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 때문에 시야가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의 모습이었다. 겁먹은 모습이었고, 두려워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야 놈에게 있어서는 1기영과 마주하는 순간이었을 터다. 본인의 원죄와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했고, 나름대로 큰 결심을 두고 오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 김현성은 자신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으러 왔다.

이 길었던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으러 온 것이다.

*다음 페이지에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발렌틴 알렉산드로 일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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