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30화
조우, 해후(8)
돼지가 멍청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이 박덕구의 낮은 지능 스탯만 봐도 녀석이 멍청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공부 같은 건 해본 적도 없고, 책 한자도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이 새끼한테는 지능 스탯으로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가 존재한다.
이상한 부분에서 이상하게 머리를 써서 설계를 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는 거다.
심지어 눈치도 빠르다. 덩치와 맞지 않게 날렵하고 예측 불가능하게 움직이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눈치 못 채고 있을 리가 없자너.’
1기영과 이쪽의 외형은 조금이지만 차이가 있다. 녀석이 조금 더 말랐고, 눈이 조금 더 썩었다.
심지어 흰둥이마냥 후각이 발달한 그 박덕구가 아니었던가. 언젠가 녀석이 내게서 희미한 약품 냄새 같은 것이 났다고 말했던 것으로 기억, 단언하건대 지금의 1기영에게 희미한 약품 냄새 따위는 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피 냄새 정도가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짐승마냥 주기적으로 벌렁벌렁거리는 녀석의 코가 눈에 띈다.
‘같이 체육관 가자는 약속 받아낸 것도 설계일 거야.’
점점 더 돼지 새끼가 녀석이 2기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확실해진다.
어째서 놈이 연기를 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아마 돼지 새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게 진짜든 가짜든 간에 어쨌거나 1기영은 자신을 지극히 아끼고 있었고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카스가노 유노가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자신과 1기영을 만나게 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뭐. 사실 이 모든 이유들을 둘째 치더라도….
‘저걸 보고 어떻게, 진짜 우리 형님은 어디 갔냐고 물어볼 수 있겠냐고.’
밥 좀 먹자는 소리에 하고 있던 일들과 질문을 허겁지겁 마무리하고, 식탁을 세팅하고 있지 않은가.
당연히 이쪽이라면 하지 않을 행동이기도 했다. 박덕구 역시 이런 상황이 조금은 어색한지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잡일 하면 녀석이었던 지라 더욱더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1기영 역시 박덕구를 처음 봤을 때의 어색함과 부담감이 어느 정도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지금은 그저 즐겁게 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다.
“내 말 알아들었지? 어? 도미로 걔는 만나지 마. 절대로 안 돼! 내 눈에 시바 흙이 들어가도 도미로는 안 돼!”
“아니, 그러니까. 도미로든 도미노든 아예 신경 안 쓰고 있다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 여자 이야기 좀 그만하쇼! 뭐 다른 사람들 없냐고 물어봤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렇게 성을 내나. 아니, 하나만 좀 물어봅시다. 그 여자가 뭐 크게 잘못이라도 했소? 물론 내가 그 여자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처럼 보이는 데 말이오. 형님 말대로면 더하지! 귀족이지! 궁정 마법사지! 이제는 교수님 아닌가!?”
“그걸 말이라고… 하아… 도미로는… 아니… 하아… 여단이… 아니….”
마법사 기근 현상에 시달리지 않았던 2회차 붉은용병은 굳이 도미로를 영입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2회차에 여단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도미로가 정상적인 삶을 살았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사람 본성이라는 게 어디로 가겠냐고.’
안 봐도 뻔하지 뭐. 걔는 선희영처럼 암흑진화한 것도 아니고 선천적으로 매드 싸이언티스트 기질이 있었는데 뭐.
“아무튼 안 된다면 안 돼! 이 돼지 새끼야! 한 번만 더 만나봐. 진짜 죽어버릴 테니까! 시바! 나 죽고! 너 죽을라니까! 그리고 도미로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누가 보면 내가 뭐 바람이라도 피는 줄 알겠소. 아까도 말했지만 이 박덕구, 정연 씨가 들어온 이상 내 삶에 다른 여자는 없소.”
“그… 그래. 그런 마음가짐이야.”
“아무튼 밥이나 좀 먹읍시다. 진수성찬 차려놓고 계속 미로인가 미노인가 하는 여자 이야기만 늘어놓으니까. 음식한테 미안하다니까. 아! 무녀님도… 어? 무녀님?”
“유노는 아까 전에 바깥으로 나가더라.”
“같이 먹으면 좋았을 텐데….”
“알아서 하겠지, 뭐. 일단 들자. 샐러드부터 좀… 아! 돼지 새끼야! 샐러드 좀 먹으라고….”
“이 박덕구. 내 삶에 샐러드는 없소.”
“지랄하지 말고 샐러드 좀 처먹어! 고지혈증 걸리고 싶어?!”
“아니, 고기가 더 맛있는데 어떻게 하나. 하지만 형님이 그렇게 먹으라고 성화를 내니, 딱 한 입만 먹겠소.”
“이… 미친 돼지 새끼….”
‘이 새끼 현타 왔자너.’
“다른 건 타협해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타협할 수 없소.”
‘많이 현타 온 것 같은 표정이자너.’
자신이 이러려고 돼지 새끼를 만났나 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뭐 다른 상황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때아닌 육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좀 처… 먹으라고!”
“형님 주먹질하지 마쇼! 손가락이랑 손목 부러진다니까!”
“아… 진짜. 쓸데없이 내구는 높아 가지고! 식단 관리 안 해? 요즘 술은 얼마나 마셔?”
“술은 뭐… 그렇게 많이는 안 마시는데.”
“혹시 연초도 피는 거 아니지?”
“연초는 안 핀다니까.”
“식단 관리하라고! 네가 언제까지 건강할 줄 알아? 세월 앞에 장사 없는 거야. 너같이 몸으로 먹고사는 놈들일수록 더욱더 관리해야 한다고. 아무리 마법이랑 기술이 발전하고, 신성력이 있어도 노화는 못 막아. 지금 네 나이 때부터 관리해야지, 그나마 나중에 가서 덜 고생하는 거야. 마력 수치가 낮으면 더욱더 세월을 직격탄으로 맞는다고….”
“뭐 다 아는 소리를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요?”
“이렇게까지 소리 지르면서 말을 안 하면 네가 들어 처먹지를 않으니까 그러는 거야, 돼지 새끼야. 왜 다른 말은 다 잘 들으면서 이상한 부분에서는 고집이 센 건지. 제길.”
“사나이에게는 타협할 수 있는 부분과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소.”
“진짜 한 대 후려치고 싶네. 진짜.”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워 보인다. 물론 본인은 부정할 테지만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서리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녀석이 지금 이 상황 자체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좀 깨끗하게 먹어라. 덕구야. 입가에 묻은 것도 좀 닦으면서. 너는 세 살짜리도 아닌데 왜 이렇게 흘리고 처먹는 거야? 이제 나이가 몇 갠데.”
“원래 음식이 맛있으면 이렇게 됩디다. 형님이 오랜만에 해준 거 아니요. 숟가락이 멈추지를 않는다니까.”
“그래?”
“뭐 요즘에 돈도 많이 벌고, 좋은 곳도 많이 가 보기는 했지만, 역시 나는 이런 것도 좋다니까. 형님은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서도… 집밥이 괜히 집밥인가. 이런 게 집밥 아니요. 파인다이닝인지 파인애플인지 뭔지 하는 건 쓸데없이 기다리는 시간만 길고, 형님 따라가는 파티에서 나오는 음식들도 다 뭔가 정이 없게 느껴집디다. 그렇다고 형님이랑 같이하는 시간이 싫다는 게 아니요. 그냥 역시 밥은 집밥이 최고라는 거지.”
“…….”
“그렇지 않소?”
“그래… 집밥이 최고지.”
“형님도 내가 만든 고깃국 좀 먹어보쇼.”
“맛없어. 그거.”
“아니, 일단 먹어보라니까.”
“맛없다고. 그거.”
“아니, 제발 한 번만 먹어보라니까.”
“맛없다고.”
‘맛없기는 해.’
사실 먹을 만하기는 한 정도이기는 했지만, 확실하게 말하건대 이쪽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이기영이 녀석의 권유를 거절하는 이유는 아마, 지금 녀석이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후각도 잃었나?’
돼지 새끼에게 냄새난다 어쩌고 했던 것도 그냥 부끄러움에 중얼거렸던 거겠지.
아마 이외에도 녀석이 잃어버린 것이 꽤 많을 것이다. 일단 입에 음식을 집어넣고는 있었지만 표정의 변화가 크지 않다.
박덕구의 고깃국을 먹는다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싸구려 여관도, 박덕구도, 모두 자신의 옆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들을 온전히 느끼기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달라져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덕구의 성화에 녀석은 고깃국을 입으로 밀어 넣는다.
“맛있소?”
“…….”
“…….”
“그래. 맛있네.”
‘이거 요리 만화 아니자너.’
녀석이 갑작스레 감격의 눈물을 흘리거나, 미각이 돌아온다거나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다운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까 전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자신이 너무나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달은 것이다.
단순히 미각을 잃은 것뿐이었지만, 아마 생각이 많은 녀석은 잃은 것이 미각뿐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앞에서 애새끼마냥 순수하게 웃고 있는 박덕구를 보고 있노라면 더욱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고 있기는 했지만 그전보다 텐션이 조금 내려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대화를 멈추지는 않는다. 아직도 녀석에게는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최근에 린델이 말이요….”
“그래?”
대부분 박덕구의 일상에 관련된 이야기였고, 1기영이 궁금해하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휴일에는 대부분 기모 형씨나 예리랑 같이 시간을 보내기는 하지. 큼… 큼… 형님이 또 뭐라고 할 것 같아서 조금 민망하기는 한데… 꼭 셋이 모이면 럼주가 그렇게나 잘 들어간다니까.”
“이 새끼… 진짜….”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사실은 요즘 기모 형씨가 좀 바쁜 것 같으니까. 연애한다고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놀라지 마쇼. 그… 지혜 씨 쪽에 쌍둥이들이랑 같이 카페에 들어가 있는 걸 내가 분명히 목격했다니까!”
“쌍둥이…?”
“그렇소! 아무리 대륙이라지만 내가 다 얼굴이 붉어지더라니까! 자매랑 동시에 연애를 한다니! 대관절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요! 양옆에 팔짱을 끼고 염치도 없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서는 내가 기모 형씨를 진짜 다시 봤다는 거 아니요.”
‘그러니까. 한 명은 남자라니까. 남매라고….’
“아… 걔네… 이지혜가 데리고 있었구나….”
“형님도 좀 알고 있었소?”
“장난이 좀 심하기는 한데. 선천적으로 나쁜 애들은 아니야.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쌍둥이들도, 희영 씨도… 아.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도미로는 선천적으로 질이 안 좋으니까.”
“아니. 알겠다니까. 이제 도미로 이야기는 그만 좀 하쇼. 그리고 저번에 다 같이 식사하는데 하얀이 누님이….”
“아. 그랬지. 정하얀. 정하얀은 행복해하는 것 같고?”
“하얀이 누님은 항상 행복하지. 형님이랑 결혼만 하면 아마 행복에 겨워서 하늘로 날아갈 거요.”
“하하하핫. 그래. 잘됐네. 정하얀한테는 참 몹쓸 짓을 많이 했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돌아왔나 보네.”
‘둘 다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자너.’
박덕구가 자신을 2기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1기영도 진즉에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녀석도 돼지 새끼와 함께 지낸 시간이 길었을 테니까.
그전에는 그나마 티를 내지 않고 있는 느낌이었다면, 박덕구의 고깃국을 맛본 이후에는 조금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형님이 세라한테만 조금 더 잘해주면 아마 더 행복해질 거요.”
“세라? 우리한테 애도 있었?! 아… 아아 세라핌… 아! 아아아! 그렇게 된 거구나… 그럼 쓰로누스도 있겠네.”
“아암! 열심히 훈련받고 있지! 너무 열심이라 무섭다니까! 또 혜진 누님도!”
“그래. 조혜진이랑은 왠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 싫어하지 않았었거든.”
“…….”
“행복하구나. 좋아 보이네. 거기는.”
“뭐 다 형님 때문 아니겠소!”
“하하하하.”
“농담이 아니라니까! 사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도 다 형님 때문 아니요! 내가 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도 눈치가 없지는 않소. 나한테 이것저것 쓰는 돈도 많은 거 알고, 계속해서 신경 써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다니까.”
“네가 노력한 덕이지. 새끼야. 끌어준다고 다 끌려오는 게 아니야. 네가 열심히 해서 열심히 성장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거기에 있는 거야. 난 물론 네가 성공할 줄 알았지만 돼지 새끼야. 의심하는 새끼들이 워낙 많았어야지. 안목도 없는 새끼들. 그래. 네가 지금 성장한 걸 그 새끼들이 전부 봤어야 하는데 말이야. 네가 결국에는 증명한 거야. 그래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네가 증명한 거라고.”
“내가 뭘… 증명하기는….”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네가 자랑스럽다. 지금 네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워.”
“…….”
“…….”
“새끼. 부끄러워하지 말고. 언제나 말했지, 덕구야.”
“…….”
“…….”
“내가 하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는 거요?”
“그래. 넌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는 사람이야.”
녀석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서린다. 당연히 박덕구와의 시간이 영원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새.
녀석이 정말 이것으로 만족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걸로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슬그머니 돼지의 머리를 쓰다듬는 녀석.
“내가 할 수 있으면….”
“…….”
“넌 더 잘할 수 있는 거야. 덕구야.”
안녕을 고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니, 틀림없이 작별인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