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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22화 (1,52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22화

소실(32)

“제발 좀… 죽어 주시면 안 될까요?”

녀석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는 것이 중요했다. 정확한 의사를 전달해야 했고, 이미 어느 정도는 전달이 되었다고 믿는다. 가능성이 없었다면 애초에 녀석에게 이렇게 긴 말을 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새끼가 자기 보신을 제일 중요하다 생각한다는 것도 확실하지는 않으니까. 그냥 내 망상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거야.’

그저 상황이 꼬였을 수도 있다. 1000년 전쟁에서도 본인만 살아남은 것도, 누군가를 위해 몸을 댈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상황이 그렇게 흘렀을 수도 있다.

녀석이 살아남은 것은 살고 싶어 했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김현성을 대신해 죽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조금 더 이후의 일을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녀석에게 던진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방금 있었던 대화로 인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거라는 것이었다.

장담하건대 분명히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 것이 분명하리라. 녀석의 의도가 그게 아니었다고는 해도 본래 죄책감을 달고 살거나, 전쟁에서 모든 것을 잃은 놈들은 자신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마련인지라, 아마 정말로 자신이 그런 종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흐름이 나쁘지는 않았어.’

여러모로 생각해 봐도 대화의 흐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녀석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런 인간인지 그런 인간이 아닌지와는 별개로, 자기 자신을 법정 위에 올리고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스스로 루시퍼에 대해서 까발렸다는 것이 아닐까.

“…….”

“…….”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기야 했다. 이미 놈에게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 흥분해 그녀에 대해 입을 놀렸다는 것은 조금 아프게 다가오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사실 그다지 많은 페널티를 먹을 것 같지 않다는 계산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에 던진 대사였다.

어찌 됐건 간에 그녀는 이번 일이 크게 개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대악마 주제에 관음하는 것이 취미였으니 아마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있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밖에는 없다.

미카엘의 말대로 그녀가 아무런 목적 없이 순수하게 시스템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해 게이트를 연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만약 녀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녀가 주제넘은 개입을 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다.

아니, 애초에 개입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색욕과 영면의 경우처럼, 시스템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리 그녀가 시스템에 일부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는 해도, 여러 가지로 잠금장치가 되어있는 현 1회차에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가능하다고는 해도….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들이 어마어마 하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 아쉬운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루시퍼를 팔아 미카엘이 스스로 갈려 나가 준다면 싸게 먹히는 교환과 장사를 한 셈. 결과적으로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제발 좀… 부탁드려요. 제발… 죽어 주시라고요.”

“…….”

녀석이 움직일 결심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슬그머니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여전히 흔들리는 동공이 눈에 들어온다. 설득 아닌 설득이 들어갔는지, 들어가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민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청신호가 켜진 것처럼 보였다.

사실 이 새끼가 갑자기 돌변해 네가 뭘 아는데 그딴 말을 지껄이느냐고 내 목을 조르지 않은 것만으로도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최소한 사이코패스 살인마 새끼로 돌변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였으니까. 녀석은 악한 게 아니라, 그저 용기가 없을 뿐이다.

누군가 녀석을 떠밀어 준다면, 녀석 역시 한 걸음을 더 옮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

“책임이 있잖아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

“그 누구보다도 당신의 잘못이 크다는 거, 인지하고 있잖아요.”

“…….”

“제가 이렇게 구구절절 이야기 하지 않아도, 또 당신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아도, 이게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요.”

“…….”

“오롯이 당신만이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다는 거… 알고 있잖아요.”

“저는… 저….”

“네?”

“저는….”

“…….”

“아마… 아마도….”

‘아마도 뭐. 이 새끼야. 넌 말 잘해야 할 거야.’

“제가… 이기영 님을 도울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지만….”

‘그래. 시바 그래? 돕는 게 좋을 것 같으면 도우면 되는 거야. 그게 네 역할이고, 네게 주어진 숙명일지도 몰라.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어?’

“…….”

‘혹시 알아? 뭐라도 기적이 일어나게 되거나, 내가 너를 가엽게 여겨 무슨 방법을 세워줄지. 2회차에 동상이라도 세워줄지 누가 알겠냐고. 나도 널 이해해. 네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들, 대신 뒈져 달라는 건 무리한 요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니까. 근데 무슨 방법이 있을 수도 있을 거야. 어쩌면 말이야.’

하지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녀석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내 말을 따르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고, 책임을 지는 것은 자신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미지의 영역에 대한 공포가 전신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말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초월자로 태어나 영생을 살기로 예정되어 있는 녀석이기에 더욱더 두려울 것이 분명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도대체 뭘까.

잊혀진다는 것은 도대체 뭘까.

라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과 두려움.

필멸자부터 올라온 새끼가 아니라 윗동네 성골 출신으로 태어났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단순한 죽음으로 비춰지지도 않을 것이다.

갈려 나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에게 잊혀진다는 걸 의미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놈이 제 역할을 해줄지도 모른다고 희망회로를 돌렸지만….

“…….”

“저… 저는 자격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

“…….”

“무슨 자격이요?”

“이… 1회차는… 어디까지나 희생과 부활과, 노을 빛을 위해 만들어진 무대입니다. 개연성을 부과해야 하는 것은 두 분의 역할이라는 것이 시스템의 판단 입니다… 저… 저는 어디까지나 조력자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 대륙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 무엇이든지 하겠지만, 만약 제가 노을의 역할을 대신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원상태로 되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노을의 역할을 대신하기는 싫고, 김현성을 대신하고는 싶다?”

“그…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기영 님. 저는… 확률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겁니다. 만약 제 신체가, 제가 올바른 방법으로 이곳에 강림했다면 조금 더 가능성이 올라갈 수도 있으나. 이기영 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제가 완전하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저는 미켈레 박사의 몸을 빌리고 있는 것뿐이고, 생각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미켈레 박사는 제 안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육체는 한낱 필멸자의 신체에 불과합니다. 저는… 제가 자격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이 저를 허락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미카엘 님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

“실제로 나도 당신으로 가능할지, 가능하지 않을지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네… 제가….”

“그런데…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변명하는 건, 조금 추하지 않나?”

“…….”

“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들… 아직 기회가 없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갈 수도 있고, 다른 기회가 더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곳에서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진다면, 그 가능성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 않습니까. 불확실한 결과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보다는 보다 확실하고 안전하게….”

“그게 전부 다 변명이라는 거예요. 물론 당신 말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미카엘 님, 실제로 당신 죽음이 그냥 개죽음이 될 확률도 있고, 우리가 지금 실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죠. 당신 말대로 불확실한 결과에 거는 것보다, 조금 더 확실한 패에 줄을 서는 게 이성적인 행동이겠죠. 근데 네가 지금 머뭇거리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잖아.”

“그런 게 아닙니다.”

“넌 그냥. 죽는 게 무서운 거야.”

“…….”

“모두에게서 잊혀지는 게 무섭고, 네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무섭고,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어떤 게 널 기다리고 있을지가 무서운 거라고, 얼마나 무섭겠어. 영생을 살아가는 초월자들에게는 도대체 죽음이라는 게 무슨 의미로 다가올지, 나야 바닥 출신이라 너희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들한테도 끝이라는 건 언제나 미지야.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네가 아니더라고 해도… 모두가 무서워하고 기피할 만한 일이니까.”

“…….”

“네가 느낄 만한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게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소실이라면 더욱더… 무섭게 느껴지겠지.”

“…….”

“시발. 진짜….”

“이기영 님… 저는….”

“미카엘, 더 이상 네게 기대할 것도, 화를 낼 이유도 없을 것 같다. 너 같은 겁쟁이 새끼랑 입씨름하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방금 깨달았거든. 내가 네게 원한 게 정말로 갈려 나가서 뒈지라는 것 같았어?”

‘그거 맞기는 해.’

“나는 기회를 줬던 거야. 네가 한 발 더 내디딜 기회, 그리고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거였다고.”

‘짜증 나네. 진짜.’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저런 개 병신 새끼한테 조금이나마 기대 아닌 기대를 했다는 게….

‘내가 병신이었지. 뭐.’

물론 녀석을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기야 한다. 지금 당장 단검을 목에 쑤셔 넣거나, 돌덩이로 놈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물론 노을빛의 세계에서와는 다르게 그리 쉽게 당해주지도 않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내가 녀석을 죽여 제물로 바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놈의 전투능력은 이쪽을 아득히 상회했으니까.

구태여 놈을 처리하고 싶다면 색욕과 영면을 불러오거나,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려야 하겠지.

사실,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가지 방법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는 한다.

여전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고 있었고, 저 멍청한 새끼를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분노를 상쇄시킬 정도로 녀석에게 손을 대는 것이 꺼려진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한시가 급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급한 것이 이기영에게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닿아야 했기 때문이 아니다.

미카엘이라는 놈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이 새끼는 굳이 손을 댈 만한 가치가 없다. 죽일 만한 가치도, 신경을 쓸 가치도, 이야기할 만한 가치도, 상대할 만한 가치도 없다. 놈은 무가치하다. 그리고….

“이기영 님! 잠깐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 이야기를 한 번만 더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건 무모합니다. 이기영 님 자신과 김현성 님을 위해서라도 이건… 이건 위험합니다. 위험하단 말입니다.”

“누가 위험한 걸 몰라? 여기서 주사위를 던지는 게 얼마나 병신 같은 짓인지 모르겠냐고.”

“…….”

“근데, 삶은 늘 주사위를 던지는 선택의 연속이야. 뭔가를 위해 주사위를 던진다는 건 언제나 위험한 선택인 거고.”

“…….”

“따라오지 마. 새끼야.”

“…….”

“괜히 뭐 해보겠답시고 여기저기 들 쑤시지 말고, 조용히 여기서 꺼져.”

“…….”

“넌 죽일 가치도 없고, 상대할 가치고 없는 인간이니까. 너한테 쓴 시간이 아깝다. 병신아.”

“…….”

“소실되는 게 무서웠던 건가. 무서웠던 것 맞지? 근데 그거 알아?”

“…….”

아마 녀석에게는 줄 수 있는 최고의 심판은… 녀석을 기억하지 않는 것일 테니까.

“넌 나한테서 소실된 거야.”

“…….”

“…….”

“멍청한 새끼야.”

멍하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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