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19화
소실(29)
‘아니, 김현성 맞잖아.’
“…….”
“…….”
‘저거 시바 김현성이잖아.’
싸구려 모포와 뭔 거지 같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틀림없이 김현성인 것처럼 보였다.
‘변장한 꼬라지하고는 진짜. 저것도 변장한 거라고….’
당연하지만 1현성이 아니다. 지금 1현성은 한참 린델 수성전에 참여하고 있을 테니, 녀석이 이곳에 있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지금 내 눈을 스쳐 지나가고 있는 건 틀림없이 2현성이었다. 3현성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한번 미카엘에게 위로를 받으며 슬쩍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흔들리는 눈빛, 거칠어진 호흡, 심지어는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팔, 누가 봐도 김현성의 모습이었다.
들고 있는 검도 내가 선물해 준 검이었는데 뭔 정체를 숨기겠다고 저렇게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을 정도.
‘검부터 버리라고 좀.’
지금까지 눈에 띄지 않은 이유가 군중들에 섞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어째서 갑작스레 이곳으로 들어와 굳이 이쪽을 찾아왔는지는 뻔할 뻔 자.
‘이 새끼도 방주가 둥지에 처박히는 거 본 것 같자너.’
둥지로 향하는 게 이미 놈의 계획 안에 존재하기야 했겠지만, 설마 나이스 보트가 비둘기들의 둥지로 처박힐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1회차의 정사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일이었으니 더욱더 당황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어째서 2회차의 방주가 1회차로 소환되어 비둘기의 둥지로 돌진하게 되었는지, 그 영문을 김현성이 알 턱이 없었겠지만 아마 한 가지는 확실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일을 저지른 게 이기영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거 아니었으면 이렇게 허겁지겁 찾아왔겠냐고.’
미카엘이 이곳으로 곧바로 달려올 수 있었던 이유와 같다. 일이 터졌음을 직감하고, 혹시라도 이쪽이 위험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걱정된 것이 분명하리라. 실제로 무모한 작전이기도 했고, 무모하게 보였을 테니 말이다.
김현성이 아직까지 내 안위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기쁜 일이기는 했지만….
‘진짜 타이밍 개같이 못 맞추네….’
“흐으으윽… 아무것도… 히끅… 기억이… 안 난다고요…”
‘좀 빨리 왔으면 시바…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겠단 말이에요… 나도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그럼 여기서 시바 이러고 있지도 않을 거 아니야.’
솔직히 난감한 상황이기는 하다. 마음 같아서는 미카엘이고 나발이고 쳐낸 이후에 당장 김현성을 향해 달려가고 싶은 심정, 애초에 이 새끼보다 김현성을 먼저 만나는 게 베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괜찮습니다. 전부… 전부 괜찮아질 겁니다.”
‘아니, 하나도 안 괜찮아. 지금 시바.’
“흐으으으윽… 흐으윽….”
“이기영 님….”
“흐어어어어어어엉….”
‘눈물만 펑펑 쏟아내야 되자너.’
심지어 하필이면 기억을 잃었다고 고백했을 때 등장하셨다. 이 새끼의 동공이 시바 자진모리장단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니 많이 충격받은 것 같기는 했지만 미카엘에게 안겨 있는 상태로는 김현성의 세 글자 이름을 목 놓아 부를 수가 없다.
차라리 녀석이 이쪽에 먼저 말을 걸게 하는 게 올바른 판단이 아닐까 싶어,
“현성이가… 흐윽… 현성이와의 추억들이… 전부…”
“…….”
“잊혀져 가고 있다고요… 전부 잊기 싫은데… 잊기 싫은데…”
최대한 녀석을 자극하는 말들을 쏟아내며 있는 즙, 없는 즙 전부 짜내고 있었지만 이 새끼는 당최 움직일 생각을 하지를 않는다. 기영 씨. 하며 이쪽을 한 번 부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눈치가 없는 것은 미카엘 이 새끼도 마찬가지다. 슬슬 좀 꺼져줬으면 싶었건만 김현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인지 더욱더 팔에 힘을 주기에 여념이 없다.
아니, 시바 미카엘 이 새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김현성 이 새끼는….
‘와… 저 찌질한 새끼. 시바.’
김현성 저 새끼는 시바 드라마 한 번 본 적 없는 것일까. 현재 이기영이라는 이 캐릭터가 진짜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기영이 진심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미카엘의 위로가 아니라는 것을 정녕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깨닫고는 있을 수도 있다. 단지 움직일 용기가 없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면 마음이 약해질까 걱정이 되는 것일지도 모르지.
김현성이 헐레벌떡 이곳으로 찾아오기는 했지만 애당초 녀석의 목표는 2기영의 확보가 아닌 1기영과의 만남이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녀석의 목적과는 관계없이, 김현성은 지금 슬픔을 삼키는 중이다.
슬프지 않을 리가 없기는 하다. 영혼이 연결되어있는 유일한 이해자가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었다고 했으니, 친구가 하나밖에 없는 김현성의 특성상 견딜 수 없는 일일 것이 당연했다.
‘아주 시바 지가 비련의 주인공이자너.’
지 혼자 세상 모든 고통 전부 삼키고 있자너.
대륙에서 지가 제일 슬프자너.
벌써부터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고 있다. 자기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드라마 찍는 중이자너. 아주.’
홀로 찌질함을 삼키는 것을 보니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은 심정, 결국에는 이 장면을 더 이상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으며 자리를 옮기기까지 하고 있었다.
너무 작위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근본적인 흐름. 이 새끼가 사실은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아닐까.
클리셰 그대로의 행동을 보여주고 있었다.
곧바로 시작되는 김현성의 청춘 달리기.
한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며 목적지를 알 수 없는 청춘 달리기. 제이팝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마냥 오열하며 달리고 계시고 있다.
“으….”
“…….”
“으흐으으윽… 흐으으아아아!”
‘아 진짜 소리까지는 지르지 말라고요. 진짜. 못 봐주겠다고요.’
근데 이게 또 맛있기는 하다.
화풀이를 하는 건지, 아니면 신파 씬에 다른 이들을 개입시키기 싫은지는 모르겠지만 죄 없는 비둘기들만 김현성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는 죄로 썰려 나가고 있는 중.
목적지를 알 수 없는 달리기도 점점 끝나간다. 지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달리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 쪽에서는 전투가 일어나는 가운데, 고독을 삼키기 위해 빈방으로 들어간 김현성만이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다.
“흐윽… 흐으으으윽….”
“…….”
“흐으으으윽… 흐으으으으으으윽….”
‘세상 모든 시련 전부 다 지한테 왔자너. 진짜 드라마 킹이기는 해.’
어째서 세상은 나 김현성에게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주는 것일까. 아아아아. 어째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일까.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착각이 아니다.
“으아아아아아아!!!”
땅바닥을 손으로 쾅쾅 내려치고 있기까지 하다. 비둘기의 둥지가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현성아… 시바… 그만 찌질해… 그냥 대륙의 운명이고 나발이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든가. 뭘 거기서 그렇게 혼자 주접떨고 있는 거냐고….’
생각보다 오래 주접을 떨고 있어서 내가 다 당황스럽다. 훔쳐보기 미안할 정도로 눈물을 훔치며, 방 안에서 홀로 주접 쇼를 찍고 계시고 있다.
자신의 원죄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유대감을 나눈 친우와 멀어졌다는 무서움, 물론 지금 신파극을 찍는 가장 큰 이유는 이기영이 자신을 완전히 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일 것이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을 감내할 결심도 끝낸 상태였겠지만 사실 그걸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지 않았던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말이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거기서 많이많이 고민하시고 많이많이 주접떨어 주세요.’
김현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좋아. 좋아. 좋아.’
망원경을 계속해서 녀석에게 붙여, 떼지 않는다면 녀석의 위치를 계속해서 파악할 수 있다.
다른 어떠한 사실보다 김현성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마음이 편하게 느껴진다.
그간의 불안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걷히기 시작한다.
어째서 하얀이가 언제나 이쪽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요지는 김현성보다 먼저 움직이면 된다는 거 아니냐고.’
길이 하나가 아니기는 했지만, 선택지는 많다. 일단은 김현성과 1기영을 만나게 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
사실 지금 이쪽도 1기영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으니 김현성이 나보다 1기영과 먼저 마주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기서 계속해서 주접을 떨고 있었으니까.
‘김현성보다 먼저 1기영을 찾고.’
“…….”
“…….”
‘가능하면 미카엘 이 새끼를 갈아버리면 돼.’
굳이 미카엘을 버리고 김현성을 먼저 쫓아가지 않은 이유였다.
“…….”
김현성이 무슨 짓을 하건, 무슨 결심을 하건 간에, 놈이 1기영과 만나기 전에 미카엘을 갈아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김현성보다 선수를 치는 셈이다. 김현성에게는 대륙이 우리에게 기적을 줬다고 대충 둘러대면 되고, 미카엘의 희생을 기리는 것으로 마무리.
마침 이 새끼도….
‘희생할 생각 만반이자너.’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미카엘 님?”
“설령 제 모든 것이 다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기영 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약속드리겠습니다.”
“미… 미카엘… 님?”
울먹.
기영이 울먹. 울먹.
‘그… 물어보기 좀 미안하기는 한데… 지켜준다는 의미가… 갈려 준다는 거… 맞지?’
“미… 카엘 님….”
‘그렇지? 갈려 준다는 거지? 이거… 대신… 죽어준다는 거지? 내가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그냥 몸만 지켜준다는 뜻이 아니지?’
괜스레 결연한 표정이 눈에 띈다. 원래 농담기 없는 진지한 얼굴이 놈의 트레이드마크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더없이 진지했다.
본인의 희생으로 일어날 미켈레의 죽음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깃들어져 있는 표정. 당장에라도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의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진짜 지금 당장 갈고 싶어지자너. 군침이 싹 도는 표정이자너.’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이 적절한 상황인지 확실하게 버튼을 눌러도 되는 상황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아직 허가가 내려진 게 아니었으니까.
포맷을 해야 할 정도로 대륙이라는 프로그램이 망가진 상태라고 판단을 내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아직도 캐슬락은 버티고 있었고, 세계수 전선도 선전하고 있다. 린델은 1현성을 필두로 병력들을 밀어내기까지 하고 있다.
물론 캐슬락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세계수 전선도 밀리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
솔직히 관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가능한 상태인지 반문하고 싶어지지만, 시스템과 내가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
‘절차가 진행된 건, 결국 마지막 방어선들이 모두 무너지고 난 이후니까.’
캐슬락, 세계수, 린델의 멸망 이후다. 오래 남은 것 같기도 하지만….
‘원래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흔적도 없이 사르륵 무너지게 마련이자너.’
린델 같은 경우에는 이쪽이 타이밍을 조절할 수도 있으니, 중요한 것은 캐슬락과 이종족 연합. 그리고, 때마침… 아니, 기다렸다는 듯이….
“…….”
“…….”
안개가 걷히고 캐슬락의 마지막 방어선이 뚫리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
얇고 긴 삶이 모토였던 천관위가 죽은 것이다.
*다음 페이지에 샤오린 일러스트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흙수저 : 샤오린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