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515화
소실(25)
비둘기들과 인류가 뒤엉키고 있는 모습이 한눈에 비쳐온다. 왕국연합과 연방의 남은 병사들, 중립국 라이오스, 소수의 생존자들, 인류의 등불로 향하는 패잔병들과 피난민들, 린델, 캐슬락, 세계수 전선과 같은 마지막 저항전선에서 적들과 맞서고 있는 병사들까지.
동 시간대에서 복합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투는 일일이 계산하고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사실상 대륙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전부 통제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애초에 대륙 전체의 지도를 눈에 담은 것은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 굳이 미련을 둘 필요도 없다.
이 모든 게 조금이라도 메슬라 성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함이다.
그 와중에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김현성과 무대의 뒤편에서 함께 봤던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는 것. 무척 익숙한 장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마 인간들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노예 해방 전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마 당신들이 없었다면 저희 왕국과 이종족 들은 진즉에 무너져 버렸겠지요.
-아니요. 저희….
-왕국을 대표해, 흑장미 살롱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라버니의 시신을 수습해 주신 것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렇게 함께 저항해 주신 것도… 모두… 모두 다 감사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여왕님께 감사드려요. 여러 가지로… 은혜를 많이 입었었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이걸로…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요.
-그렇네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엘룬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부디… 검은 장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빛을 밝혀라!!! 세계수의 빛을 밝혀!!!!!!!!!
-사수하라!!!
‘이 새끼… 칼을 빼 들었구나….’
단순히 메슬라 성을 견제하고자 병력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먹고 칼을 빼 든 모양이다.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다. 물론 부자연스럽지도, 이상하게도 느껴지지도 않는다. 멸망을 앞당기도록 부추긴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찌 됐건 간에 진행만 빨라졌을 뿐 정사는 바뀌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파묻힌 캐슬락에서도 연신 병사들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캐슬락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 성벽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모두 무기를 들어!!! 전투인원이건 비전투인원이건 상관없다! 모두 무기를 들고 적들에게 맞서라!!!
-캐슬락은 무너지지 않는다!!! 버텨!!!! 성벽을 넘어오는 비둘기들은 전부 죽여!!!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신의 목소리다!!
-신이시여!!!
‘굳이 집착할 필요 없어.’
지금 저들에게 목소리를 내려주는 건 저들을 동정하거나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 아니다.
-조금만 더 가면 생존자 캠프다! 거기까지만 움직여!
-신의 목소리다… 아직… 아직 신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건가 봐… 흐윽… 우웩….
-아….
-신이 우리를 아직… 버리지….
‘너희들은 조금 더 오래 살아야 돼.’
어디까지나 비둘기들을 전장에 묶어두기 위함이었고, 이 전장을 1기영의 생각대로 설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신이니 뭐니 찾지 마. 그런 건 없으니까.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같은 것도 갖지 말고….’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간단한 이야기였다. 현시점에서 대륙전쟁이 끝난다면 그 많던 비둘기들과 사대 천사들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곧바로 둥지로 돌아와 이쪽을 맞을 준비를 하거나 메슬라 성으로 돌아올 것이 뻔했다.
애당초 1기영이 자신의 기존 시나리오를 버리지 못해 일어난 일이기는 했고 녀석으로서도 도박에 가까운 수였겠지만 얻을 게 아예 없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녀석은 내가 대륙 전체와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마 거기에 어떤 자원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이쪽의 자원을 모조리 거덜 내버리겠다는 의도겠지. 뭐.
사실 1기영의 예상이 딱히 틀리지도 않다. 별것 아닌 일반 퀘스트를 이용해 명령을 내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단위가 단위다 보니 실시간으로 무식할 정도로 많은 신성이 빠져나가는 중.
지금은 지휘관들과 네임드들 위주로 퀘스트를 뿌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혈이 만만치 않다.
심지어 마법사들을 아끼며 메슬라 성에 당도한 비둘기들의 공습을 막아내야 했으니 성에 있는 인원 전체를 통제하는 데에도 많은 신성을 소비해야 했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아껴 써도 일주일이야.’
2회차가 정체되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에도 2회차의 시간은 거북이마냥 움직이고 있다.
말인즉슨 시간 외 업무를 하고 있는데 들어와야 할 월급이 제대로 통장에 꽂히지 않고 있다는 소리다.
1기영이 정확히 이걸 알고 저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간에 놈은 이쪽의 선택지를 제한하는 것에 성공했다.
물론 놈의 선택지 역시 제한되어 있었지만….
‘불편하자너.’
그게 불편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부길드마스터!! 위험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알프스 님. 방주에 내려앉는 비둘기들을 상대하는 데 집중해 주세요.”
“아… 아! 네!”
내 옆에 서서 계속해서 비둘기들을 베어내고 있는 류한을 확인한 이후에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전장으로 향하는 알프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연수 씨도 마찬가지예요.”
“네. 이기영 님.”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 하연수 역시 무기를 고쳐 잡으며 전장으로 향한다.
“망치를 두드려! 손을 멈추지 마라!”
기술자들을 비롯한 작업원들도 전투에 투입된다면 훨씬 손쉽게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지만, 지금 저들을 멈추게 하는 것은 이곳에서 계속해서 고립되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마법사들은 공습 마법에만 대응하고 마력을 아껴!”
근접전은 적들 역시 원하던 바, 하나하나 메슬라 성에 내려앉은 비둘기들과 공화국 병력들 간의 드잡이질이 시작된다.
중간중간 눈에 띄는 비둘기들은 류한의 검에 베여 나가떨어지거나 김창렬과 하연수의 검에 목이 잘려 나간다.
흰둥이를 앞세운 알프스도 전장의 선봉에서 병력들을 독려하며 검을 휘두르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부상자들과 사망자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성벽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군 네임드들의 활약은 인상적이었지만 적군 비둘기들의 숫자와 질 역시 결코 낮지 않다.
김창렬의 검에 몇십 합을 버티고 있는 비둘기도 있었고, 류한의 검을 피해내는 개체 역시 눈에 띄고 있다.
공화국의 패잔병들은 애초에 비둘기들과의 스펙에서 차이 나는 상황,
“이거 퍼즐 맞지?! 어?! 알렉스! 우리 잘하고 있는 거지?!”
“일단 싸워! 씨발!!! 잘 모르겠으니까!!!”
“거기로 한 놈 가는군! 내가 처리하지!”
“캐넌!!”
“다 보고 있다고!! 대협! 여깁니다! 이곳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앗! 아아아아! 신의 목소리! 신의 목소리다! 움직여! 움직여어!!! 알렉스! 나 따라와! 방주로 간다!”
“뭐?!”
“지금 당장 방주로 간다!! 신의 목소리다! 신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 비벼야지.’
“방주! 방주 안으로 진입해! 어서!! 방주로 간다!! 전열을 뒤로 물리며 후퇴하라!”
“전열을 뒤로 물리면서 후퇴하라! 방주에서 막아! 방주 안에서 막으라고!!”
“저 비둘기 새끼들이 방주를 공격하면….”
“보호막!! 보호막!!! 외워!! 외워!!!”
“망치질을 멈추지 마라!!!”
뒈져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망치질을 하고 있는 장인들과, 어떻게든 방주를 사수하려고 하는 이들이 보인다. 계속해서 퀘스트를 뿌려대고 있었고, 실제로도 아군 전력보다 훨씬 많은 비둘기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쪽수에서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네.’
마구잡이로 밀고 들어오니 암살자 두 명과 검사 두 명, 흰둥이 하나로는 저 많은 병력들을 억제할 수 없다.
차라리 제대로 된 마법사가 있었다면 이 꼴이 나지 않았었겠지만….
‘아니야. 아쉬워하지 말자.’
정하얀 정도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어차피 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만약 정하얀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시점에서 마력을 낭비하라고 하지도 않았겠지.
갈 길이 멀다. 메슬라 성에서 둥지로 가는 길 역시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시선을 돌린다. 진군사가 지휘하고 있는 린델을 제외한 캐슬락, 세계수 전선, 피난민 병력, 그리고 메슬라 성까지, 그러다 계속해서 땀을 흘리며 망치질을 하고 있는 유아영에게로 시선이 꽂힌다.
사방팔방에서 비명 소리와 폭음이 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가 망치질을 하는 걸 본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지만 저런 표정을 본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주변에 그녀를 돕기 위해 배치된 기술자들 역시 마찬가지. 심지어 화살이 그녀에 등에 들어와 꽂혔지만 비명 하나 지르지 않고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유아영을 지켜요!”
기다렸다는 듯이 김창렬이 그녀를 향해 쏘아져 나간다. 아니, 이미 내가 소리를 치기 전부터 녀석은 그녀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아영의 눈에는 김창렬도 보이지 않는 모양.
“움직여요! 사다리! 사다리 가져와요!”
“마법사분들 자제를 옮겨 주세요! 시간이 없어요! 빨리!”
“잘라주세요! 던져! 던져 달라고요!”
“사다리!! 옮겨! 사다리 옮겨!!!!”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망치질부터 하라고! 이 멍청한 새끼들아! 지금 장인 정신을 발휘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마지막 걸작이 될지도 모르는데….”
“망치를 두드려라! 자재들 가져와! 밧줄은 어디에 있나!”
퀄리티에 신경을 쓸 여유는 없다. 오롯이 배의 형태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이들이 눈에 띈다.
당연히 이게 불가능할 거라는 건 안다. 현대의 조선소에서도 배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비되던가.
그저 흉내만 내는 물건을 만든다고 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다. 아니,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였다. 심지어 전투 중에 이걸 만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지금 내 눈앞에서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적들과 싸우고, 마법사들이 마법으로 자제를 옮기며, 보호마법을 겹겹이 쌓고, 장인들이 다닥다닥 밧줄에 매달리거나 사다리에 매달려 손을 쉬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저들이 이렇게 맹목적으로 저걸 만드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리는 게 당연하다.
뭔가 일어날 거라고, 분명히 기적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얼굴들이다.
자신들을 이끌어 주는 목소리를 따른다면 분명히 실낱같은 희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표정들이다.
그 중심에는 유아영이 있다. 대륙을 대표하는 강자들이 초집중 상태에 들어가 있을 때처럼, 그녀 역시 어떤 영역에 발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가능하겠는데.’
배가 만들어지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겠는데.’
실제로도 기적을 내려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재능은, 인간의 믿음은 가끔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일도, 심지어 시스템의 법칙에 위배되는 일도 가능하게 한다.
신화 등급의 퀘스트를 내릴 수 있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보상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퀘스트를 내리고 보상을 책정한다고 해서 모든 게 이루어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건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개연성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손가락 들기라는 신화 등급의 퀘스트를 생성하고 보상으로 근력 스탯 100을 상승시켜 주겠다는 보상을 등록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검을 휘두르라는 신화 등급의 퀘스트를 생성하고 보상으로 녀석을 검술 천재로 만들어줄 수도 없다.
근력 스탯을 100을 상승시켜 주겠다는 보상을 등록하려면 적어도 1,000년 이상의 근력운동을, 검술 천재가 되고 싶다면 그만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이렇듯 개연성이 확립되지 않은 퀘스트는 보통 과할 정도의 많은 양의 신성을 사용하게 되거나 퀘스트 자체가 작동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다.
요지는 터무니없는 것을 보상으로 내걸 수 없다는 것.
최소한의 개연성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한 업적을 쌓아야 한다는 것.
“…….”
“…….”
내 눈에는 지금 유아영이 업적을 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적을 일으키기에 적절한 위업을 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홀린 듯이 퀘스트를 입력한다.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방주의 완성(0/1)]
[플레이어 유아영에게 신화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보상을 등록합니다.]
“…….”
“…….”
[나이스 보트]
“이야아아아아아압!”
그리고 유아영이 방주에 다시 한번 망치를 두드렸을 때.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플레이어 유아영이 신화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완료합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2회차의 방주가 차원을 찢고 넘어와 1회차에 당도한 것일까.
거대한 배가 금빛으로 휩싸이며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방주에 올라타라!!! 전원! 방주에 올라타!!!”
기적이 내려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