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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508화 (1,50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508화

소실(18)

폐인처럼 구석에 쪼그려 앉아 죽은 눈으로 벽을 쳐다보는 인형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

“…….”

‘류한?’

내 눈이 삔 게 아니다. 분명히 눈에 보이고 있는 인형은 류한이었다. 성검용사에게 패배하고, 진청의 죽음을 받아들인 이후 그대로 폐인 루트를 타 어딘가에서 객사할 예정인 녀석을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친 것이다.

‘아냐. 뜻밖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

공화국의 피난민들뿐만이 아니라 근처 지역에 있는 놈들이 모조리 캐슬락으로 모이고 있는 것이 현시점의 배경이었으니 공화국 출신인 녀석이 이곳에 있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로 이동했다기보다는 인파에 밀리거나 누군가에게 구조되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리라.

빅보이의 친구들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오게 된 것보다 녀석이 이쪽으로 흘러들어 온 게 더 납득이 간다.

사실 중요한 것은 녀석이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되었느냐가 아니다.

녀석이 지금 이곳, 캐슬락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아직 안 죽었구나? 의외로 질기자너.’

“…….”

아주 약간의 변수만으로도 순식간에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는 팽팽한 줄다리를 하던 상황이었다. 막말로 작은 돌부리에 걸려 비틀거려도 순식간에 전황이 뒤집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어디 무능력한 놈들이 튀어나와도 고마울진대, 그냥 변수가 아니라 거물이 튀어나왔으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도 당연했다.

그 성지훈에게 쳐 발렸던 것도 멘탈에 이슈가 있었기 때문이었지 결코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농담하는 것이 아니라 1,000번을 싸우면 999번은 저 녀석이 성지훈을 요리할 수 있을 거라 단언할 수 있다.

우연에 우연이 겹치고 기적에 기적이 겹쳐 이루어낸 1승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전 재산을 배팅을 하겠냐 묻는다면 류한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얘는 진짜 역대급이기는 해.’

멘탈과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그것 외에는 딱히 다른 단점도 없다.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실질적인 전투 인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귀인 중에 귀인을 만난 셈이었다.

“여기에서 대기하시면 됩니다.”

“아… 네.”

“아마 공화국으로 원정을 떠났던 병력이 회군하고 있을 겁니다. 적어도 세 시간 안에는 도착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요?”

“적습입니까?”

“캐… 캐슬락이 습격당하고 있는 건가요?”

“흐으으윽… 엄마… 엄마아….”

그 와중에 문제가 있다면….

‘이 새끼 상태가 말이 아니자너.’

녀석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에 있었다. 당장 함께 이곳에 대기하고 있는 피난민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설명을 요구하거나, 살려달라고 이야기하거나, 신을 찾고 있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놈은 계속해서 멍하니 벽면을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죽지 못해서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야 1군사의 비보를 듣고, 멘탈이 깨진 만큼 정상이 아닐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망가져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치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라 해야 할까. 물론 원래 빈껍데기 같은 녀석이기는 했지만, 이전의 모습이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다.

안광 따위는 비치지도 않았던 죽은 눈은 더욱더 죽은 것처럼 느껴졌고, 잘 관리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던 머리카락은 몸 전체를 덮고 있었다.

처음에는 뭔 시바 귀신이 저기 앉아 있는 줄 알았다.

때가 꼬질꼬질하게 껴 있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걸치고 있는 옷도 거의 누더기 수준, 거리가 꽤 있는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놈의 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 몸을 제대로 씻을 여유가 있는 놈이 어디 있을까 싶기는 했지만 저 새끼는 최소한의 개인위생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완전히 망가졌자너.’

둠기영 시절 무너진 김현성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거 재활용되려나.’

이미 재활용할 수 없는 일반 쓰레기로 넘어간 것이 아닐까. 굳이 재활용을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게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닐까.

조금 더 시간이 남아 있었다면 류한레기 재활용 계획을 실행했겠지만 계속해서 캐슬락 안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는 비둘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는 고민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아니야. 시바. 이건 못 먹어도 고 해야 돼.’

리스크는 있지만 얻을 수 있는 게 너무나도 크다. 당장 비둘기 둥지로 병력을 끌고 갈 계획을 그리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기본적인 1회차 역사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영웅이라는 점에서도 그랬고, 녀석이 가지고 있는 무력이 그러했다.

애초에 현 상황에서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도 않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봐. 최악이자너.’

“꺄아아아아아아악!”

“씨… 씨발!”

후드득. 후드득.

“아오! 씨발! 깜짝이야!”

“제기랄! 네가 소리를 지르면 어쩌자는 거야? 캐넌! 여, 여러분… 이곳은 괜찮습니다. 여러분. 캐슬락이 함락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 미, 미안해. 알렉스. 맞… 맞습니다. 여러분. 이곳은 안전합니다.”

‘너네 목소리가 떨리고 있으니까. 말에 설득력이라는 게 없자너.’

“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괜… 괜찮습니다!”

“흐어어어어엉… 엄마아….”

“제발… 알타누스시여….”

“제… 제길. 위쪽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이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다 죽는 거 아니야?”

“흐어어어어어엉… 어어어어어어어엉….”

“그러니까 목소리가 너무 크다고! 캐넌 개새끼야!!”

“아… 아, 미안… 여… 여러분 저희는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새끼들이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있자너.’

알렉스 3인조 입장에서는 오히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게 덜 불안할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르기도 했고, 적어도 자신들의 눈으로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여기는 빛이 안 들어오니까. 시야 확보도 안 되고….’

아까부터 들려오는 아군들의 비명 소리도 신경 쓰이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리 전황이 좋지만은 않다. 캐슬락의 주요 병력들이 전부 빠져 있는 상황에서 도미니온스와 세라핌이 갑자기 내려앉았으니 오히려 밀리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지금까지 캐슬락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천관위가 유지하고 있는 안개와 미카엘이 설치해 놓은 결계, 안개에 대놓고 겁을 집어먹고 있는 찌질이 세라핌 때문이었다.

아마 1기영은 지금 세라핌을 찢어 죽이고 싶지 않을까. 혹시나 안개 속에서 위란의 화살이 날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소심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

‘대놓고 트롤하고 있자너.’

물론 그 외의 이점은 없다. 캐슬락의 병력들에게도 똑같이 퀘스트를 보내며 적들에게 응전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공화국이나 에베리아처럼 눈에 띄는 성과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캐슬락 하나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틀어막을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지금 시점에서 다른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저 새끼를 재활용해야 되는 거고….’

“…….”

“…….”

일단은 진청이 꺼낸 편지를 살짝 뜯어본다.

‘별 내용 없네.’

쓸 만한 정보들도 몇 개 있기도 했고, 앞으로의 계획이라든가, 전체적인 그림 같은 것들이 적혀 있기는 했지만 이쪽을 비난하고 욕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지금 쓰기에 가장 유용한 정보는 녀석의 위치와 통신채널 정도밖에는 없다.

‘이 새끼 다시 켜놨네.’

곧바로 망원경 한쪽을 열고, 린델로 향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작은 클랜 하우스를 매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취향으로 인테리어를 끝마쳤는지 제법 멋들어진 광경이 시야에 비쳐왔다.

잔뜩 움츠러들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벨리에와 그런 벨리에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는 선희영.

‘아….’

김창렬과 알프스는 함께 김현성을 쫓고 있고, 하연수는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으니 선희영이 벨리에를 밀착 마크해 집중 교육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지에서 구한 정보원들 몇 명도 보였고, 당연히 방 안 깊숙한 곳에 있는 진 군사도 눈에 비쳐온다.

‘이 새끼 화난 것 같자너.’

[군사님! 군사님! 군사님!]

[왜 지금 연락했지? 내가 분명히 편지를 읽고 난 이후에 곧바로 연락하라고 했을 텐데?]

[제… 연락… 기다렸어요?]

[…….]

[…….]

[미친 자식.]

[저야. 다 사정이 있었죠. 하… 진짜… 왜 이렇게 연락에 집착을 하고 그래요? 심지어 통신 채널 먼저 끊고 차단한 건 그쪽 아니었나? 지금에 와서 왜 갑자기… 구질구질하게 연락 안 된다고 편지까지 보내면서 바짓가랑이 붙잡고 사람 마음 심란하게 만드냐고요.]

[대답할 가치도 없군.]

[그리고 손거울은 또 어디로 가고요. 혹시 파손된 건 아니죠? 창렬이 거야 그렇다고 치고… 아니, 파손됐나 보네. 벽에다가 집어 던지기라고 했어요?]

[그거야 네놈이….]

[아니, 나라고 연락하기 싫어서 연락 안 했겠냐고요! 진짜 사정이 있었다니까! 계속 무대의 뒤편에서 휩쓸려서 날아다니다가 현성이랑도 헤어지고 시바. 지금은 캐슬락으로 비둘기들 다 내려오고 난리 났다고요! 도미니온스랑 세라핌이 여기 날아와서 시바 개판을 치고 있는데 이 상황에서 여유롭게 편지 뜯으면서 연락을 하고 있어요?]

[도미니온스와 세라핌이 캐슬락에 있다고?]

[네. 1기영 이 새끼랑 말싸움 좀 했는데 냅다 끌고 온 거 있죠? 그래서 공화국 병력들 메슬라 성에 집결시키고 에베리아 전선도 전진시키면서 린델로 가는 길 좀 뚫어주려고요.]

[멍청한 자식.]

[아니. 왜요?]

[또 감정적으로 굴다가 일을 그르쳤군. 1회차의 네놈이나 2회차의 네놈이나 둘 다 똑같은 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적어도 캐슬락에 있는 주요 병력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였다면 상황이 조금 더 나았을 거다.]

[주요 병력들이 원정 간 건 어떻게 알았어요?]

[1기영이 병신이 아니고서야 수비병력이 온전한 상황에서 에베리아 전선에 있는 도미니온스와 공화국에 있는 세라핌을 캐슬락으로 부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예리하자너.’

[…….]

[…….]

[그래서, 지금 린델에 있는 병력들을 파견해 이종족 연합군을 도와달라 말하고 있는 건가.]

[아. 네. 그러면 고맙기는 하죠. 여기 천관위나 다른 애들이 오기 전까지 한두 세 시간 걸릴 것 같기는 한데… 그전에 회군시키는 게 베스트니까요.]

[아쉽게도 이쪽 전선은 케루빔과 쓰로누스와 대치 중이다. 병력들을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네놈이 생각하는 극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는 힘들 거다. 살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캐슬락을 빠져나가는 걸 추천하지. 그쪽 정보원이 탈출구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

[손해를 감수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다. 멍청한 놈.]

[…….]

[…….]

[그래서 말인데요.]

[…….]

[사실 여기서 우연히 류한을 만나버렸지 뭐예요?]

[…….]

[근데 지금 반 시체 상태더라고요. 아까부터 얘 좀 어떻게 일으켜 세워보려고 개지랄을 했는데 일어나지도 않고… 무슨 짓을 해도 눈도 안 깜빡이고 벽면만 쳐다보는 거 있죠? 아마 1군사님이 죽은 게 심적으로 타격이 있었나 봐요. 그대로 폐인이 되어버렸더라구.]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무슨 상관이긴요! 군사님이 좀 도와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지! 안 그래도 비둘기 둥지로 가야 되는데 전력이 필요하기도 했고, 지금 이 상황도 타개할 수 있고, 1기영한테 크게 한 방 먹일 수도 있고… 아 물론 직접적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니에요. 뭐 통신 채널 연결시켜서 한마디 해주라고 하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하시고요.]

[…….]

[이쪽에서 알아서 할 수 있기는 한데… 혹시 뭐 튜토리얼에서… 사람들 끌고 다닐 때… 사기를 끌어올리려고 개소리 같은 거 했을 거 아니에요.]

[…….]

[…….]

[이만 끊겠다.]

[아니, 끊지 마시고! 끊지 마시고요! 지금 군사님 센치해지고 화 많이 난 거 1회차에 계속 처박혀 있어서 그런 거잖아요! 지름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가실 거예요? 계속 몇 년 더 여기에 처박혀 있고 싶어서 그래요? 우리 동네 들어가서 마무리해야 할 프로젝트도 있고, 지원받기로 한 것들도 있는데 언제까지 여기서 시간 썩이고 있어야 하냐고요.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빨리빨리 해결해야죠.]

[…….]

[자세한 건 안 물어볼게요. 그냥 뭐 몇 마디 정도 한 것 중에 기억나는 거 아무거나 말씀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하고, 작전 끝날 때까지는 군사님 말도 잘 들을게.]

[…….]

[…….]

[…….]

[…….]

[진짜로요. 나도 답답해서 그래요.]

[…….]

‘말해주나?’

이 새끼도 내 말에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말해줄 거야?’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을 1회차에 써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2회차의 시간 선은 변하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한들, 이런 곳에서 몇 년을 썩히고 있었다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로 다가올까.

이게 지름길이라는 걸 녀석 역시 알고 있을 터.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을까.

조심스러운 진 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와라.]

[네? 어디를 따라와요?]

[새로운 경치를 보게 해주지.]

[…….]

[…….]

[…….]

[…….]

[라고… 했던 걸로… 기억… 하는군.]

‘그걸 입 밖으로 내뱉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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