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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97화 (1,49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97화

소실(7)

꽤 만족스러운 이벤트였다. 당연히, 녀석에게도 만족스러웠을 이벤트였을 것이 분명했다. 조금 우당탕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던가.

미카엘은 오랜만에 자신의 안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냈고, 이기영 역시 미카엘을 통해 실낱같은 희망을 전달받았다. 극의 흐름상 이기영이 미카엘을 대하는 태도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기존의 녀석은 적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지만 지금의 이기영에게 녀석은 뭐라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녀석이었다.

의지할 수 있는 동료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친구라고 불러야 할까. 정확하게 재단하기 어렵기는 했지만, 이기영은 더 이상 녀석을 증오하지 않는다. 아니, 증오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미카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카엘 이 새끼야. 뭐 두말하면 입 아프자너.’

당연히, 미카엘의 경우에는 이쪽보다 더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애초부터 이기영에게 증오심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희생과 부활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가.

태도를 보고 있자면 오히려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물론 부채감이나 죄책감, 혹은 동정심 따위의 감정이 섞여 들어가 있기도 했었지만, 녀석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꽤나 괜찮은 방향으로 말이다.

위에서 김현성과 나의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퍼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미카엘은 우리 둘의 이야기를 꽤 감명 깊게 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그 좁혀진 관계에 비해 함께 지낸 시간이 무척 짧았다는 것. 심지어, 갑작스레 녀석을 품 안에 들이기에는 지난 시간에 쏘아 보냈던 폭언과 극단적인 태도를 곧바로 버리기에도 꽤 민망한 상황이었다.

당장 하루 전에만 해도, 죽이니 마니, 저주하니 마니, 녀석의 무능과 책임론에 대해 악을 쓰며 바락바락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었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갑작스레 녀석을 호의적으로 대할 수 있겠는가.

싸우고 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행동이었다.

상황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우리 어색해졌자너.’

조금은 어색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미카엘이 어색한 행동을 한다기보다는 이기영이 미카엘을 대하는 태도가 어색해야 한다.

근데 시바 실제로도 어색하다. 김현성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기 때문에 더욱더 서먹하다.

‘비 그친 다음에 오두막으로 들어가는 과정도….’

“…….”

“…….”

‘엄청 어색했자너.’

누가 봐도 휴식이 필요하기는 한 상황이었지만, 조금 쉬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분위기. 언제나 감동적인 장면 뒤에는 어색하고 뻣뻣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진짜 역대급이었자너….’

곧바로 쓰러져 자는 척을 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부끄러운 대사를 치는 것보다 오히려 후처리를 하는 과정이 더욱더 어색하다.

“일어나셨습니까? 이기영 님.”

“…….”

“이기영 님?”

“…….”

‘이 새끼는 그나마 얼굴에 철판 깔아서 다행이기는 해.’

존댓말로 바꾸는 게 좋을까? 그게 우리 관계가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이 되지 않을까?

“몸은… 아니, 기억에 다른 이상은 없으십니까?”

“…….”

“괜찮은 것… 같… 네… 요.”

이건 나름대로 내가 녀석에 대한 태도를 달리한다는 액션이었다. 아직까지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어제 일어났던 일이 긍정적이었음을 알려주는 지표다.

말끝에 존대를 붙여 아직까지는 입에 붙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지만 아무튼 간에 존대를 붙였다는 것이 중요했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 놀란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 온다.

‘어… 괜찮은 거 맞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확실했다. 말을 높이냐 높이지 않느냐의 유무보다도 한층 더 친절해진 것 같은 분위기에 의의를 둔 것처럼 보였다.

“다행입니다.”

“네. 다행이라면… 다행이… 겠… 죠….”

“말씀은 편하게 해주셔도 됩니다. 이기영 님.”

“아니… 지금은… 그냥 이게 편해… 서… 요.”

“…….”

“…….”

“지금은… 조금 진정된 것 같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무척 혼란스러운 상태였던 것 같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이지만… 이성적으로 현재 일어난 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이건… 감사를 드리는 게 맞겠죠.”

“당치 않습니다.”

“물론 우리 둘 사이에 밀린 이야기들도 많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들도 많지만… 솔직히 저도 어떤 태도로 당신을 바라봐야 할지, 정말로 당신을 믿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꼬인 이야기들은… 모든 게 끝난 이후에 푸는 게 좋을 것 같아… 요.”

“네. 물론 저도 동의합니다.”

“…….”

“…….”

“그래서… 이후의 플랜은 어떻게 되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제대로 된 계획이 있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본래는 이기영 님의 기억에 의지해 김현성 님을 찾을 생각이었습니다만….”

‘그건 미국 갔고….’

“아마 이 시점에서는 김현성 님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현성 님께서 현재의 시점에 체류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시겠지요.”

‘그러겠지.’

“김현성 님께서 독단적으로 행동하고 계신다면, 아마도 게이트를 타고 이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게이트는 1회차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과정인 만큼, 특정한 상황과 특별한 사건을 중심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는 페널티를 가지고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저희가 김현성 님보다는 발이 더 빠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신 전쟁.”

“…….”

“김현성 님께서 가장 오랫동안 체류할 확률이 높은 시점은 외신 전쟁이 일어났던 시점일 겁니다. 회귀가 진행된 시점은 외신 전쟁이 일어나고도 한참 뒤에 일어난 일이고, 개연성을 부과하는 과정도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을 소모할 테니… 김현성 님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면 일단은 가장 오래 체류하고 있는 시점으로 들어가 김현성 님을 기다리는 게….”

‘그냥 뻔한 말이자너.’

“현 상황에서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선택인 것으로 보입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한 정론이었다. 누구나 전부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정직한 방법 말이다.

물론 놈의 입장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당연하지만 녀석에게 특별한 방법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야 눈앞에 보이는 미카엘 녀석의 겉모습만 대충 살펴봐도 얼마나 지루한 녀석인지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극단적으로 창의적인 생각과는 담을 쌓고 지낸 것처럼 보인다. 아마 지금의 발언이 미카엘이라는 녀석을 설명해 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

돌아가기보다는 정직한 길을 찾아 정답을 찾는 새끼.

부딪치고 부딪치고 결국에는 길을 뚫어내는 새끼.

싫어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이기는 했지만, 이 새끼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한 것처럼 느껴진다. 앞뒤가 꽉 막힌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살면서 무단횡단 한 번 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는 거다.

‘이런 놈이랑 같이 지내면 한 달 안에 숨 막혀 죽을 거야.’

물론 지금은 놈의 계획에 반대하기보다는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타이밍이다.

외신 전쟁 시점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건….

‘나도 동의하기도 하고….’

자칫 일이 꼬였을 때, 1회차 이기영을 만날 수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도 그렇다.

“저도… 동의해요.”

“…….”

“헤르엔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어버리기는 했지만, 1회차의 흐름에 대해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니까요. 시스템이 회귀를 허락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륙을 되돌리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어요. 외신 전쟁으로 인해 대륙이 복구 불가능한 타격을 입었다고 판단한 시점이, 아마 현성이가 알타누스를 대신하게 된 시점이겠죠. 물론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성이에게는 선택지들이 한정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네. 외신 전쟁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이후의 일도 물론 고민해 봐야겠지만….”

“네.”

딱히 다른 말은 필요하지 않다. 뭐 우리 파이팅 하자느니, 꼭 좋은 미래로 닿을 수 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기에는 아직도 녀석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어색함이 감돌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녀석이 내게 손을 뻗는 것이 느껴진다. 슬그머니 녀석의 손을 잡은 것은 당연지사.

이전에도 분명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던 지난번과는 다르게 미카엘과 이기영 사이에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곧바로 바뀌기 시작하는 풍경,

“외신 전쟁에 닿을 때까지,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원하는 시점으로 딱 하고 데려다주는 기능이 아니었던지라 조금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크게 문제는 없다.

시간 여행이라도 하는 것마냥 계속해서 차원을 타고 흐르고 있는 중, 당연히 여러 가지 장면들이 시야에 비친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중,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마치 1회차의 파도 안에 다시 들어온 듯한 느낌이었다.

“과거의 저와 노을께서 함께 머물렀던 곳들도 존재합니다만….”

“확률이 너무 낮아요. 만약 저희가 그 시점을 찾아 과거의 미카엘 님과 현성이를 만났다면, 과거의 미카엘 님께서 기억하고 계시겠죠. 미래를 바꾸는 행동이 정확히 어떻게 개변되고 있는지 확실하진 않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그런 도박은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져요.”

“네… 그럼 다시 이동하겠습니다.”

녀석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던 바로 그때였다.

‘어….’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인형이 시야에 비쳐 온 것.

찰나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이동됐던 터라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틀림없이 내 눈에 스치듯이 지나간 녀석 또한 나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곧바로 몸이 이동된다.

‘카스가노 유노랑….’

“…….”

‘돼지 새끼 아니었어?’

그리고….

“으아아아아아악!”

“살려줘… 아아아아아악! 도망쳐!!!”

시야가 뒤바뀐 이후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금색의 검들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저 기분 나쁜 색깔과 비처럼 떨어지는 금빛의 선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외신 전쟁에 닿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 * *

“형님이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게 사실이요? 다짜고짜 설명도 없이 따라오라고 해서 따라오기는 했다만… 당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요?”

“…….”

“그것보다 대체 여기는 어디요? 이게 무슨….”

“…….”

“…….”

“어?”

“…….”

“어? 어? 어? 어?!”

“…….”

“우와아아아아악! 무… 무녀님! 나… 나 방금 분명히 형님을 본 것 같소!”

“그렇사옵니까?”

“…….”

“…….”

“아니, 분명히 형님을 본 것 같았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형님이 웬 금발 머리 놈팡이 놈이랑 뿅 하고 나타나더니! 다시 뿅 하고 사라졌다는 거 아니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는데! 무슨 순간이동 하듯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진짜 말로 표현을 잘 못 하겠는데! 아… 아무튼 뿅뿅 하고 사라졌다는 거 아니요!”

“…….”

“분명히 형님이랑 눈도 마주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형님이… 납… 납치당하는 걸 본 것 같은데….”

“…….”

“아무래도 형… 형님이 지금 납치당한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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