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81화
무대의 뒤편(2)
김현성의 팔이 나를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기영 씨!”
“…….”
“기영 씨!!”
“…….”
“기영 씨!!!”
“어… 어?”
“후우…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네.”
“꽉 잡으세요.”
“…….”
곧바로 몸이 위쪽으로 솟구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살짝 위를 올려다보자 이를 악물고 차원의 파편을 짓이기며 나아가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평범한 상태로는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노을빛의 날개를 펼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혹시나 페널티를 먹어 강제 역소환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됐지만 직접 영향력을 끼칠 수 없는 무대의 뒤편에서는 다른 페널티가 없는 모양.
마치 포대기에 싼 아이를 안고 있는 것마냥 나를 안아 들고 있어 승차감이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다시 한번 유리가 깨지는 효과와 함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진다. 계속해서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김현성의 몸도 한 차례 크게 흔들린 것은 당연지사.
결국에는 녀석도 날아가는 것보다는 최대한 날개를 펼쳐 이쪽의 몸을 보호하는 것을 선택한다.
무리하게 움직이다가는 오히려 이쪽을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와중에도 여러 가지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김현성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엘레나 님?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세계수를 둘러싸고 있는 비둘기들과 그에 대응하고 있는 이종족 연합, 배경은 에베리아 왕국, 린델과 캐슬락과 함께 인류 최후의 저항 전선으로 선택받았던 장소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설마 인간들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노예 해방 전쟁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마 당신들이 없었다면 저희 왕국과 이종족 들은 진즉에 무너져 버렸겠지요.
-아니요. 저희….
-왕국을 대표해, 흑장미 살롱에게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라버니의 시신을 수습해 주신 것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렇게 함께 저항해 주신 것도… 모두… 모두 다 감사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여왕님께 감사드려요. 여러 가지로… 은혜를 많이 입었었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너희들이 연결고리였구나.’
수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벌여왔던 이 종족과 인간들을 연결시켰던 고리가 너희들이었구나.
제국에서 교국으로 테크 트리 전환에 성공해 노예매매를 완전 금지하고, 엘레나의 파란 길드 가입으로 이종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했었던 2회차와는 다르게 하루 종일 싸움질하고 있었던 1회 차에서의 연결고리는 그녀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녀들에게도 알맞은 역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단순히 퍼즐 조각 이상의 일을 해준 것 같은 느낌이라 놀랍다.
물론 그 이전에 세계수의 오염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무언가 일이 있기야 했겠지만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무래도 그녀들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엘레나가 저렇게 감사를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리를 굽혀 그녀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엘레나. 그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은 페인트 영애였다.
얼굴을 치료하기로 마음먹었는지 화상 자국이 사라져 있는 것 같아 보였지만 오랜 전투로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상한 것 같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와중에 브러쉬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그녀가 이전의 전투에서 사망했을 거라는 생각이 닿는다.
-이걸로… 마지막 싸움이 되겠군요.
-그렇네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부디… 엘룬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부디… 검은 장미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전군! 발사!!!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움직여라! 손을 놀리지 마!!
-세계수는 죽어도 사수해야 돼!
-사수하라!!! 사수하라아!!!! 사수하라아아아아!!!
-빛을 밝혀라!!! 세계수의 빛을 밝혀!!!!!!!!!
-사수하라!!!
이윽고 두 집단이 부딪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직접 검을 들고 전장으로 향하는 페인트,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내딛는 영애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엘레나의 신성력이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어느새 더욱 성장한 영애들의 마법이 하늘을 수놓는다. 점점 병력들이 섞이기 시작하고, 백병전이 시작된다.
페인트의 어깨가 날아간다. 그녀가 주저앉는다.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던 금빛의 검이 공중에 떠 있다.
심판.
죄책감을 금빛의 검으로 변환하는 수많은 검들이 페인트를 향해 쇄도한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전장의 반을 금빛의 검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파스텔이 쓰러진 페인트의 앞을 막아선다.
-아악! 아아아아아악!
-살려….
-피해… 피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일어서….
-파스텔….
-일어…서….
-파스텔! 파스텔!!
-빨리 일어나서… 도망… 쳐… 페인트… 린델… 린델로 가.
-팔레트!! 루스빌라아!!! 파스텔이… 파스텔이!!!
-나… 나 이제… 드디어… 헤….
-파스텔! 파스텔!!! 정신 차려요. 파스텔!!!
-만나러… 헤헤… 만나러 가나 봐….
-파스텔!!!!
-페넬로…티… 헤…헤헤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가 멈추고, 깨진다.
“…….”
“…….”
‘이걸 나한테 보여주는 이유가… 도대체 뭐야… 뭐 어쩌라는 건데.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이었는데… 뭐 어떻게 하라는 거야?’
“기영 씨….”
‘성지훈은 또 뭔데… 뭐 어쩌라고… 진짜… 걔가 그렇게 죽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살아있었어도 죽었어. 결국에는 죽었을 거라고.’
아니, 딱히 목적 따위는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이 무대의 뒤편은 무작위로 계속해서 대륙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서사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익숙한 이들에게 시선이 닿은 이유는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아는 얼굴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수많은 전쟁, 크고 작은 던전을 공략하는 이들, 이름도 알 수 없었던 엑스트라들의 죽음이나, 그들의 삶, 그들의 모험, 그들의 고통, 그들의 아픔, 모든 것이 스쳐 지나간다.
그 와중에 반가운 얼굴도 눈에 비친다.
“빅보이… 칼턴… 유진….”
-어디서 굶고 다닐 놈은 아니라니까.
-그래도 돈은 벌어야지. 이 새끼들아! 그래서 안 할 거야?
-아니, 물론 하긴 하는데… 후우… 참 말년에 팔자가 꼬여도 제대로 꼬였어.
-어이! 햄비어 꼬치 좀 포장해 줘. 우리 꼬맹이 좋아하겠다. 흐흐흐. 그치?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도 스쳐 지나간다.
-이토… 소우타….
김현성이 대륙에 들어온 이래도 마주한 첫 번째 적, 아니, 악.
-제법입니다. 아직 병아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
-이토 소우타!!!
-그래 봤자. 풋내기지만… 저도 민첩 스탯을 중요시하는 검사입니다만… 당신에게는 불행한 이야기일 겁니다.
둘이 검을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세계가 다시 깨어진다.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 앞으로 일어날 일들, 모두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무대의 뒤편에서는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계속해서 깨지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이 반복된다.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비명 소리, 웃는 소리, 이상한 굉음, 파티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 노동자들의 노랫소리, 적군과 아군을 위해 바치는 군가, 신들에게 신앙을 위해 올리는 찬송가.
꽃이 피고, 지고, 물이 흘러 바다로 나아간다. 물 위로 뛰어오르는 고래, 하늘을 바라보며 울부짖는 짐승,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 발전과 퇴화, 분노, 기쁨, 서로가 사랑을 나누는 원초적인 모습으로 가득 찬 풍경, 생명의 탄생, 성장, 그리고… 그리고… 죽음.
곧 사방이 고요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어째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는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환한 노을빛이 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멈추고, 깨져도 계속해서 노을빛이 드는 풍경이 지속된다. 이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어떤 누구도 시야에 비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태어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죽지 않는다. 세계가 깨어지고 있는 현상이 멈춘 것이 아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세계는 깨어지고 무너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풍경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아마 무척이나 오랜 시간 동안이나 이런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계속해서 같은 풍경이 눈에 비치고 있는 것이리라.
살짝 위를 올려다본다.
김현성은 혹시라도 내가 파편에 다칠까 나를 꽉 껴안고 있을 뿐이었다. 김현성이 흘린 피가 점점 내 몸을 적시기 시작할 정도로 녀석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을 유영하면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 더 편하게 보인다.
정체도 알 수 없고, 표류하고 있을 뿐인 이 공간에서 김현성은 무척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호흡은 묘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솔직히 이쪽은 조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편안해진 김현성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조금은… 불안감을 놓게 될 수밖에 없었다.
“…….”
“차원의 바다 기억나세요?”
“네. 물론입니다. 배를 타고 거울 호수에 유람을 떠난 것도… 낚시한 것도….”
“현성 씨 참 낚시 못 했는데 말이죠. 아마 그것과 비슷한 걸로 보이네요. 이곳이 1회차라는 것만 빼면….”
“운이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저도….”
“뭐…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
“…….”
“그런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오셨던 겁니까? 만약 제가 없었다면 어떻게….”
“화났어요?”
“화낸 게 아닙니다. 그냥… 걱정돼서… 걱정돼서 그랬을 뿐입니다. 아까 전에도… 제가 잠깐 흥분한 것도… 전부… 그냥… 전부 걱정이 돼서… 지금도….”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유는 몰라도, 저는 이곳에서 환영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요. 그것보다 정말… 이야기 안 해줄 거예요?”
“그… 하하… 하… 죄송합니다. 기영 씨.”
“이렇게 부탁하는데요?”
“…….”
‘이거 안 통하네.’
“어차피 이렇게 영원히 떨어질 수도 있잖아요. 기왕이면….”
“하하하… 차라리…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네요.”
‘뭔 개소리야. 이 새끼는….’
“아니면 이대로 그냥 다른 차원으로 떠밀려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요.”
‘그건 불가능해. 현성아. 여기는 차원의 바다가 아니니까. 어디로 떠밀려서 튕겨 나가 봤자 1회차의 어딘가일 거야.’
“어디로 가고 싶은데요? 만약에 갈 수 있다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으음… 어디든지 갈 수 있다면….”
“지구는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이미 저는 그곳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많이 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차피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인지라… 지금은 겁날지 몰라도 막상 돌아가면 생각하신 것보다 금방 적응하실 거예요.”
“기영 씨라면 아마 그러실 수 있으실 겁니다. 똑똑하시니… 변호사나….”
“난데없이 엄청 구체적인 직업이 나왔네요.”
“하하하하하하.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사실은….”
“네? 꿈속에서요?”
“네.”
‘참 너답다. 시바.’
“기영 씨는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글쎄요.”
“…….”
“사실 생각나는 건 많지만….”
“…….”
“저는 이곳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
“…….”
“기영 씨라면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문득… 이렇게 편하고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이나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 김현성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분 좋게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살짝 웃어주자 다시 한번 실실거리며 실없는 소리를 해올 것 같다.
그리고.
다시 한번 세계가 멈추고. 깨진다.
“…….”
“…….”
익숙하지 않은 1회차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변한 풍경을 바라보고 갑작스레 굳어버린 김현성 또한 시야에 비친다. 겁을 먹은 듯이 한 차례 나를 더 꽉 껴안아 온다.
내 눈을 가리고 싶다는 듯이 날개와 몸을 이용해 최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다.
아마도.
지레짐작할 뿐이었지만,
지금 내가 무대의 뒤편에서 보고 있는 것이… 청소 사건 때의 김현성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