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77화
대륙전쟁(57)
-생각했던 것보다 더 웃기는 놈이었군.
-…….
-…….
-웃자고 한 소리가 아닙니다.
-룰은 알고 있나?
-공화국의 군사님께서 즐겨 하시는 게임이라 소문이 나 있는데…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모르면 제가 이걸 주워 오지도 않았을 테고요. 누나와 심심풀이로 몇 번 돌려본 적도 있습니다. 아마 꽤 재미있으실 겁니다.
-공화국에도 눈이 있었나 보군.
-이미 알고 계셨으면서… 참… 일부러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죽어가는 마당에 쓸데없는 견제구는 던지지 맙시다. 군사님.
-…….
-중독에, 과다출혈에, 이렇게까지 오래 버티시는 게 신기할 지경인데…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런 상태로 암살자들을 전부 때려죽이신 것도 신기하고… 믿으실지 믿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 제법 아끼는 얘들이었는데… 땅바닥에 걸레짝마냥 죽어 있으니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않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말 걸 그랬어.
-…….
-…….
-몸이 정상이 아니기는 하지만, 네놈 하나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무슨 생각으로 여기 온 거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게임도 좀 하고… 겸사겸사 물어볼 것도 있고… 그리고, 죽일 생각이 있으셨으면 벌써 죽이셨겠죠.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애초에 살 생각이 없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타입도 아닌지라… 알고 계시겠지만 무리하시면 빠져나가실 수 있으실 겁니다.
-…….
-지금이라도 지혈하면 생존 가능성도 더 높아질 테고… 다른 게 조금 문제가 되기야 하겠지만 군사님에게는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닐 것 같고… 물론 시체들 사이로 땅바닥을 기어간다든가, 추적대를 피해 온몸을 웅크리고 숨어 있어야 한다든가 하는 군사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한 짓거리를… 그러니까 불명예스러운 짓거리를 해야겠지만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군사님께서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마냥 조용히 의자에 앉아 계시니… 뭐… 살 생각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와중에 암살자들한테는 또 안 뒈져주시고….
-…….
-누가 보더라도 절 기다리고 계시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터라… 복수라도 하실 생각이셨어요?
-어처구니없군. 복수할 생각이었다면 진즉에 움직였을 거다. 내가 네놈을 처리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하하….
-물론 내가 그녀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고, 그녀가 꽤 재미있었던 종류의 인간이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나는 그런 쓸데없는 감정에 대의를 그르칠 정도로 멍청하지 않다. 남아 있는 건 인간적인 연민 정도겠지. 지금은 그저 패전의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 뿐이다.
-복수의 이유가 아이나 페넬로티, 그녀 때문이냐 묻지는 않았습니다만.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들에 대한 복수는 생각하지도 않으시나 봅니다?
-…….
-…….
-대답할 가치도 없군.
-한번 만나보고는 싶더군요. 난세에는 영웅들이 태어나고, 이미 이곳에서 수많은 영웅들을 봐오기는 했지만, 본래 꽃을 피우지 못한 영웅에게 관심이 더 가는 법 아니겠습니까. 신 흑장미 살롱인가 뭔가 하는 구호집단도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는 듯하고… 군사님께서도 그리 관심을 보이시니… 영특하기는 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대륙에 있는 귀족이나 권력자들은 모조리 쓰레기들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네 말대로 올곧은 면이 있기도 했었지. 천재이기도 했고 말이다. 욕심이 가는 인재였다. 그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군.
-참… 그런 사람들이 조금만 더 많았어도 대륙이 이 꼴이 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제가 듣기로는 신 흑장미 살롱이 4-2전선에서 꽤 활약했다고 하더군요. 여단을 쫓고, 심지어 몰아내기도 하고… 물론 이쪽에서도 상정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생기기는 했지만, 아무튼 전쟁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는 않는구나 하는 걸 여실히 느끼기도 했습니다.
-…….
-이런 게임에서야 우리가 무슨 패를 가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갑자기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놈들이 변수가 되기도 하고, 승률이 높다고 생각한 전선에서도 어처구니없게 밀리기도 하고,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 놈들이 갑자기 각성해서 전쟁 영웅이 되기도 하고….
-그 변수에 대응하는 것이 지휘관의 역량이다. 전쟁이 짜인 각본대로 움직인다면 우리 같은 인간들이 필요하지도 않았겠지.
-운이라는 요소가 아예 적용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번에 제가 이긴 이유는….
-기회를 활용하는 것도 능력이다. 네놈은 너무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 매번 네놈과 같은 판에 설 때마다 느끼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이 내가 운 때문에 졌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이다. 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어떤 일이 생기든 간에… 모두 내 계산 안에 있다. 네가 기회를 잡아 만들었기 때문에 네놈이 그 자리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겠지.
-…….
-…….
-우리 지금 마주보고 있지 내려다보고 있지는….
-표현이 그렇다는 말이었다. 멍청한 놈. 요지는…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는 거다. 나는 방심한 적도 없고, 세간에 떠도는 개소리와는 다르게 미치지도 않았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이 전쟁에 임했고… 결국에는 네놈에게 패배했지. 다른 변명이 필요할까.
-쓸데없는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몇 번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제가 보기에는 군사님께서 딱히 이성적인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이야기하시는 것과는 다르게요. 어쩌면 군사님 말씀이 맞을지도 모르죠. 아니, 군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자존감이 좀 낮아요. 저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제가 무슨 배짱으로 이 전선에서 군사님과 정면으로 맞부딪쳤겠습니까.
-…….
-주사위를 던질 만해서 던진 겁니다. 단언하건대 당신이 정상처럼 느껴졌었다면 굳이 던지지 않았겠지.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네놈의 마음이지만… 네 승리에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다. 이기영. 믿지 못하는 건가? 주변을 둘러봐라. 이게 네놈이 만든 결과물이야.
-…….
-내가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줘야 하나.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여자의 죽음을 4년 동안이나 잊지 못해, 평정을 잃고, 이성을 잃고, 복수에 미쳐,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해서 전쟁을 망쳤다고 이야기해 줘야 하나? 그래야 네놈이 스스로의 승리를 인정하고 만족할 수 있겠나? 누구나 다 네놈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누군가에게는 복수가 목적 그 자체이자 동력일지는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고 쓸데없는 미련이니.
-…….
-이제는 네놈에게 졌다는 것도 수치스러워지는군.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지휘관보다 더 멍청한….
-자꾸 띄워주시는 것치고는 제가… 너무 밀리고 있는 것 같아서….
-…….
-…….
-시작하기 전에는 꽤 자신이 있었는데… 솔직히 확 눌러버리고 비웃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개같이 밀리고 있잖습니까. 말과 행동이 다른 것 아닙니까?
-네놈이 머리가 그리 좋지는 않다는 거겠지. 아니, 그것보다는 자기파괴적이다.
-…….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서툴러.
-흐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
-…….
-의미 없는 속임수였다. 기만하고, 속이고, 덩치를 부풀리는 게 딱 네놈 같기는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알맹이가 없군.
-아. 그럼… 이번에는 이렇게….
-억지로 쥐어짜낸 과감함이다.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에 자극을 받은 것마냥 연기라도 하는 건가. 이 또한 허수로군.
-…….
-…….
-군사님이 너무 고이신 것 아닙니까?
-어처구니없는 변명이군. 그저 간단한 게임일 뿐이다.
-…….
-…….
-그럼 이렇게 한번 해보도록 하죠.
-추하군.
-그럼 이건….
-후우….
-조금 자존심 상하네요. 이 정도로 밀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는데….
-…….
-그럼….
-…….
-이건 어떻습니까.
-…….
-…….
-재미있는 수였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군. 기왕이면 그 여자가 더 좋았을 뻔했다. 이렇게 대면하면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만 네놈과는… 네놈과는 여전히 대화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군.
-죽어 가시는 주제에 원하시는 건 참 많으십니다. 군사님의 마지막을 함께해 주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한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대놓고 다른 사람을 불러오라니. 기본 매너는 지키셔야죠. 네?
-…….
-사실 이야기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누나도 같이 오고 싶어 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누나랑 같이 오면 싸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
-누나는 당신을 살려두고 싶어 할 것 같거든. 인재 욕심도 많고 어디 쓸 데가 있나 고민해 볼 것 같단 말이야. 나도 설득당할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왔어요.
-…….
-나도 욕심이 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당신은 지나치게 유능해. 우리가 쓰기에는 너무 유능한 사람이야.
-패배자에게 하는 말치고는 다정하군.
-언제부터 우리를 알고 있었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군사님 때문에 어긋난 계획이 한두 개도 아니고… 심지어 우리를 이용하기까지 했잖습니까. 몇 번이나.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궁금한 게 이상합니까? 또 누가 알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몇몇은. 그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어차피 네놈들이야 곧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아닌가. 내 말이 틀렸나… 이기영.
-…….
-…….
-역시 당신은 안 돼.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
-…….
-자. 그럼 슬슬 본론입니다. 군사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요.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예전에 있었던 청소. 그때 그 계획에 동의했던 사람들 명단 군사님이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공화국으로 망명한 그 새끼. 그 새끼한테 전부 다 들은 거 아니었습니까?
-이미 네놈도 알고 있는 게 아니었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하는 것뿐이지.
-내가 말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죽는 마당에 자존심 챙기지 마시고 시원하게 입 열어주고 가세요. 어차피 물어볼 사람은 많으니까.
-…….
-…….
-제국의 여왕 샤를롯트.
-말이 통하네.
-캐슬락의 송정욱.
-죽였고.
-교황청의 말렌 추기경.
-죽였고.
-다완의….
-네. 네. 네.
-실리아의….
-죽였네요.
-그리고….
-…….
-…….
-린델의 김현성.
-…….
-…….
-…….
-그럼, 용건은 끝인가.
-후우… 네. 용건은 끝난 것 같지만…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퍽이나. 고맙군.
-…….
-…….
-…….
-군사님 때문이 아니라… 일출이 꽤 멋있어 보여서요.
-…….
-군사님 더 안 두십니까?
-…….
-…….
-이건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았다.
-…….
-…….
-군사님?
-…….
-…….
-그래….
-…….
-이제… 기억이 나는 군….
-…….
-나 참… 여기서 죽으면 제가 이긴 겁니다.
-…….
-…….
-그러고 보니….
-…….
-…….
-해가 뜨는 걸… 바라보는 게… 좋다고….
-…….
-했었지….
-…….
-…….
-…….
-아이… 나….
-…….
-…….
그리고,
“…….”
“…….”
“린델의 김현성이… 무슨 뜻인가요… 현성 씨.”
“…….”
“기영… 씨?”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