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72화
대륙전쟁(52)
정진호는 다른 세상 속에 있고, 영애들과 여단원들의 싸움도 마무리됐다.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 어떻게 풀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던 실타래들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성지훈과 류한, 알프스와 발렌틴 알렉산드로였지만….
‘알프스 쪽은 괜찮아.’
파란의 미래가 발렌틴 졸렬산드로에게 당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흰둥이가 본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근 저조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녀가 괜히 파란 길드로 영입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미 한 차례 부딪쳐 봤을 때에도 전력적으로 우위에 있었으니 그다음에 일어날 싸움에서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할 뻔 자.
그녀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발렌틴 알렉산드로의 내구와 체력을 뚫어내는 것 정도밖에는 없다.
결국 남아 있는 과제는 성지훈과 류한.
이전처럼 광기에 휩쓸린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도 여러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전장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야아아아아아!!
-죽여!!!!
-으악…. 아아아악!
4-2전선의 풍경은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봤던 모습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반전쟁 연합군은 전투에서 이탈하기를 원하거나, 부상당해 움직이는 이들을 돕고 있었고, 각 진영의 병사들은 서로를 향해 칼과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반쯤은 관성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은지라 이전보다는 열기는 확실히 가라앉아 있는 것이 그나마 나아진 점이겠지만 근본적으로 제 살을 깎아 먹고 있다는 것은 같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전쟁을 멈추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성지훈이 조용히 입을 닫고 있었다는 것.
녀석의 시선이 멈춰 있는 곳에는 조용히 주변을 바라보는 류한이 자리해 있었다는 것이었다.
‘싸우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자너. 진도 너무 느리자너.’
지난 2차전 때와 비슷한 분위기라면 비슷한 분위기, 이제 3차전이었으니 그냥 마음 편히 구경하고 싶기는 했지만 저 아픈 손가락을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아무래도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시바… 아무리 생각해도 털릴 것 같은데.’
각성 이벤트를 벌써 여러 번 진행하기도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녀석은 아직 애새끼다.
쉬이 감정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깃발을 꽂고, 토지를 단단하게까지 만들기도 했지만 성검용사는 아직 불완전하다.
객관적인 중요도로만 따지면 영애들보다 녀석이 우선순위에 있는 것은 당연지사.
크게 이름을 날리지 못했던 영애들과는 다르게 성검용사 성지훈은 앞으로 대륙을 이끌어 나갈 중요 인물이었다.
갑작스레 이런 곳에서 객사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정사가 모두 꼬여 버린다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류한을 보고 흥분한 듯이 숨을 거칠게 내쉬는 녀석. 자신의 주적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에는 깊은 분노가 들어차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쁜 친구는 아닌 것 같기는 한데… 상황이 조금 억울할 뿐이자너.’
성검용사가 바라보는 류한은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것도, 갑작스레 지면을 무너뜨려 대량학살을 한 것도, 모두 공화국의 1좌 류한의 잘못이라 생각하고 있다.
거듭된 이벤트를 통해 정의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감성이 불타고 있는 녀석이었으니 어떻게 류한을 내버려 둘 수 있겠는가.
4-2전선의 존망이 지금 이곳에 있는 전투에서 결정이 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류한….
성검용사가 조용히 절대 악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당연히 류한은 녀석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류한!!!
-…….
-류하아아아아아안!!!!!
저쪽에서도 성지훈!!!! 하면서 같이 텐션을 올려주면 영혼의 라이벌 대격돌 느낌이 날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성검용사의 뜨거움은 류한에게 닿지 않는 모양, 절대 악은 그저 검을 들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지훈이 뛰쳐나간 것은 당연지사. 이 전보다 빠르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검을 들고 녀석을 향해 쇄도한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앙!!
-으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을 부딪치는 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그거자너. 검 부딪친 상태로 힘겨루기하는 거자너.’
어디에선가 많이 본 듯한 장면, 서로가 검을 맞대고 있다. 심지어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다.
그 와중에 성검용사는 “류하아아아안!”이라는 소리를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내뱉고 있는 중.
대륙에서 많은 검사들의 격돌을 지켜보기야 했지만 단연코 이런 만화 같은 힘겨루기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왠지 모르게 이 서브컬처 중독자가 연출한 장면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괜스레 내가 성지훈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의 명장면, 그간 봐왔던 것과의 차이점은 상대가 성검용사의 뜨거움에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사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림이 꽤나 달라진다.
‘괜히… 부끄러워지자너.’
-당장 전쟁을 멈춰!!
‘아니, 걔가 어떻게 멈추겠어. 그리고 네가 멈추라고 말한다고 멈추겠냐고.’
-…….
-당장 이걸 멈추게 하라고!!
-…….
-으직으드드드득!
아무래도 성지훈 이 새끼는 류한을 일생일대의 대적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놈에게 류한이라는 존재는 마왕보다 더한 악당이며, 지금껏 본 적 없었던 빌런이자 라이벌일지도 모르겠다.
하기사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미 두 차례나 부딪친 전적이 있었고, 결과는 모두 성지훈의 패배였다.
성검용사는 녀석에 의해 소중한 동료를 잃었고, 녀석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았으며, 그 아픔들을 딛고 일어났다.
주인공 감성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녀석에게 이보다 더 대적자로 어울리는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한쪽이 차가움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뜨거워지는 온도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
‘이 새끼는 진짜… 어디에 놓고 다니기 부끄럽기는 해.’
제발 류한이 상호작용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힘겨루기가 끝난 이후에 다시 대치한 둘.
-널 때려 눕혀주마. 류한.
이쯤 되면 류한이 기계 같은 녀석이라는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단언하건대, 만약 진 군사가 류한의 포지션에 있었다면 당장에라도 도망쳤을 것이 분명하리라.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마냥 화들짝 놀라 도망치겠지.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시바 대적자가 맞기는 해.’
꾸역꾸역 무시하는 거 보라고, 별다른 생각도 안 하고 있자너. 저게 프로지.
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두 번째 힘겨루기를 하기 위해 쇄도한 녀석이었지만 류한이 그런 비효율적인 짓거리를 두 번이나 받아줄 리 만무, 곧바로 몸을 피한 이후에 검을 뻗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막아야 돼.’
-…….
-…….
‘지훈아. 시바. 뜨거워지는 건 뜨거워진 거고, 집중할 때는 집중해야 돼.’
-…….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시바. 연습 한 대로… 연습한 대로만 하면 돼.’
순식간에 사방에서 뻗어져 나오는 검격, 일반인들은 아예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한 검기. 그 정진호조차 녀석과 검을 마주하는 걸 경계했었다.
하지만.
-…….
-이… 이야아아아!
우리 성검용사 성지훈은 우렁찬 기합을 내뱉으며 녀석의 검을 받아낸다.
본인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에 보이지 않게 다가오는 참격을 모조리 흘려보낸다.
굳이 기합 소리를 내뱉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정신을 지배하기는 했지만 녀석의 눈물 나는 성장 앞에 그런 건 사소한 일이 되어버린다.
물론 전에도 녀석은 류한의 검을 막아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때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아예 반응조차 하지 못했던 1차전, 단순히 검을 받아 치는 것에만 급급했던 2차전 때와는 다르게 3차전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며 차분하게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성지훈의 검이 흐르는 것이 눈에 보인다. 공수가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동작은 자연스럽다는 수준을 넘어 고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시바… 진짜… 천재기는….’
“이 새끼….”
‘천재야.’
성장 속도가 경이롭다.
저 멘탈과 성격으로 성검의 주인이 되어 대륙의 용사로 추대된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뇌리에 계속해서 꽂힌다.
눈으로 일일이 확인이 불가능한 참격들을, 헤아릴 수도 없는 검의 파도를 뚫어내고 있었다.
훈련 조금에 멘탈 코치를 조금 해준 걸로 이 정도로 달라줄 수 있다는 게 경이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보여.
‘그런 대사만 좀 내뱉지 마.
-이제는 전부 보인다고! 류한!
‘이 새끼 시바 이거 절대로 컨셉 아니야.’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말이야!
-…….
‘그래. 시바 근데 네가 하는 것 보면 보이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해. 굳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는 것 같아.’
심지어 체급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절대로 거리를 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류한이 순수 체급으로 자신의 거리를 내주고 있는 것이다.
정진호가 녀석의 머리를 잡고 패대기치기 위해 여러 가지 함정을 파놨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성검용사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행동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성 문제가 크다.
정진호는 류한 같은 타입에게는 조금 약할지 몰라도, 성지훈, 특히나 김현성 같은 타입을 상대로는 완벽에 가까운 카운터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진호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딱히 녀석을 봐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을까.
‘이거 진짜 딱히 필요 없는 거 아니야? 알아서 잘하겠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다시금 김현성에게 시선을 돌렸을 정도였다. 잠깐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나온 판단, 솔직히 성지훈이 고군분투하는 것보다는 김현성이 전장을 거니는 것에 시선이 더 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혹시라도 다시 사라져 버릴까 계속해서 망원경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딱히 내가 코칭해 줄 것이 없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슬슬 잡생각도 들기 시작한다.
‘이 새끼는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곧바로 다음 행동에 들어가지 않을까, 아니면 다른 액션을 보여주지 않을까.
김창렬에게도 이미 예의주시하며 특이사항이 있으면 보고해 달라는 말을 전했지만 정말로 특이사항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전쟁터를 거닐며 전투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고, 가끔 박사에게 떨어지는 눈먼 마법이나 눈먼 화살들을 처리해 주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여기에 볼일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전투에 개입하지도 않고 있고 엑스트라 1로서 행동하고 있으니….
‘이 새끼 진짜 속을 모르겠자너.’
문뜩 이 전쟁 끝난 직후에 일어날 일까지 생각이 미친다.
김현성이 현재 자리해 있는 4-1전선에서 전투가 끝나고 일어날 일이라고 한다면 아마….
“…….”
‘1기영이 1군사의 마지막을 지켜봐 주지 않나?’
지켜봐 준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놈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이 씨바.’
“…….”
“…….”
또 무슨 일이 낫구나 싶어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자,
“…….”
“…….”
‘그럼 그렇지. 시바.’
기대한 내가 병신이었지….
‘사람이 그렇게 한순간에 변하지는 않지. 시바. 너는 특히 그렇지. 이 멍청한 새끼야.’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성검을 부여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성지훈이 시야에 비쳐왔다.
불안한 눈빛, 쉴 새 없이 주변을 둘러보는 것까지.
심지어 그 상태로 류한과 대치하고 있다.
“하아… 하아… 하아….”
이 멍청한 녀석이 내가 사라진 걸 알아차렸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