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60화
대륙전쟁(40)
하도 많이 녀석에게 당하다 보니 이번에도 가짜 각성을 한 것이 아닐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된 것 같은데….’
녀석의 안에서 계속해서 빛나고 있는 유리엘을 보고 있노라면 녀석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성지훈에게 빈정이 상해 힘을 빌려주지 않는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녀석의 어처구니없는 배신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리 있는 유리엘은 마검으로 변모하지도 않았다.
이미 대충 예상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중요한 것은 자격 그 자체였던 모양, 그 자격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건 간에 녀석이 유리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자격이고 나발이고 내 알 바 아니자너.’
물론 여러 가지 예상이 가는 점은 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약자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나, 대륙을 지키겠다는 의지, 흔들리지 않은 신념, 선하고 정의로운 마음….
말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유리엘의 인정을 받는 첫 번째 조건은 순수함일 거라고 생각했다.
얼핏 느껴지기에는 쉬운 것처럼 느껴지는 조건이기는 했지만 아마 평범한 인간이 녀석의 기준을 통과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솔직히 당장 주변을 찾아봐도 딱히 순수함이라는 조건에 부합되는 녀석들을 찾기가 힘들다.
‘순수하면 하얀이이기는 한데….’
왠지 모르게 녀석의 조건에 부합하지는 않을 것 같다.
‘현성이도 순수하기는 한데….’
최근에 하는 짓을 보면 의외로 구렁이 같은 기질이 있는 것 같아 열외.
‘혜진이야 뭐….’
사실 얘는 어떤 성검에 가져다놔도 프리패스 할 상이라 언급하는 게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진 군사, 지혜 누나 같은 애들은 당연히 탈락. 안기모같이 능글능글한 녀석들은 검을 손에 가져다 대지도 못할 것이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꽃기영을 잃은 우효열이 아슬아슬하게 놈의 기준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유리엘이 비주얼 심사를 본다고 한다면 어림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만큼 순수하게 보일 정도로 맹목적인 어떤 것이 중요했다는 거다. 아마 초반부의 성지훈이 유리엘에게 인정받았던 이유도, 맹목적인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반부의 녀석은 순수하게 대륙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꽉 차 있었고,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이 대륙을 완전히 게임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살인에 무감각해지면서 유리엘에게 손절을 당하기는 했지만, 심지어 그때에도 녀석은 대륙을 구하겠다는 순수한 열망으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마 녀석이 잠깐 동안 유리엘을 다루지 못했던 이유도, 잠깐 동안 녀석의 버릇을 고쳐주고자 하는 느낌이지 않았을까.
유리엘이 녀석의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녀석을 만지고 꺼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 순수함의 결정체 빛기영에게 유리엘이 자신을 허락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증거였다.
‘순수함이야말로 유리엘을 움직이는 열쇠인 것 같자너.’
성검용사는 단 한 번도 순수함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순수한 의지로 가득 차 있다.
녀석은 순수하게 대륙을 구하고 싶어 하고, 진유와 함께하고 싶어 하고, 다른 이들을 비춰줄 수 있는 달빛이 되고 싶어 한다.
지금 당장은 그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녀석의 몸에서 유리엘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었다. 물론 일종의 항의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 성지훈 혼자 성검을 뽑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 당황스러웠던 것은….
‘이 새끼 왜 혼자 못 뽑는 척하는 거냐고.’
녀석이 아직까지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럼 훈련하기 전에 검 좀 뽑아 줄 수 있을까?”
“네. 용사님.”
“…….”
“…….”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자너.’
본인이 쓸데없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걸 들키기 싫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검을 받아 든 녀석이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오기 시작했다.
깃발을 꽂아 놓았으니 이제는 그 토양을 한층 단단히 해야 할 시간이라는 걸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 그래서 진유 네 생각은 어때? 어떻게 해야지 녀석에게 이길 수 있을까?”
“…….”
“글쎄요… 사실 저는 용사님이 결코 그 사람에 비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그래?”
“네. 다만 경험의 차이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냉정함을 잃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침착하고, 빈틈이 없어요. 마치 골렘같이 말이에요.”
“응. 맞아. 나도 기계 같다고 생각은 했었어. 절대로 평정을 잃지 않은 것 같아. 물론 나도 그때 너무 흥분해서 잠깐 이성을 잃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류한은 정말로 강했거든. 흔들리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보기는 했지만 전부 간파당한 느낌이라. 내 공격이 읽히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사실 용사님의 검술과는 궁합이 그렇게 좋지 않으니까요. 단순히 빠르기만 했다면 아마 용사님께서 더 상대하기 쉬우셨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의 검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게 아니에요.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1에서 10으로 단숨에 이동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과만 남는 것 같아요.”
“그렇네. 맞아. 딱 그런 느낌이었어.”
‘그런 느낌이 아니라 그게 맞아.’
사실 이걸 검술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놈의 검은 공간을 점프하는 듯 했으니 말이다. 놈은 그냥 검을 휘두를 뿐인데도 말이다.
“검이 공간이동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상대하기 한결 편하실지도 몰라요. 과정이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국 도착지는 같으니까요.”
“아.”
“용사님이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요. 흥분하지 않고 수비적으로 운영하면서 류한의 검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예요. 물론 지금부터 익숙해 질 수 있으면 더 좋고요.”
“응.”
“루스빌라 님, 함가르디아 님과 라이넬피아 님까지 도와주신다고 하셨으니… 아마 훈련이 되실 거예요.”
“응.”
‘간단하지만 효과는 있을 거야.’
루스빌라의 대규모 투명화 마법을 이용한 훈련이었다. 단기적이지만 꽤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훈련 방법. 딱히 어렵지도 않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차단한 이후, 투명화 마법을 걸고 성지훈을 신나게 두드리는 것이다. 보통 투명화 마법 같은 것들은 충격이 들어가기 직전 마법이 해체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성지훈의 입장에서는 검이 어디로 날아오는지 알 수도 없고 공격을 받았다는 결과만 남는 셈이었으니 벼락치기로는 나름 적절한 훈련이기도 했다.
“용사님의 검은 부드러움을 기초로 하니까요.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만약 적응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용사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운영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무작정 따라가는 것보다는 용사님의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해요. 용사님의 검로를 비틀거나 수정하지 않은 방향으로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나요?”
‘우아하고 고상하게. 그림 그리는 느낌으로다가. 뭔지 알지? 네가 맨날 하는 거 있자너.’
“그런데… 확실히 진유 너는 내 검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네.”
‘내가 시바 이런 거 한두 번 하는 줄 아냐고.’
“용사님의 검술뿐이겠어요?”
“어?”
“저를 거쳐 갔던 검사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넌 상상도 못 할 거야. 시바.’
노을빛부터 시작해서 끝도 없어. 대부분이 너보다 훨씬 더 잘 써는 애들이라고. 솔직히 너랑은 비교 자체가 안 돼요.
“검술에 대해서 잘 아는 게 당연하겠죠.”
“어… 어?”
‘이 새끼 왜 당황해. 시바.’
왠지 모르게 실망한 느낌이 든다면 기분 탓일까.
설마 했지만….
“내… 내가… 첫 번째 주인… 아니었어?”
“…….”
“…….”
‘진짜 이 새끼는 끝까지 가지가지 한다.’
별것도 아닌 거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모습에는 괜스레 뒤통수를 치고 싶어진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잠깐 동안 할 말을 잃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왠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듯한 얼굴, 자신이 제발 첫 번째 주인이었으면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왜 눈치를 봐야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은근히 눈치를 보며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네.”
“그, 그럼 첫 번째 주인은… 어땠어?”
“그건… 왜요?”
“그, 그냥 궁금해서 그렇지. 다른 주… 주인들은 어땠나. 궁금해서. 뭐 다른 의미가 있…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순수한 궁금증… 그, 그래. 당연히 성검이었으니까. 다른 주인들이 있었던 게 당연하겠지… 그… 그렇지?”
“…….”
“…….”
“그, 그래서 첫 번째 주인은….”
“빠른 검술을 구사하는 분이셨어요. 손만 빠른 게 아니라 발도 빨라서… 물론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었어요. 체력도 좋았지만 기술이 그 어떤 검사보다 뛰어나셔서… 솔직히 제가 지금껏 본 검사들 중에 기술적으로도 가장 완성되어 있으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천재 중에서도 천재라고 불릴 만하셨죠. 힘은 또 얼마나 강하셨는데요. 마력도 높으셨지만… 역시나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민첩함인 것 같네요.”
“아… 아… 그래? 다, 다른 주인들은….”
“두 번째 주인님은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다루기 힘든 긴 장검을 다루는 분이셨는데… 덕분에 저도 형태를 변환해야 했거든요. 거리 감각이 뛰어나셔서… 웬만해서는 상대를 자기 영역으로 들이는 일이 없었어요.”
“다…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아. 시바.’
하지만 전부 말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성지훈의 눈빛에서 뭔가를 발견한 탓이었다.
“어떤 주인님은 검술이라는 게 없으셨어요. 대부분을 본능에 의지하셔서, 천부적인 감각으로만 검을 휘두르는 분이셨죠. 가장 거친 분이셨는데… 아. 그분과는 반대로 기본기에만 충실하신 분도 계셨고요.”
“으… 응.”
“검으로 꽃을 그리는 분도 계셨고… 회색빛의 용사라고 불리시는 분도… 그분 같은 경우에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밸런스 있고 무거운 검을 추구하시는 분이셨는데….”
“생… 생각보다… 많았네. 그중에서 제일 센 사람은….”
“…….”
“…….”
“많은 분들을 만났지만 역시나 제일 강했던 주인님은 역시나 첫 번째 주인님이셨을까요.”
‘표정 펴. 이 새끼야.’
“그, 그럼 옛날 주인들은… 류한을 이길 수 있었을까.”
“…….”
“…….”
“네?”
“이길 수… 있었을까?”
“네… 네에….”
지금 이 시점의 류한이라면 이기는 게 당연했다. 심지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라파엘조차 녀석을 이기는 데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애초 한쪽 팔이 날아간 창렬이를 상대로 발렸던 류한이 아니었던가. 이쪽을 거쳐 간 검사들은 모두가 벽을 넘은 인간들이다.
‘근데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나 봐.’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실망한 것 같은 느낌. 언제나처럼의 성검용사답게 감정이 그대로 눈에 드러난다.
“그… 그래도 용사님께서 가장… 따뜻한 주인님… 이세요. 첫 번째 주인님은 중간에 저를 내팽개치기도 했고…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어서….”
라는 말로 녀석을 위로해 봤지만….
“나… 훈련할래.”
“용사님?”
“지금 당장.”
“…….”
“빨리 준비해 줘.”
그다지 큰 위로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