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48화
대륙전쟁(28)
희미한 연초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팔레트 영애야?’
“…….”
“…….”
‘진짜 팔레트 영애야?’
이전에 피우던 연초와 같은 냄새가 주변을 감싸 안았다. 어디에선가부터 들려오는 긴 날숨소리가 지속될수록, 주변에 계속해서 연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잠깐이었지만 안개 소환사가 생각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개를 소환한 것도 아닌데 이 정도 규모의 마법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그녀가 4년간 큰 성장을 해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연기는 천관위가 매번 소환했던 안개보다 그 농도가 더 얕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4년 전에 팔레트의 고유 마법을 본 적이 있었던 나는 이 연기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팔레트 영애가 연초로 만들어낸 이 연기들은 제한적이지만 물리력을 갖추고 있다.
담겨 있는 마력 역시 4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그녀가 이 연기들로 죽은 자들과 미끼들의 몸을 꺾어 버렸던 것이 아직도 머릿속에 훤하다.
분명히 온몸이 비틀려서 뒈졌던 것으로 기억, 무지성으로 그녀의 연초 냄새에 반응했던 것도 잠시였다.
연기가 기어코 주변을 가득 메운 이후에는 괜스레 긴장을 하게 된다. 지금 아군 병사들이 범의 아가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이쪽에도 마법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 대규모 마법을 상쇄시킬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는 없다.
만약 팔레트 영애가 공화국으로 귀화한 영애들 중 하나고, 지금 우리들을 쫓고 있는 놈들과 함께하고 있다 가정한다면, 이미….
‘전투고 나발이고 없잖어….’
완전히 함정에 걸려든 셈이었다.
‘시바. 이거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야. 아니면… 그냥 여기서 묻어버리려고 그러는 거야?’
“뭐야… 뭐야! 이 안개는!”
“성자님!”
‘시바 방법이 없자너.’
“일단 계속 전진하겠어요! 발을 멈추지 마세요!”
“네!”
“용사님!”
“어? 어! 나도 갈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적 병력들은 연기에 막혀 이쪽을 놓친 듯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기 속, 성검용사와 알프스는 혹시나 내가 길을 잃을까 양쪽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다른 병사들 역시 서로의 손이나 어깨를 잡고 겨우겨우 연기를 헤쳐나가고 있었다.
일반 병사들의 시선으로는 정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지, 계속해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모두가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안개는 도대체 뭔지,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 길을 밝혀주는 것은 저 멀리서 반짝이고 있는 라이트 마법 하나, 그 빛이 점점 사그라질 때 즈음에….
저 멀리서 몇몇 인형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오기 시작했다.
‘아… 시바.’
연기가 조금 걷힌 것 같은 느낌, 아직도 시야를 확보하기 쉽지 않았지만 공화국의 제복을 입고 있는 이들이라는 건 확실했다.
“진… 진유.”
“부길드마스터.”
‘알프스 넌 좀 멀리 떨어져야겠다. 그리고 자꾸 부길드마스터라고 속삭이면 안 된다니까.’
직후 예상했던 익숙한 얼굴이 다시 한번 드러난다. 아무래도 공화국으로 귀화했다는 영애들이었던 것인지, 한 번 본 적이 있는 영애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심지어 본 적이 없는 이들도 보인다. 하지만 가장 먼저 눈에 밟힌 것은 그들을 이끌고 있는 팔레트 영애, 4년 전과 마찬가지로 긴 머리카락, 커다란 키, 마른 몸이 보인다.
다른 이들과 달랐던 것은 멋들어진 긴 코트를 입고 있었다는 것. 언제나처럼 살짝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 이쪽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나 페넬로티가 저절로 떠오를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하지 않은가. 웬만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그녀였을 터인데 지금은 꽤 동요하는 듯한 모습, 만약 전투가 시작된다면 꽤 유리하게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우리가 독 안에 든 쥐이기는 하자너.’
빛 폭탄으로 연기들을 날려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녀와 부딪치는 것이 딱히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설득을 하는 게 좋을까 싶어 입을 뗐을 때, 팔레트가 먼저 말을 이어왔다.
“…….”
“…….”
“아직 전부 떨쳐내지 못했습니다.”
“네?”
“공화국의 병력 말입니다.”
“그… 말씀은….”
“…….”
“…….”
“브러쉬의 부탁으로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
“팔레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
‘와… 진짜야?’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쪽뿐 만이 아니었던 모양, 곧바로 크게 소리치는 성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당연히 이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법사가 뜬금없이 도우러 왔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들 어떻게 곧바로 믿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마법사가 공화국의 제복을 입고 있는 마법사들이라고 한다면 더욱더 의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장 나조차도 팔레트의 저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믿을 놈들 많지 않자너.’
그녀의 제복에 달려 있는 무수한 훈장들을 보고 있자니 더욱더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능력이 있으니까. 저기까지 치고 올라간 거자너.’
모르긴 몰라도 팔레트 영애는 공화국 내에 어느 정도 입지를 다져놨을 것이다.
뻔한 표현이지만 아마 밝은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 경우가 아닐까.
왕국연합에서 혼인동맹으로 팔려가듯 결혼하게 되는 소녀는 이 자리에 없다.
그녀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공화국에서 자리를 잡았고, 모르긴 몰라도 전쟁이 끝나면 부와 명예를 거머쥘 것이다.
능력을 우선시하는 공화국 사회였으니 아마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나은 대접받을 수 있겠지.
‘근데 브러쉬 한마디에 그 모든 걸 버리고 여기까지 달려온다고 하면 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대답해!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물었잖아!”
“제가 당신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있는 게 그 이유입니다.”
“아….”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빠르다고 생각하는 모양, 팔레트 영애는 괜스레 연초를 길게 태운 이후에 깊게 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이쪽을 둘러싼 연기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깨달은 성지훈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진다.
“그, 그렇지만….”
“…….”
“오랜 친구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시겠지만…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
“…….”
‘팔레트 누나. 날 가져요.’
치이이이익 소리와 함께 연초를 끄는 모습마저도 간지나 보인다. 옆에서 재떨이를 들고 대기하고 있는 부하1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시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 불도 붙여드릴 수 있는데….’
어째서 시바 윗놈들은 저 여장부를 용사로 선택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럼, 대답이 됐습니까?”
성검용사 녀석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문득 이쪽을 바라본다. 당연히 이 타이밍에는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용사님. 저분들을 믿어야 해요.”
“응… 으응….”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을뿐더러… 저는 저분들을 믿어요. 브러쉬 님과 4년 전에 함께 싸우신 분들이니까요.”
“아… 그 비석에 적혀 있었던….”
“네. 팔레트라는 이름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그, 그렇구나.”
말에 따르겠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팔레트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은 믿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그럼 안내하겠습니다.”
“근, 근데… 어디로 향하는 건가요?”
“향후의 행보를 결정하기 이전에, 일단은 이 근처는 완전히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대규모 병력이 근처 전선을 가로지르며 이동하고 있습니다.”
“네?”
“사실 저희가 이곳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도 작전에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병력과 전선을 분리하기로 한 거군요.”
깜짝 놀랐다는 얼굴, 내가 공화국의 내부 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에 잠깐 놀라움을 표현한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계속 간 보고 있던 상황이었잖아.’
진 군사의 당초 계획은 제4전선에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이었지만 1기영과 1지혜가 병력을 분할하고, 전선을 두 동강 내려는 시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조금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선택지가 진 군사에게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1기영과 1지혜가 전선을 완전히 분리시키고자 한다면 그 결정에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물론 아예 출혈이 없지는 않겠지만 계속해서 병력들을 투입해 분리되어 있는 전선을 이어 붙이면 그만, 1기영과 1지혜가 그 과정 속에서 끈질기게 적군 병력을 물어뜯겠지만 투자한 값이 엇비슷하니 서로 손해 보는 교환은 아닌 셈이다.
결과적으로 전면전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은 1군사 쪽이었으니 사실 가면 듀오의 장단에 굳이 발을 맞춰줄 필요가 없다.
물론 녀석이 새롭게 제4-2전선을 만드는 것에 합의한 게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1기영과 1지혜를 떨어뜨려 놓고 싶은 거일 수도 있자너.’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두 지휘관이 함께 있을 때 더 귀찮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 내가 녀석이었어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구태여 본인들이 갈라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이유도 없거니와, 분할된 양 전장에서 모두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확신과 자신감이 있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더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단순히 녀석의 취미 때문인지, 아니면 그럴 듯한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가면 듀오를 전장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그들의 전장으로 향하는 것에 동의한 다른 변수를 하나 정도 더 생각해 본다면….
아마….
‘4-2전선에 류한이 있다는 거?’
보고를 받지 않았을 리 만무, 2군사는 류한을 인간 취급 하지도 않았지만 과연 1군사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애초에 2군사가 정말로 류한을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았을까. 뭔가 둘만의 이야기가 있다고 추측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4-2전선에 있는 류한의 존재가 진 군사의 결정에 힘을 보탰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유라 느껴지지도 않는다.
전술 김현성 같은 병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전술 김현성을 중심으로 무대를 마련해 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괜스레 생각에 빠져 툭툭 허벅지를 두드리고 있었을 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앞으로 일주일 안에 전선이 완전히 분리되고 제4전선과 4-2전선에서 동시에 전투가 일어날 겁니다.”
“…….”
“…….”
“후우… 저희가 운이 나빴던 거였군요.”
“네. 지금 달빛을 따르는 자들은 새롭게 만들어지는 제4-2전선, 그러니까 공화국의 병력들이 집결하고 있는 통로에 위치해 있는 상태입니다. 병력들이 양쪽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을 테니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여기가 4-2전선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시바. 그렇게 아메바마냥 분할하고 합치고를 반복하다가… 왜 하필 여기냐고.’
“주변에는 전부….”
“공화국의 병력들입니다. 물론 공화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4-2전선에서 연합군과 교전을 벌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저희가 우선순위는 아니라는 거네요. 물론… 제 구역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이레귤러들을 그냥 내버려 둘 정도로 멍청한 지휘관은 없을 테지만 말이에요.”
“네.”
팔레트의 말에 망원경을 위로 올려보낸다.
‘하. 시바.’
약이라도 먹은 것인지, 엄청난 속도로 4-2전선으로 몰려들고 있는 병력들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단언하고 이야기하건대 절대로 일반적인 행군 속도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능이라도 사용하지 않는 한은 이런 비정상적인 병력 운용은 불가능하다.
거기에 촘촘하게 짜인 채로 이동하고 있는 공화국의 병사들. 그 모습을 보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창렬이… 시바. 빠져나올 수 있겠지?’
저 병사들의 바다에 한참 표류하고 있을 김창렬이었다.
‘빠… 빠져나올 수 있겠지?’
“…….”
“…….”
‘무조건 빠져나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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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 템플러 젠 일러스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