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433화 (1,43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33화

대륙전쟁(13)

옥사나가 나간 이후에 슬그머니 일어난 녀석이 지껄인 대사였다.

다행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적어도 몇 시간 전에 보여줬던 모습처럼 미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자가 되어버리면서까지 신성을 뿌린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정신이 붕괴되는 것 같은 최악의 상황만 가까스로 면했을 뿐이다.

아직까지도 성검용사 성지훈은 이 장소가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 있었다.

애초에 모든 게 꿈인 줄 알았다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대사를 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까.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다야 나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가 보여주는 형편없는 모습에는 심기가 불편해지기야 한다.

‘아니야. 너무 불편해하지는 말자. 참자 기영아. 참는 거야.’

“…….”

“…….”

‘그래 시바… 아직 미성년자니까…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자너.’

놈의 입장에서는 지금 전쟁을 막니 어쩌니가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전 옥사나와 나의 대화에서는 그 어떤 것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 분명, 그래도 개미 손톱만큼은 깨달아 줬으면 좋겠는데 지금 이 새끼의 표정에는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회피하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성지훈의 얼굴 속에는 두려움, 공포, 죄책감과도 같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중.

현재의 이 새끼는 본인이 했던 일을 책임진다거나, 죗값을 치른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무작정 도망치고 싶고, 이번 일과 멀어지고 싶고,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할아버지나 부르면서 회피하고 싶겠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 자신만만했던 성검용사 성지훈이 아니라.

그냥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 성지훈 군이었다는 거다.

“흐으윽… 빨리 도망가야 된다니까.”

“…….”

“여기에 있으면 큰일 나… 계속 여기에 있으면 안 돼.”

“…….”

“거… 거기… 진짜로 좋은 곳이야. 아마 진유 너도 분명히 좋아할 거야. 호수도 예쁘고… 숲에도 몬스터들이 진짜 안 나오는 곳이거든. 내… 내가 나중에 여자 친구가 생기면 같이 가려고 아껴놨던 장소여서 아무도 몰라. 전쟁이랑도 거리가 멀고… 아, 아무튼 간에 좋은 곳이야. 이런 곳보다는 훨씬 나아.”

“…….”

“내 말 못 들었어? 흐으으윽… 전쟁, 전쟁이라고! 지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거란 말이야. 사람들이 실제로 죽고 다치고 있다고, 서로 죽이고, 막 그러고 있는 중이란 말이야.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게 너무 당연하잖아. 그게 당연한 거잖아. 이런 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너, 너도 죽을지도 몰라.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잖아!”

‘아 이 새끼야. 침 튀어.’

“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죠.”

“그, 그렇지? 그러니까 우리 지금 빨리….”

“그러니까 막아야 해요.”

“어?”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요.”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흐으윽… 그게 아니란 말이야.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고….”

‘질질 짜지 좀 마. 그리고 시바 그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구만.’

점점 더 초조해 보이는 녀석, 결국에는 눈물 콧물을 질질 짜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웅얼거리고 있기는 하지만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다. 그냥 돌아가자 우리 같이 가자 따위의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진유의 입장에서는 의아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그 자신만만했던 성검용사가 이렇게 변해버렸으니… 그 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찰리와 기타 등등의 죽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진유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존재한다. 성지훈이 이렇게 변해버린 이유 말이다.

“여기는 소설 같은 게 아니야… 진짜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이야. 흐윽….”

“네. 이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에요.”

“게임 같은 걸 하고 있는 것도 아니란 말야….”

“네. 게임도 아니고요.”

“정말로 사람들이 죽고 있다고… 흐으으윽….”

성검용사 성지훈이 이곳을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진유는 그제야 녀석이 이곳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닫는다.

“네. 정말로 죽고 있어요.”

“…….”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천 명씩 죽어가고 있다고요. 저보다 더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나가 죽는 아이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단 말이에요. 용사님 말대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요.”

“그래서! 그래서 뭐 어떻게 하고 싶다는 건데! 전쟁을 막는다고?! 진짜로? 진짜 그게 가능할 것 같아! 정말로 네가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꼴랑 여기 있는 사람들로 그게 가능할 것 같냐고! 불가능해. 절대로 불가능하단 말이야. 현실은 만화나 소설이 아니라고…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한 거란 말이야. 전부 다 죽을 거야! 그렇게 되기 전에 도망쳐야 돼.”

“현실이니까. 도망치지 않는 거예요.”

‘아 그렇게 도망치고 싶으면 혼자 도망치든가.’

근데 그렇게는 못 하겠죠? 혼자 도망가려니 그것도 무섭죠?

“용사님에게는 이곳이 어떻게 보이실지 모르겠지만 제게는 이 모든 게 현실이에요. 그래서 도망칠 수 없는 거예요. 불가능하다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꿈같은 이야기라는 것도 당연히 알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도망칠 수 없는 거잖아요. 옥사나 누나한테도, 저기 뒤에서 있는 다른 분들도 그래서 도망치지 않는 거예요. 이 모든 게 현실이기 때문에 도망칠 수 없는 거라고요. 누군들 남아 있고 싶겠어요? 누군들 죽고 싶겠냐고요. 누군들 이런 지옥 같은 곳에 계속 있고 싶겠어요?”

“네…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아!”

“…….”

“…….”

“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자니 뭐니 불러주니까. 정말로 네가 성자라도 되는 줄 알아!? 아니 만약에 네가 신들에게 선택된 성자라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도대체 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왜! 네가 같잖은 책임감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거냐고!”

“제가 성자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어요!”

“…….”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단 말이에요! 저도 제가 성자인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크게 와닿지도 않아요! 저라고! 저라고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고요!”

철없는 녀석을 똑바로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진유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녀석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만무했다.

사실 이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진유는 선택받은 용사도, 무언가 특별한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다.

일단은, 어쩌다가 전쟁에 참가하게 된 소년병에 불과하다. 물론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지는 나 자신조차도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 평범한 소년병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당연히 성자인지 뭔지 개뿔도 모르는 상황, 오히려 이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두렵게 다가오기는 진유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어쩌면 정말로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이쪽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힘을 가지고 있는 성지훈과는 다르게 진유는 아예 가진 게 없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이쪽을 빤히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자신과 내 차이점을 가늠하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녀석이 천천히 시선을 피하는 것이 보인다.

아마 똑바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야 지금의 진유는 녀석이 장난 삼아 되고 싶어 했던, 녀석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던 용사처럼 보였을 테니까.

“무섭고 두렵지만… 그냥 도망쳐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에요. 지금 용사님이 어째서 제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용사님과 저는 달라요.”

“…….”

“저는 이곳의 일원이에요.”

“…….”

“용사님처럼, 외부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

“제게 이곳은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곳이 아니에요. 이곳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이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장소예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그냥 도망친다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요. 저는 계속 이 대륙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란 말이에요. 전쟁이 닿지 않는 장소라고 했죠. 그럼 그다음은요. 만약 용사님께서 말씀하신 그곳에까지 전쟁의 영향이 미치면 그다음에는 어디로 도망가시려고요?”

“그… 그건 그때 가서….”

“그때 가서 생각하면 늦어요. 그다음은 모두가 죽고 난 이후가 될 거란 말이에요. 물론 무모하겠죠. 저도… 저도 용사님께서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기 전까지는…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옥사나 누나가 저를 믿어주기 전까지는 정말로 황당한 일이라고만 느꼈으니까요. 하지만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무모한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단 말이에요. 제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단 말이에요.”

“…….”

“용사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신님께서 용사님을 이곳으로 이끌어 주셨다고… 저는 용사님을 믿어요. 그리고 용사님이 한 말씀도 믿어요. 저는 열렬한 신자는 아니지만, 또 제가 정말로 성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신님께서 제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뭔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지만….”

“…….”

“적어도 도망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만약 용사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떠나세요.”

“어?”

“그 누구도 용사님을 원망하지도 비난하지 않을 거예요.”

“어….”

‘완고하게 말해 줘야 돼.’

협상의 여지는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곧바로 발걸음을 돌리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아예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텐트를 거칠게 나가려는 액션을 취한다.

혹시라도 이쪽을 그냥 내보내고 도망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미….

‘낚여 버렸자너.’

이 새끼는 이곳에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더 두려울 것이다.

“가지 마! 혼자 가지 마! 흐으으으윽. 끄으윽… 혼자 가지 말라고!”

‘아 진짜 쳐내고 싶다. 시바 김현성은 양반이다. 진짜. 현성이가 시바 현성이가 그립다.’

“그렇게 혼자 가지 말란 말이야. 날 두고 가지 말라고. 알았어. 안 가면 되잖아. 도망 안 치면 되는 거잖아. 흐으윽… 흐어어어엉….”

‘아. 이거 놔! 이 새끼야! 눈물 콧물 묻히지 말고.’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혼자 가지 마. 흐으어엉….”

‘알았으니까 시바 그만 좀 달라붙어.’

이제야 이 외딴곳에 나 홀로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니 조금이라도 연이 있는 이쪽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미 논리나 신파 같은 것이 먹히지 않는 상태로 완전히 돌입해 버린 모습, 사실 이 상태라면 이 새끼를 쓸 수도 없다. 전투가 일어나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칠 테고, 매일 매일 우는 걸 달래느라 오히려 내 심력이 먼저 소모될 것이 뻔하다.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좀 놓으세요. 그리고 그만 좀 우세요. 용사님이라면서요! 갑자기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설명하기 어려워. 어렵다고! 그리고 나 이제 용사 같은 거 안 할 거야. 안 할 거라고 흐으윽… 그냥 평범하게 살 거라고… 그냥 집에 돌아가고 싶단 말이야. 나 이제 용사 아니야. 안 할 거야.”

“적어도….”

“…….”

“적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울지 마세요. 용사님.”

“…….”

“그럼 옆에 있어 드릴게요.”

“정… 정, 정말?”

‘시바 진짜 이 새끼 어떻게 쓰냐. 한 대 후려치고 싶네. 진짜.’

“네. 정말로요.”

“으응….”

차라리 그 자신만만했던 버전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다. 있는 허세 없는 허세는 다 부리고 실컷 잘난 척했던 주제에 자존심은 쥐꼬리만큼도 없는지 갑작스레 약자의 포지션을 잡고 있다.

그렇게 큰소리를 치던 녀석이 한없이 작아진 것이다.

정말로 이 새끼의 필터를 벗기는 것이 정답이었던 걸까. 시바 혹시나 정사가 꼬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단 용사님은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셔서….”

“그, 그렇게 좋지는 않아. 응… 컨디션도 안 좋고….”

‘그냥 본래 상태로 쓰다가 팽했어야 했던 건가. 알타누스고 나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녀석을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이 새끼를 고치는 것도 고치는 것이었지만 녀석과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의 행방 역시 오리무중이었으니 말이다.

“근데 용사님.”

“어? 어….”

“성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가요?”

“…….”

“…….”

내 목소리에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내… 내 몸속에 있어.”

“네?”

“그러니까. 성검은 내 몸속에 있다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