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28화
대륙전쟁(8)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뭘 어떻게 하기는 뭘 어떻게 해 이 새끼야. 너 좀 쓸 만하게 만들어야지.’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필터를 해체시킨 이후에 현실의 쓴맛을 보여주고 싶다.
문제는 놈이 받을 정신적 대미지가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
김현성 정도만 됐어도 일단 필터를 해체하고 무지성 강화 버튼을 눌렀을 텐데… 아무래도 이 새끼는 아직 미성년자이다 보니 그런 식으로 강화기를 돌리기가 꺼려진다.
최악의 경우에는 아예 재기불능 상태가 될 수도 있는 만큼 조금은 길게 볼 수밖에 없다는 거다.
모르긴 몰라도 미치고 팔짝 뛸 만한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베스트는 녀석의 필터를 벗기지 않고 놈의 성장을 끌어 올리는 것이겠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시바 그게 가능했으면 윗놈들이 이 새끼를 여기로 보내지도 않았겠지.’
여러 가지 방법들을 떠올려 봤지만 전부 다 난이도가 만만치 않게 느껴지는 상황, 아니, 사실 내가 필터를 벗기는 게 제대로 된 선택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1회차에서 녀석은 분명히 미쳐 뒈졌다고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1기영이 이걸로 이 새끼를 정신공격 한 게 아니었던 건가 봐.’
정황상 1기영이 진실을 밝혀 놈이 무너져 내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사건은 후반부에나 일어나는 사건이다.
지금 이 상태의 성검용사가 완전히 성장해 외신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지금 내 눈에 녀석은 그저 재능을 가지고 있는 꼬맹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성지훈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이에 녀석이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재촉해 오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정답을 말하라고 하셔도… 저는 잘 모르는걸요.”
“아니야. 분명 네가 정답을 알고 있을 거라니까. 틀려도 괜찮아. 생각나는 건 뭐라도 좋으니까 일단 말부터 해보라니까. 이게 전부 신님들의 뜻이라고.”
‘그냥 막무가내 그 자체자너.’
하지만 여기에서는 용기를 내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일단은 행군을 계속해야겠죠…?”
“아니야. 그런 걸 물어보는 게 아니야.”
“그럼….”
“날 믿는다고 했잖아.”
“네.”
“몇 번을 말해야 되는 거야. 나는 용사라니까? 네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봐. 어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
“…….”
“…….”
“저는….”
“…….”
“…….”
“저는 전쟁을 막고 싶어요. 이 전쟁을 끝내고 싶어요.”
가장 재미없고 뻔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화국의 진유가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답안이었다.
눈빛에 감정을 담은 것은 당연지사.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감정연기에 조금 더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충해도 녀석은 속아 넘어가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새끼를 속이는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녀석이 나를, 이곳에 있는 이들을 진짜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했다.
죽음에 두려움과 생존을 향한 갈망, 나아가 이 무자비하고 파괴만을 불러오는 행위에 대한 혐오를 내비친다.
녀석이 빤히 내 눈을 바라보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뭔가 할 말을 잃은 듯한 모습. 아주 약간이지만 위화감을 느낀 것 같기도 했다.
‘타인이랑 제대로 교류하는 게 처음인가? 근데… 그럴 수가 있나?’
불가능하지는 않다. 녀석은 지금까지 윗놈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위에서 내린 퀘스트를 해결하기에 급급하면서 성장해왔을 테니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겠지.
“그… 그렇구나. 그… 그럼 전쟁을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건 저도 몰라요. 어떻게 해야 서로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멈추게 할 수 있을지….”
‘대사 진짜 에반 것 같기는 한데 얘는 이런 거 좋아하자너.’
“솔직히 불가능한 일….”
“…….”
“…….”
“아니.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없어.”
‘진짜 감성 죽이자너. 여기서 1을 하면 저쪽에서 10으로 돌려주자너. 명대사의 향연이자너.’
“…….”
“…….”
“날 믿어. 나는 불가능도 가능하게 하는 남자니까.”
‘시바 2절까지 해버리자너.’
당연히 결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땅바닥에 지도를 그린다. 방금 그린 전선과는 전혀 다른 전선이었다.
“여기가 마지노선이에요.”
“뭐?”
“공화국의 전선이 여기까지 밀리게 된다면, 공화국 입장상 분명히 휴전을 제의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
“한계에 다다른 것은 제국뿐만이 아니에요. 이 4년간의 전쟁으로 양국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어요. 장담하건대 공화국의 상층부에서도 휴전을 위한 명분을 찾고 있을 거예요. 제국도 마찬가지겠죠. 만약 전선이 이곳까지 밀린다면 분명 휴전을 위한 명분이 되어줄 거예요.”
“뭔, 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먼저 휴전을 제의하면 되는 거잖아. 굳이 명분이라는 게 필요한 거야?”
‘시바 이 새끼 바보 아니야?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데 휴전하자고 먼저 말하겠어? 그리고 이대로 시바 전쟁이 끝나면 제국이랑 왕국연합 입장에서는 영토 뺏기고 그만하자는 꼴인데 걔네가 휴전 협정에 동의할 것 같아? 이건 시바 양국이 만족할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라고. 시바.’
“아! 공화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어서 그런 거구나!”
“네. 하지만 이건 거짓말 같은 승리예요.”
“…….”
“주변을 둘러보세요. 용사님.”
“…….”
“병력들은 이미 한계를 맞았어요. 공화국 내부에서도 더 이상 전쟁에 집중하기 힘든 상황이에요. 공화국은 포로를 관리할 여력도 없어요. 사실 진즉에 이 전쟁은 교착 상태를 맞이했어야 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어. 어. 어째서야?”
“진 군사님께서 전투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열악한 환경에서도 계속해서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는 거예요. 아니, 처음부터 군사님께서는 멈출 생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진 군사님께서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계세요. 솔직히 말하면 제 생각도… 그렇고요. 하지만….”
“응.”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왕국연합과 제국을 몰아낼 수 없을 거예요. 3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몰라요.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게 분명하겠죠. 대륙은 병들고, 점점 무너져 내릴 거예요.”
“…….”
“…….”
“그러니까 네 말은….”
“네.”
“진청 군사를 막아야 한다는 거야?”
‘이 새끼 뭘 들은 거야. 시바. 일단 마지노선부터 맞추는 게 먼저라고 시바. 양국이 합의할 수 있는 시바. 아니, 시바 설명하기도 귀찮다.’
“네.”
“쉽지 않겠는걸. 그자는 강하거든. 듣기로는 똑똑하기도 엄청 똑똑하다고 들었고… 솔직히 지금의 나로서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대야. 진청도 진청이지만 그자 주변에 있는 수하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전쟁 같은 건 없어져야지. 응.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게 좋아. 성검이랑 신님들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것 같고 말이야… 응. 응. 인간들끼리 싸워서는 안 되지.”
“…….”
“좋아. 그럼… 그렇게 하자. 세부적인 그림은 조금 더 그려봐야겠지만 우리 파티의 목표는 일단 정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일단 한 걸음 다가선 셈이네. 레, 레이디 알프스, 그리고 형도 동의하시는 거죠?”
겨우 이걸로 끝이냐고. 시바 전쟁의 참혹함은 눈에 안 들어오냐고. 그냥 저 리액션이 끝이야? 시바.
너무 건조한 반응에 감정을 실은 이쪽이 더 당황스러워졌을 정도였다. 알프스와 김창렬 역시 이 새끼는 도대체 뭘까 하는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다.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중이지 않은가.
라노벨 이야기를 끊어야겠다고 다짐한 것은 당연지사. 아무래도 우리 성검용사가 내 생각보다 더 현실과 동떨어져 살고 있다는 판단이 선다.
‘시바 이대로는 안 돼.’
이 새끼는 일단….
사람들이랑 섞여야 돼.
“그럼 지금부터….”
“일단 사람들을 도와요.”
“아. 응… 그래야겠지?”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에 타이밍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일단 열심히 사람들을 돕는 척하는 것이 옳다.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여기저기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괜스레 허겁지겁 움직이는 모션을 보여주고, 부상자들에게 다가가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한다. 물론 별건 없다. 박혀 있는 화살을 빼준다든지, 보급품으로 나온 싸구려 포션들을 뿌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레이디 알프스와 이름 없는 창렬이도 이쪽과 비슷한 모션을 보여주고 있다. 나중에 합류한 것치고는 꽤 급박해 보이는 모습이 꽤 만족스럽다.
“괜찮으세요?”
같은 소리 한번 해주고.
“이쪽으로 와주세요! 지훈 님!”
괜스레 성지훈도 한 번씩 부른다.
“어…? 어!”
어리버리한 녀석은 뭘 해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점점 더 적극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중, 힘이 좋은 녀석이었으니 하는 일도 정해져 있다. 무거운 바위나 나무, 마차에 깔린 사람들을 구출하는 것이 놈의 역할이다.
“하나! 둘!”
“…….”
“셋! 들어 올려!”
“으아아아아아! 왜 이렇게 무거….”
“어? 뭐야 왜 이렇게 쉽게 들려?”
장정 다섯이서도 들기 힘들었던 마차를 번쩍 들어 올리는 녀석, 시선이 집중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뭐… 뭐 저렇게 힘이 좋아?”
‘그래야지.’
“어이! 꼬마야! 여기도 좀 도와줘!”
“저쪽에서 도움이 필요하신 것 같아요. 빨리 다녀오세요. 용사님.”
“어? 어? 아니. 혼자는 좀 그런데… 같이 가자.”
“네.”
‘이 새끼 시바. 내가 꼭 같이 가줘야 돼? 아주 시바 화장실도 같이 가자고 그러겠다.’
“뭐야. 이걸 한 번에 들어? 아주 힘이 장사네. 장사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흐윽… 감사해요.”
“아… 네.”
“이쪽도 부탁드려요!”
“네.”
“빨리 가요. 용사님.”
“응.”
“용사님. 혹시 포션 남은 거 있으세요?”
“어… 있어.”
보급품으로 나온 싸구려보다는 좋은 포션, 놈이 뚜껑을 열고 이리저리 뿌리기 시작하자. 화상을 입은 부상자의 피부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이곳저곳 쓸데가 많은 녀석이다 보니 인싸가 되는 것은 순식간, 일이 고되다면 고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놈의 얼굴이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은 뭐가 뭔지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에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놈이 거리를 벌려도 도움을 받은 이들이 알아서 이쪽의 주변으로 모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몰래 챙긴 부식을 나눠주는가 하면….
“이거 드세요. 사례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그래도 감사의 표시예요.”
“아… 네.”
고맙다고 녀석을 껴안는 놈들도 보인다.
“고맙다! 고마워. 넌 구세주야!”
심지어 식사를 같이 하자는 녀석들도 눈에 띈다. 솔직히 밥을 처먹을 상황도 아니었지만 정리가 마무리되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판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휘관들이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이 유효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할 보급품들을 은근슬쩍 꺼내고 삼삼오오 자리를 잡는 녀석들, 전투가 방금 끝난지라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고 제대로 모습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미소를 띠고 있는 놈들도 많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쉬고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약물과 마법에 의해 피폐해진 좀비들은 그럴 여유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차피 놈들은 성검용사에게 도움이 안 되는 녀석들이었으니 논외. 지금 필요한 것은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 놈들이었다.
“너 이름이 뭐니? 난 옥사나라고 하는데.”
“난 그냥 찰리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 다들 통성명도 안 했네. 제기랄 이렇게 쉴 시간이 있었어야지.”
“거기 힘센 꼬마. 아까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고맙다. 네가 우리를 살렸어.”
“난 데벨이라고 불러라. 성은 없지.”
이 새끼는 멀뚱멀뚱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
“…….”
왠지 모르게 기뻐 보이기도 했다.
‘응.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이야. 많이 정들여놔.’
“…….”
‘응. 내가 볼 때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10퍼센트도 안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