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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08화 (1,406/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8화

피의 무도회(18)

페인트 영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음해는 그만둬 주세요. 핑크레인 공작님.”

“절대로 페넬로티 영애를 음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아주 작은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로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 제니스 후작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지, 아니면 그전부터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인지, 페넬로티 영애의 증언만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와 진짜 이 시바 쓰레기 새끼.’

“네? 지금 그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시발!”

파스텔 영애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는 대사였을 것이다.

“페넬로티가 도망치라고 이야기하는 거 못 들었어!?”

하지만 비열한 돼지는 파스텔 영애의 말을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간다.

“물론 확실한 물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녀가 왕국연합을 배신할 동기는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그녀의 불운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더욱더 말입니다. 페넬로티 자작가에 갇혀 살았던 저주받은 3녀가 왕국연합을 증오하지 않은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녀가 진청의 끄나풀이 아닐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지는 않다는 겁니다.”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야!”

“최소한 그녀를 조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있었던 돼지 새끼가! 구해줬더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파스텔 넌 진짜 빠꾸가 없구나.’

아무리 상황이 막장이라고 해도 대놓고 공작한테 쌍욕을 박자너.

‘얘 진짜 물건이자너.’

물론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이쪽을 물고 늘어지는 핑크레인 공작 새끼 역시 물건이기는 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염치가 없어서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보통 아닌가.’

구태여 이쪽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너무나도 눈에 보여 당황스러울 정도, 정말로 페넬로티를 의심하기 있다기보다는 이 집단에서의 영향력을 키우고 싶어 하는 개수작처럼 느껴진다.

이대로 일이 마무리되면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까지 치달을 테니,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을 어떻게든 물어뜯어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흠집 내기를 하고 있다는 거다. 사실 이쪽을 노린 거라기보다는 페인트 영애를 노렸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페인트 영애의 입장에서는 무조건적으로 나를 보호해 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페인트 영애가 곧바로 말을 이어왔다.

“페넬로티 영애는 저희와 함께 살롱에서부터 무도회장을 지키고 생존자들을 구한 동료예요. 핑크레인 공작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인지, 어떤 부분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잘 알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도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걸 들으니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요.”

“…….”

“…….”

“아아…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핑크레인 공작.

“…….”

“…….”

‘와… 영애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새끼는 진짜 죽이고 가야겠다. 알타누스 님. 시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한 놈 더 곁으로 갈 겁니다.’

슬쩍 근위대장을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을 바라보자 저도 모르게 화가 밀려온다.

대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페넬로티 영애와 함께 위험을 뚫고 왔다는 것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겠느냐는 조소. 공화국의 편에 선 페넬로티 영애의 도움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말 그대로 영애들의 헌신과 희생, 노력을 모두 무시한 처사였다.

공화국과 내통한 이가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는 뜻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너희들도 공화국과 내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개념이 없는 개자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냥 시바.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새끼자너.’

본인은 도망치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단순히 혼인동맹에 부품이라 생각했던 영애들이 힘을 하나로 뭉쳤으니 괜스레 아니꼬워 저 지랄을 떨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쯤 되면 저게 단순한 열등감의 발현인지, 지금의 상황에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함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이성적이었던 페인트 영애 또한 이성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처럼 보인다. 아니, 이미 끊어진 것이 확실하다.

“뭐라고?! 당신 지금!”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페인트 영애.”

“말로 하지 않았을 뿐이잖아요! 지금 당신의 행동은 목숨을 걸고 이곳에 함께 올라온 모든 사람들을 무시하는 처사예요! 뭐가 문제인가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페넬로티 영애. 이리로 오세요. 저런 사람과는 말도 섞을 필요도 없어요.”

“분란을 일으키시는 겁니까?”

“쓸데없는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당신입니다! 핑크레인 공작!”

“그저 가능성을 이야기한 것뿐 아닙니까. 조심해서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렇게도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실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건만… 쯧… 이래서 무슨 일을….”

‘이 새끼 진짜 막 나가네.’

짜악!

당연하지만 여기서 성장한 아이나 페넬로티가 나서줄 수밖에 없다. 서사 구조상 그게 정답이다.

지난번에 녀석과 마찰이 있었을 때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던 페넬로티. 그저 울음을 참기 급급했던 페넬로티가 어느새 달라진 모습으로 이곳에 있다.

당연히 분노한 듯한 얼굴, 그건 자신을 모욕하는 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함께 싸운 영애들과 페인트 영애를 무시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제 친구들을 모욕하지 마세요.”

‘그긍더 감성.’

“…….”

“…….”

‘지금 같은 상황에 시바 공작이 대수냐구.’

이 안은 이미 아포칼립스인데 시바. 계급이 밥 먹여주냐구.

“지금 무슨!”

“그녀도, 저도 왕국연합을 지탱하는 귀족 가문의 일원이에요. 저는 부끄러운 짓을 한 기억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

“당신처럼, 숨어서 도망칠 생각도 없어요. 저는 제 의무를 다하고 있어요. 당신이 하지 않는, 왕국연합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요.”

아픈 곳 찌르기.

“저는 작은 자작가의 저주받은 3녀지만, 당신이 했던 말처럼, 제 처지를 비관하고 저주했을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계속해서 싸우고 있다고요. 목숨을 걸고, 왕국연합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고 있단 말이에요. 저는… 저는 당신 같은 비겁한 겁쟁이에게 무시당할 사람이 아니에요.”

용기를 낸 페넬로티.

“저는 절대로… 당신 같은 사람한테 모욕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시바 소중해.’

한층 더 당당해지고 단단해진 페넬로티. 드디어 자신을 사랑하게 될 줄 알게 된 페넬로티.

본래 이런 종류의 서사에서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소재지만 많은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음으로써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클리셰였다.

“페넬로티….”, “페넬로티 영애….” 같은 소리들이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페넬로티를 가장 잘 알고 있는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었다. 처음 보는 것 같은 페넬로티 영애의 모습에 감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빛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들에게 지금까지의 아이나 페넬로티는, 자신감 없었고, 소심하고, 왠지 모르게 보듬어 줘야 하는 존재처럼,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비추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을 겪고, 많은 일들을 겪으며 아이나 페넬로티는 달라졌다.

이제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고, 이제는 스스로의 두 다리로, 자신이 소중한 이라는 것을 드디어 깨닫게 됐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외적인 모습이나, 재능 때문이 아니라, 내면으로서 빛나고 있다.

이곳에 막 난입하려고 했던 마리나 페넬로티와 카리나 페넬로티도 어렴풋한 미소를 띠는 중, 성장한 동생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단역 엑스트라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행동이었다.

‘가장 빛나고 있는 시기자너.’

“…….”

“…….”

‘아이나 페넬로티는 빛나고 있자너.’

당연히 데스 플래그다.

슬슬 아이나 페넬로티의 퇴장을 염두에 둬야 하는 만큼 이런 빌드업이 중요하다.

본래 가장 환하게 빛날 때 지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 아니겠는가.

물론 누구에게나 그녀의 모습이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빌런이 바로 눈앞에 있다. 얼굴이 썩은 딸기마냥 붉어진 모습, 대놓고 면전에서 겁쟁이니, 귀족의 명예를 모르니 같은 어감의 대사를 정통으로 맞았으니 이성을 잃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뭐라고!”

찌질이들 특, 강한 자에게는 약함.

테러리스트에게는 도망치기 바빴던 녀석이 별안간 여포로 빙의하는 것은 순식간,

“감히!”

악당들에게는 검 한 번 뻗어보지도 못한 녀석이 과감하게 손을 들어 올린다. 물론 그 손이 아이나 페넬로티를 향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턱. 하고 잡힌 손, 핑크레인 공작의 손을 잡은 것은 드디어 타이밍을 잡은 김현성이었다.

겁쟁이들 특, 강한자에게는 약함.

놈의 얼굴이 비굴해지는 것은 비굴해지는 것은 순식간, 방금 전까지는 분명 여포의 기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무슨 밟혀 죽기 직전의 갯지렁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적당히 하십시오. 핑크레인 공작.”

“…….”

“…….”

‘시바 대답도 제대로 못 하자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만도 하다. 김현성이 내뿜고 있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 김… 김현… 백….”

“…….”

“나… 나는 그… 그저….”

놈과는 질이 다른 리얼 맨의 기세. 놈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납작 엎드리는 것뿐이다.

“지금 당신이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셨으면 합니다. 이 영애들은 이 왕성의 영웅이고, 당신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해 그녀들이 아니었다면 당신, 아니, 우리들 모두 이 자리에서 명을 달리했을 겁니다. 괜한 추측으로 쓸데없는 의심을 하기 전에 그녀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

‘이 새끼 진짜 전형적으로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하자너.’

물론 김현성이 기세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숙련된 모험가들 중에서도 저걸 버티지 못해 무너지는 녀석들이 태반일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돼지는 너무나 전형적으로 찌질한 인간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에게 사과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공작.”

‘아이나 페넬로티 가라사대 시바, 바른 인성은 바른 얼굴에서 나온다.’

“…….”

다른 선택지가 존재할 리가 없다. 자신의 자존심이 어찌 됐든, 이후에 계획이 어떻게 되든 간에 녀석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현 상황을 벗어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결국에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내… 내가… 사과하겠소. 그, 그리고… 영애들의 용기와 결단에 대해서도… 감사를….”

“받아들이겠어요.”

김현성이 손을 놓자 곧바로 허물어지는 돼지.

“허억… 허억… 허어억… 허억….”

‘아 시바 숨소리마저 더럽자너.’

동시에 영애들의 얼굴에도 만족스러움이 감돈다.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은…

‘페인트야….’

페인트 영애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붉어 보였다는 것. 왠지 모르게 김현성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심지어 나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모양새, 왠지 모르게 얼굴에는 죄책감 비스무리한 것이 깃들고 있는 것은 기분 탓일까.

‘너 왜 그래. 시바.’

“도… 도움에… 감사드려요. 김…김현성 백작님.”

‘왜 너답지 않게 말을 더듬어.’

“별것 아닙니다. 페인트 영애.”

‘왜 갑자기 핑크빛 기류야?’

“아! 감사해요. 김현성 백작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페넬로티 영애. 그리고… 핑크레인 공작이 방금 전에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모양입니다.”

‘아니야. 방금 그 야비한 새끼. 누구보다 이성적이었어.’

“네. 위로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백작님.”

“그리고… 멋진 모습이었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그렇게 칭찬 안 해줘도 되는데. 나 참….’

김현성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이쪽 역시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간 것은 당연지사.

페인트 영애의 얼굴이 이상하게 어두워지는 것처럼 보여, 전장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야 할지 고민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보다 제니스 후작의 이야기가 먼저였다.

* * *

“아직까지 아이나 페넬로티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군사님.”

“제길….”

“죄송합니다.”

“…….”

“…….”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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