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407화
피의 무도회(17)
-진 군사님 혹시 팔자라는 거 믿어요?
-입 다물어라. 이기영.
-아니… 괜히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좀… 그래서….
-분명히 입 다물라고 이야기했다.
‘지가 봐도 당황스럽기는 할 거야.’
-괜찮겠어요…?
-어차피 저놈과 나는 동일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했을 텐데, 녀석이 무슨 짓을 하든, 어떤 오해를 사든,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좀 억울하잖아.
-걱정해 줘서 퍽이나 고맙군. 아주 고맙다. 이기영. 너무 고마워서 뭐가 됐든 간에 보답하고 싶은 심정이군.
‘이 새끼… 좀… 마음 상한 것 같은데….’
진 군사 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는 마음이 쓰이는 게 확실해 보였다. 당연히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고 있었고, 실제로도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분명히 신경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의식은 절대로 자신과 제니스 후작을 분리하겠다 외치고 있었지만 무의식은 그렇지 않은 상태, 괜스레 날이 선 것처럼 들려오는 목소리가 바로 그 증거였다.
어쩌면 지금까지 쌓인 섭섭함이 일순간 몰려오고 있는 상태로 진입한 것일지도 모른다.
‘서러울 만해….’
모르긴 몰라도 꽤 서러운 울 것이다. 지혜 누나의 제안을 받고 자신만만하게 1회 차로 들어온 것이 불과 몇 주 전이다.
당연히 전쟁 통 한가운데에 떨어질 거라 예상했던 녀석, 파티의 주도권 가지고 기 싸움 아닌 기 싸움까지 했을 정도로 놈은 이번 임무에 진심이었다.
그런데 웬걸, 갑작스럽게 데뷔탕트 무도회가 시작이 됐단다. 녀석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닌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갑작스레 제니스 후작과 아이나 페넬로티가 엮이게 됐단다.
그 고고하신 진 군사님의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상황이었다는 거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놈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것, 뒷무대 운운하며 후방지원 아닌 후방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놈이 어디 그런 것에 만족할 위인이던가.
이 주인공 병에 걸린 나르시시스트는 필연적으로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물론 본인은 부정하겠지만,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성향을 생각해 보면 놈은 파티에서 주인공을 해 먹어야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
왜 꼭 술자리나 파티에 가면 이런 새끼들이 있지 않은가.
꼭 가장 늦게 등장하는 새끼들, 자리가 무르익을 때 즈음에야 나타나 온갖 똥폼은 다 잡는 새끼들, 자기한테 신경 안 써주면 은근히 냉랭해지고, 망가지기는 싫은데 주인공 롤을 고집하는 새끼들.
그런 녀석이 뒷방 노인네마냥 메인 임무에서 밀려난 채로 구경만 하고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어린애잖어. 가끔 유아마냥 유치하게 행동한다니까.’
사실상 언데드 소환의 범인으로 몰린 것은 막타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서러웠던 타이밍에 완전히 쐐기를 박은 셈. 모르긴 몰라도 이번 이후로 절대로 1회 차에 발도 들이지 않겠다 다짐하고 있지 않을까.
‘목소리만 들어도 알겠자너.’
-네놈이 할 일이나 똑바로 하도록. 이기영.
-진 군사… 화났어?
-웃기지도 않은 장난질은 그만둬라.
-내가 좀 무심했나 봐….
-차라리 무심한 게 나으니, 네 할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이야기했다. 빌어먹을 육망성이 원하는 게 뭔지, 이번 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어야 하는지, 네놈이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괜히 마지막에 와서 망치지 말라는 소리다. 지금은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은 심정뿐이니.
-그렇지 않아도 거의 다 왔어요.
중요한 이벤트들도 전부 확인을 했고, 올바른 루트를 밟고 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사실 진 군사가 범인으로 지목된 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어찌 됐건 간에 이번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대륙전쟁으로 가는 루트로 가는 것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공화국의 존재를 완전히 배제하고 있었던 근위대장과 김현성의 얼굴도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아니, 이제야 수긍이 간다는 느낌이다. 어떻게 봐도 단순한 폭도들이 저지를 수 있는 테러가 아니다. 잘 갖추어진 어떤 집단이 많은 시간 공을 들여서 준비한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비밀리에 이 데뷔탕트 무도회에 잠입한 것부터 시작해서, 소모품들을 풀어놓은 것까지, 왕성은 완전히 암전 상태로 만든 뒤에, 이 왕성에 언데드들을 풀어놓은 것도, 여단에 머리가 장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국가 단위의 개입이 있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자너.’
머릿속에 있는 퍼즐들이 풀리는 시점이었을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킨 근위대장이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화국의 진청… 본디 명예를 중시하는 자라 들었건만… 김현성 백작님께서는 놈을 알고 계십니까?”
“후우… 흐읍… 네. 당연히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현 공화국을 이끄는 오호대장군의 실질적인 머리로써 공화국의 크고 작은 일에 모두 관여한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그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 한 가지는 확실할 겁니다.”
“그건….”
“그자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면… 이번 일이 겨우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공화국의 군사가 직접 움직였다니… 하… 아직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이제야 실감이 나는군요. 페인트 영애. 절대로 영애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하시는 게 당연해요. 저 역시 믿기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출처는 어디인지…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추측인 것인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페인트 영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나를 바라보며 말이다.
“페넬로티 영애예요.”
“…….”
“그가 페넬로티 영애에게 공화국으로 함께할 것을 종용했어요. 지난밤의 무도회장에서 말이에요.”
“네?”
“페넬로티 영애?”
당연히 입을 열 수밖에 없는 타이밍.
“사실이에요. 그자는 자신을 제니스 후작이 아니라 공화국의 진청이라 자신을 소개했어요.”
“페넬로티 영애가 모두에게 피하라고 외친 게 그런 연유 때문이었군요.”
“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또 언제 일어날 것인지,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무도회장을 떠나 살롱에 대기하라 전달을 받아서… 만약… 제가 조금 더 의연하게 대처했었다면….”
“페넬로티 영애의 탓이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김현성의 위로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한번 페인트 영애가 말을 이어온다.
“물론 그가 정말로 공화국의 군사라는 물증은 없어요. 아군에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거짓 정보를 흘렸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가 정말로 공화국의 군사라는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들의 목적이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예요. 아마… 왕국연합과 제국의 동맹을 위해 참여한 주요 인사들의 암살이었겠죠.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두 집단의 만남이 유쾌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
“…….”
“알고 계셨군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냥… 그들의 목적이 데뷔탕트 무도회 그 자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죠. 고작 혼인동맹을 위해 찾아온 영애나 영식들이 그들의 목표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설명이 되지 않더라고요. 제국에서도 김현성 백작님같이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여하신 분들 외에도 많은 분들이 찾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진짜 목표는 저희가 아니라 이곳, 4층과 5층에 있는 인사들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보고 나니 제 생각에 조금 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합리적인 추론이다. 물론 페인트 영애가 직접 밝힌 것처럼 확실한 물증이 없는 빈껍데기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물증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할 수는 없다.
당연하지만 단순 망상에 빠진 영애의 헛소리로도 치부할 수 없다. 이전까지였다면 몰라도, 지금의 페인트 영애의 말에는 무게감이 실린다.
살롱의 영애들을 규합해 4층까지 길을 뚫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전장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으니 누가 그녀를 단순한 귀족 영애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입증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근위대장 역시 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페넬로티 영애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걸까요.”
“글쎄요.”
‘왜긴 왜야. 사랑이지. 시바.’
“그야 페넬로티 영애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페넬로티 영애는 천재예요. 그녀의 친구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 공화국의 군사가 탐을 낼 만큼 말이에요.”
‘기름칠 고마워.’
“제니스 후작이 매일매일 흑장미 살롱을 드나들었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잖아요. 매일매일 질리지도 않고 찾아와 그녀와 함께 여러 가지 게임을 하는 모습들을 많이 봐왔어요. 단순한 체스부터, 이름도 알지 못하는 복잡한 게임까지, 그 게임이 전쟁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페넬로티 영애를 재단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가 인재 욕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론.”
“…….”
“그가 페넬로티 영애에게 품고 있던 연심 역시 분명 영향이 있었겠죠.”
“…….”
“…….”
‘괜히 죄인 된 기분이자너.’
“이런 괴물 같은 자식도,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나 보군.”
멋진 대사를 내뱉은 근위대장이 괜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아직도 간헐적으로 튀어나온 언데드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 여기저기에서는 부상자들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고, 피와 혈육으로 얼룩져 있었다.
과장해서 말해 생지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한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하고도 잔혹한 장면이다.
근위대장의 대사도 이해가 된다. 그야 이런 풍경을 만든 장본인이 어떻게 같은 사람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생각할 수 있겠는가.
‘시발 악귀자너. 보통 악귀가 아니자너. 언데드까지 풀어버린 건 진짜 선 많이 넘은 거자너.’
“사람의 마음은 자신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또… 페넬로티 영애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겠죠. 그래서 살롱에 있기를 바란 것일 수도 있고요.”
“괴물 같은 자식.”
살짝 고개를 내리깔고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은 당연한 수순, 진 군사가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명예를 수습해 주기 위한 나름의 행동이었다.
‘정말…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걸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모션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맞다. 제니스 후작, 물론 모든 것이 거짓으로 점철된 남자였지만 적어도 이런 잔인한 짓을 저지를 남자는 아니었다.
그가 악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곳에 죽음을 불러온 테러리스트였고, 왕국연합과 제국의 입장에서는 주적이라 불려도 모자란 악당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는….’
한때 제니스 후작에게 마음을 열었던 그녀의 개인적인 감정이 비춘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와 여러 시간을 함께하며 도출해 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여기서 오롯이 아이나 페넬로티만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우리 군사님 명예로운 사람이야.’
그는 명예로운 자였다. 국가를 위해,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들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절대로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 죽는다는 결과는 바뀌지 않았겠지만, 제니스 후작은 절대로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괴물은 아니야….’
물론 이러한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을 리 만무, 그렇게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을 때, 별안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믿을 수 있는 겁니까?”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비릿한 미소를 흩뿌리고 있는 핑크레인 공작.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핑크레인 공작님?”
“페넬로티 영애 말입니다.”
“…….”
“무슨….”
“…….”
“…….”
“페넬로티 영애, 그녀를 믿을 수 있는지 묻고 입는 겁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녀가 이미 공화국에 붙어… 아니, 공화국의 오호대장군이라는 자의 손을 잡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의 모욕스러운 발언은 삼가십시오. 핑크레인 공작님.”
“모욕스러운 발언이 아닙니다. 저는 하늘에 맹세코 페넬로티 영애를 모욕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다만 아주 약간의 가능성도 조금은 생각해 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도 제니스 후작과 페넬로티 영애의 사이가 꽤 뜨겁고, 각별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 뭐라고?!”
‘아니야. 화내지 마 파스텔.’
“단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녀는 위험요소가 될 겁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근위대장 그리고… 김현성 백작.”
‘페인트 영애는 쏙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 봐. 시바.’
이 새끼의 목적이 뭔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야비한 새끼 진짜. 개 화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