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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405화 (1,40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405화

피의 무도회(15)

극적인 상황이었다. 선희영이나 하연수에게는 그리 극적인 상황처럼 보이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이곳에서 오래 체류하고 있던 이들에게는 현재의 상황이 기적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곳에서 언데드들이 계속해서 들이닥치고 있었던 상황, 그걸로도 모자라 떼로 몰려다니는 미치광이 살인마 새끼들과 드잡이질을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가끔씩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마법 외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던 공간이었고, 간신히 앞을 식별할 수 있는 희미한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비명 소리와 고함 소리 외에는 들려오지 않는 듯했고,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어야 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용인들과 무도회장의 참가자들은 멍하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 있었다는 거다.

모두가 뒈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으니 갑작스레 들려오는 목소리가 반갑지 않을 리 만무, 심지어 환한 빛이 조금씩 조금씩 4층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분명히 어두웠던 공간을 환한 빛들이 가득 채워나간다. 망원경으로 내려다보니 조금 더 장관이다. 여기저기에서 불빛들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형체 없던 공포를 걷어내고 있는 것이다.

‘참… 겁쟁이 새끼들만 있어가지고… 쟤네들 아니었으면 전부 다 뒈질 뻔한 거 아니냐구.’

4층에 생존해 있던 이들 중에 마법사나 사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이 마법밖에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잘 찾아보면 헝겊이나 기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양초들도 있다.

양초나 횃불을 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동하지 않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자신들이 목표가 될 수도 있으니까.’

피아가 정확하지 않고, 난전으로 치달은 싸움터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알리기 싫었을 테니까. 사이코패스 살인마 집단이나, 공화국의 암살자에게 본인들의 위치를 알리기 싫었다는 것뿐이었다.

라이트 마법으로, 신성력으로 이 어두웠던 공간을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고작 그것뿐이었다.

애초 여단이 한 것이라고는 최초의 습격 때 소모품을 풀어놓은 것과 이곳을 암전 상태로 만든 것 외에는 없다.

암흑안개마법 같은 구닥다리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고, 마법을 제한하기 위해서 해당 지역에 일종의 결계를 쳐 놓은 것도 아니다.

결국에 이곳에 있었던 멍청이들은, 자신들 스스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체 없었던 공포에 좀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1기영의 의도대로였겠지만…

‘한 명이라도 정신 좀 차렸으면 시바 생존자가 수백은 더 생겼겠다.’

누군가 먼저 손을 들어 올렸다면 지금처럼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장 먼저 총대를 멘 것은 왕국연합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고위귀족들이 아니다.

무도회장에서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했던 기사들도 아니고, 바다처럼 넓은 지식을 자랑했었던 마법사도 아니다. 신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사제들도 아니었다.

이곳에 빛을 불러온 것은 혼인동맹을 위한 부품에 불과했던 영애들이다.

1기영이 상정하지 못했던 변수는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그 영애들이었다.

“빛을 밝히세요! 모두! 빛을 밝혀요!”

“빛을 밝히세요!!”

그녀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차츰차츰 어두운 성안에 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치명상을 입은 마법사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사용인들도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왕성 안에 빛을 불러온다.

“키에에에에에엑!”

“빛을 밝히세요!”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이들도, 이제는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이들도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살았어….”

“살았다고!”

녀석들의 눈에 비친 것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찢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영애들이었을 터다.

자신들이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놈들이 눈에 띄었지만 다행히도 정상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녀석들 또한 시야에 비친다.

완전히 비무장 상태였던 이전과는 다르게 전위를 서고 있는 영애들은 창이나 방패 같은 것들로 무장하고 있다.

물론 어색해 보이는 영애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녀들의 목적은 언데드들을 때려잡는 것이 아니다.

살롱에서 여기까지 해왔던 것처럼, 그녀들에게 주어진 일은 단순하다.

“벽을 올려요!”

“부상자들을 먼저!”

물론 단순할 뿐이다. 결코 쉽고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는 볼 수 없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되어야 하는 임무였다.

완전히 벽이 올라가기 전에, 영애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부상자들을 빛 안으로 수습한다.

“언데드예요! 페인트 영애! 머리를 찔러도 죽지 않아요!”

“화염마법이에요! 화염마법을 캐스팅 해주세요!”

“벽 올려! 벽 올려어어어어!!”

“주문 외워요! 지금 빨리!”

“꺄아아아아악!”

“함가르디아 영애!”

“카리나 페넬로티 영애! 부탁드려요!”

“키에에에에엑!”

“죽어! 이 시체들아!”

“아아아아악! 꺄아악!”

“찌르세요! 창으로 찔러서 몰아내요!”

“왼쪽이에요! 왼쪽으로 가야 해요!”

“벽 열어요!”

“하지만!”

“벽 열어어어어어!!!”

‘다른 게 장관이 아니야. 이게 장관이자너.’

뭐가 됐든 간에 홍보영상으로 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륙에서 수많은 전투를 봐왔지만 이것만큼 가슴이 웅장해지는 장면은 흔하지 않다.

물론 신화나 전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전쟁 같은 느낌은 없었지만 드레스를 입은 영애들이 더없이 처절한 모습으로 언데드들에게 대항하는 장면은 멋지다 못해 소름이 돋는다.

두려움을 안고 있는 눈으로, 떨리는 손으로, 어설프게 무기와 돌덩이를 잡고 그들에게 대항한다.

다치는 일은 비일비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러서는 이들은 하나 없다.

물론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조율하고 있는 것은 알프스와 벨리에 두 명, 그녀들이 전위에서 큰 부상을 입거나 무리한 행동을 하고 있는 영애들을 제지해 주고 있기 때문이리라.

‘잘하네. 우리 병아리들.’

드레스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흉터 가득한 얼굴로 그들이 배웠던 교양과는 반대되게 큰 소리를 내지른다.

자신들보다 더 큰 덩치를 가지고 있는 기사를 부축하고 구조하고, 그녀들의 교양검술을 우습게 보던 귀족들을 구해내기 위해 위험 속으로 발을 내디딘다.

핑크레인 공작 저 새끼는 죽지도 않았는지 영애들 세 명에게 부축을 받으면서 빛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 심지어 다리가 떨려 본인의 의지로는 걷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시바 저런 새끼들은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왕국연합에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자너. 애들이 너무 심성이 착해서 탈이야.’

브러쉬 영애에게는 미안하지만 왕국연합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 않을까.

구태여 영상을 뿌리지는 않더라도 오늘 영애들의 활약상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갈 테니 말이다.

“빛을 밝히세요!”

“왕성에 빛을 밝혀요!”

‘나도 합류하고 싶어질 정도자너.’

내가 이 정도인데 이걸 보고 있는 다른 놈들은 오죽할까.

‘저 새끼 저거 봐.’

방금 전까지 다리에 칼침을 맞고 울고불고 질질 짜던 귀족 하나는 본인이 부끄러운지 울음을 참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몸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쩔뚝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영애를 본 것이 틀림없으리라.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보이는 놈 하나도 뭐라도 하기 위해 검을 들고 설치고 있다.

방금 전까지는 꽁지 빠지게 도망쳤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영애들 앞에서는 멋진 척을 하고 싶었던 걸까. “영애! 위험합니다!” 같은 소리를 지껄여대며 나서는 꼴은 가관, 사실은 본인이 더 위험해 보인다.

이제 와서 기사님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보여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차라리 저런 놈들이 낫다. 핑크레인 같은 배부른 돼지 놈들은 아예 움직일 생각도 없어 보였고, 아예 양심이라는 게 사라진 녀석들은 기절한 척 몸을 눕히고 있었으니 말이다.

“막아요!!”

“주문 외워요! 주문!!”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들이 이곳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싸우는 것을 포기한 이들도, 부상당해 움직이기 힘들어하는 놈들도 모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벽을 쌓고 허무는 단순노동에 도움을 준다거나, 벽을 뚫고 들어오기 위해 발악하는 죽은 자들을 막으려고 한다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진짜로 도움이 되는 쪽은 애초에 이곳에서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던 기존 전투원들.

‘왕국연합 근위대.’

“진영을 잡아라! 지원군이다! 지원군이 왔다!”

“흐으윽… 페넬로티!”

“지원군이 도착했다! 하하핫! 지원군이 왔다고!”

“진영을 잡아! 벽을 사수해라!”

“충!”

‘꼭 충이라고 하더라.’

영애들을 두 눈으로 확인한 근위대장이 커다랗게 입을 열었다. 그녀들을 지원군이라 표현했지만 근위대장을 따르는 근위대는 그 말에 다른 의견이 없어 보인다.

영애집단들이 보호받아야 할 이들이 아닌 함께 싸워야 할 동료로 인정한다는 뜻이었을 터다.

“방패 들어 올려!!”

“충!”

“왕국연합을 위하여!”

“왕국연합의 영광을 위하여!”

“왕국연합을 위하여!”

“왕국연합의 영광을 위하여!”

단순히 사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업, 근위대장이 선창을 하면, 근위대는 영광을 위하여라고 후창을 할 뿐인 단순한 작업.

하지만 저들은 저 단순한 행위를 통해 사기를 얻고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조금이라도 더 방패를 뻗을 힘을 얻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얻는다.

‘왕국연합 뽕차겠자너.’

힘을 얻고 싶은 영애들 또한 그들의 말에 힘을 보탠다.

“왕국연합의 영광을 위하여!!”

“왕국연합을 위하여!”

“페넬로티이이이!!”

“왕국연합을 위하여!!!”

‘영애들도 이제 숨 좀 쉴 수 있겠네.’

빛을 되찾은 근위대가 무거운 갑옷을 옮기며 방패를 들어 올린다.

죽은 자들은 그들의 방패에 막히고 발악하듯 손톱을 휘두른다. 기분 나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지만 근위대는 이를 악물고 버텨내고 있다.

말 그대로 그들은 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뒤에서는 계속해서 영애들이 주문을 쏟아낸다. 이미 마력 탈진 현상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피를 토하며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 있다.

‘얘들아….’

근위대 외에 다른 이들 역시 조금씩 집단 안으로 합류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마법사들도, 계속해서 저항했던 모험가들도, 이제는 완전히 밝아진 왕성 안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영애들이 뿜어낸 빛이 그들에게 구심점이 되어준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던 이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페인트 영애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근위대와 기사들은 그녀의 목소리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일었을 정도였다.

‘이미 장악해 버린 거냐고!’

그냥 네가 왕국연합 대가리 하면 안 되냐구!

정신없었던 전장이 점점 더 형태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가장 환영하고 있던 녀석이 하나.

‘그래… 네가 가장 기다리고 있었겠지.’

짐 덩어리들에게 발이 묶여 있었던 김현성이었다.

“후우….”

이미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쳤는지 피투성이가 된 몸.

“후우… 후우….”

녀석이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있다. 분노를 삭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거친 숨을 정리하려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김현성이 꽤 화가 나 있다는 것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새끼들 다 뒈졌다.’

그렇게 녀석이 양손으로 검을 잡은 채로, 죽은 자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긴다.

“김현성 백작….”

엑스트라 한 놈이 김현성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저게… 제국의 김현성인가….”

시바 영웅의 등장처럼 보일 정도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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