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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96화 (1,39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96화

피의 무도회(6)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 마음에 들어서라거나, 그들의 이야기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그들의 가능성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아니다. 불현듯, 자연스럽게 내려진 결론이었다.

이전 육망성 게이트 안에서의 마지막 기억을 되짚어 본 것은 당연지사. 외신이 떨어진 당시를 떠올려보자 더욱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점의 1회 차 전력으로는 녀석들을 막을 수 없다. 정하얀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성장치가 낮은 김현성에게도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저히 놈들과 오랜 시간을 싸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 시점 이후를 다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1회 차 전력의 성장이 필수불가결하다.

김현성이나 차희라 같은 네임드들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받쳐줄 수 있고, 전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전쟁은 린델 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캐슬락, 린델, 에베리아 왕국의 세계수 그곳은 그저 인류 최후 저항의 장소였을 뿐이다.

전쟁은 전 대륙에 걸쳐 오랜 기간 지속됐고, 그 싸움은 서로가 서로의 전력을 깎아 먹는 것에 기여했다.

왕국연합은 외신전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복되고, 패배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서도 분명 저항의 불꽃을 일으킨 이들이 있었을 터였다.

생존자들을 이끌고, 최후의 저항을 함께한 이들이 분명히 존재했을 터였다. 물론 이름을 날리기 전에 죽거나, 족적을 남기기 전에 바스러지는 이들이었겠지만, 이곳에서도 지킬 것이 있는 인간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들이 있었을 터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전쟁사에 작고 큰 영향을 미치게 한 이들이 있었을 터였다.

“…….”

“…….”

그게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왕국연합을 끝까지 지키려 검을 들어 올리고, 끈질기게 그들의 날개를 붙잡아 진격을 늦춘 이들이다.

눈앞에 있는 영애들은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일지도 모른다. 그녀들이야말로 이 망국을 지킨 영웅들이라 생각하는 것이 너무 과한 해석일까.

물론 물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김현성은 그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없었으니까. 단순히 개인적인 해석이었고 설명할 수 없는 직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육망성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이유가 있다면 분명 그녀들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어두운 공간, 빛이 바래진 야명주가 위태롭게 공간을 밝히고 있는 장소. 그곳에 모인 이들이 둥글게 앉아 페인트 영애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는 조금 간질거리는 연설이기는 했지만 분명히 영향을 받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와닿지 않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

이곳에 앉아 있는 이들 중에 멍청한 이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어떤 선택이 합리적인지는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단지 용기가 부족할 뿐이다.

당연히 입을 열 수밖에 없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뭘 하면 되나요. 페인트 영애.”

단번에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당연지사.

“저, 저는 싸우는 방법은 잘 몰라요. 마법도… 팔레트 영애처럼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하지만…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요. 페인트 영애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싶어요.”

‘뭐해. 시바. 빨리 한 명 한 명 벌떡벌떡 일어나야지.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러는 게 근본이자너.’

슬그머니 파스텔을 바라보자 그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다.

“나도 싸울 거야. 물론 페인트와는 이유가 다르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생겼거든.”

‘그래. 그렇게 한마디씩 하면서 일어나야지 분위기가 좀 살자너.’

“당연히 저도 싸울 거예요. 작은 혁명이에요. 우리들이 이곳에 혁명을 일으키는 거라고요!”

‘그래. 브러쉬야. 넌 혼자서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어.’

계속해서 연초를 빨아들이는 시가레트 영애는 뭐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냥. 쿨하게.

“합류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끝이다.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이 모두 참가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페인트 영애는 꽤 감동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연히 합류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미 흑장미 살롱이 한패라는 걸 전부 알고 있는 영애들이었지만 드라마가 꽤 그럴듯했던 터라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에는 한 영애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우습게 보지 말라고요! 저, 저도 함께하겠어요!”

‘아무도 너 우습게 안 봤어.’

“어쩔 수 없네요. 함께하는 수밖에… 이렇게 여기서 울고 있다면 가문의 어른들을 볼 면목이 없을 것 같거든요. 저희 가문을 모욕한 것에 대한 사과는 이번 일이 끝난 이후에 받겠어요. 페인트 영애.”

‘패드립 친 거 아직도 마음속에 담고 있었어?’

“그래요. 한번 해보자고요! 어차피 죽은 목숨 발버둥이라도 쳐보자고요.”

‘우리 죽은 목숨 아니야.’

세 명의 영애 외에도 모두가 눈물을 훔치며 일어서고 있는 모습, 그 와중에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들을 보니 참 영애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치 무도회장에 입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차례대로 몸을 일으키며 명대사 아닌 명대사를 갈기고 있다. 지금 보니 뒤늦게 일어나는 영애들은 망설이는 것이 아니라 멘트를 정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뒤로 가면 갈수록 멘트들이 더욱더 휘황찬란해지고 화려해지는 중, 어딜 가나 주목받아야 되는 성향은 이런 곳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일까.

모인 영애들이 전부 다 한마디씩 하다 보니 괜스레 시간도 지체되는 중이다. 하지만 이런 이벤트를 막을 용기가 없었던 것일까. 페인트 영애는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결국에는 모든 영애들이 손을 모은다.

“벽에 이름이라도 남길까요?”

‘그래. 그런 것도 해야지. 31인의 영애들.’

이런 이벤트가 빠지면 또 섭섭하다.

물론 한시가 급한 페인트 영애는 이름을 남기는 거고 나발이고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겠지만 이런 건 사기진작의 일환이다.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임무에 투입되는 순간이었으니 이런 이벤트도 또 해줘야지.

결국에는 한 영애가 총대를 메고 벽면에 이름들을 남기고 있다.

귀족영애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대사가 마음에 들었는지 그 글귀도 새기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모양새가 꽤 그럴듯하게 되어버렸다.

언뜻 생각해 보면 쓸모없는 의식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 쓸모없는 의식이 끝난 뒤에는 모두의 표정이 달라진다. 비로소 목숨을 걸 각오가 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페인트 영애.”

‘굳이 끼어들 필요 없겠지?’

아니나 다를까 페인트 영애가 금방 말을 이어왔다.

“일단 이 살롱에 안전구역과 지휘본부를 만들겠어요. 언제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마법으로 벽과 함정을 만들어야 해요.”

안전지역부터.

명령을 내리는 모습이 꽤 익숙하게 느껴진다.

“방어마법에 조예가 깊은 영애들은 모두 이쪽으로 와주시겠어요?”

“네. 페인트 영애.”

“네. 페인트 영애.”

이윽고 영애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 곧바로 토벽이 올라오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마력을 아껴야 된다는 판단으로 손으로 직접 돌을 옮겨 벽을 쌓는 영애들도 시야에 비친다. 거기에 방어마법을 중첩하고, 알람 마법 같은 것들을 외우자 기본적인 세이프티 존이 완성된다.

물론 정진호 같은 괴물들이 작정하고 뚫으려고 한다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 따로 임무를 부여받은 녀석이 여기에 닿을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일단 주변부터 수색해 나갈 거예요. 부상당하거나 고립되어 있는 이들을 찾아 이곳으로 옮기고 보호하는 걸 일차적인 목표로 삼겠어요. 물론 함께할 수 있는 영애들을 찾는 것도 중요해요.”

“네.”

“적들은 강할 거예요. 우리 대부분이 교육을 받았다고 한들, 아직 경험이 미천해요. 정면에서 그들과 부딪친다면 필패하겠죠. 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분명 뭉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우리 방식대로 우리의 힘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노력한다면 현 상황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요.”

“네. 페인트 영애.”

“우리는 빛을 되찾을 거예요.”

그럴듯한 명대사가 아니다. 실제로 이 어두운 성을 밝게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괜찮은 발상이네.’

지금 왕성 안에서 분투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어둠이 가장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적들은 현 상황을 대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거나 마법을 걸고 왔겠지만, 성의 근위대나 싸울 수 있는 이들은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병력들은 적과, 어둠과 싸우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페인트? 이렇게 넓고 복잡한 성에서… 고립된 영애들을 전부 다 찾으면서 빛을 밝힌다는 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거야. 게다가 흩어지면 위험해질 거라고….”

여기에서는 살짝 끼어드는 것이 맞다.

“굳이 흩어질 필요는 없어요.”

‘나도 너희들 못지않은 관종이자너.’

곧바로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디디고 커다란 테이블에 왕성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다.

놀랐다는 영애들의 얼굴이 눈에 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블라인드 체스를 다섯 명과 동시에 두었다는 이야기를 모두가 알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이나 페넬로티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쯤은 이 데뷔탕트 무도회의 상식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성의 지리를 통째로 외웠다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일까.

살롱을 중심으로 조금씩 조금씩 그려지는 지도의 규모와 퀄리티를 바라보며, 영애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야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있는 기예는 아니겠지. 실제로 눈앞에 결과물이 그려지고 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블라인드 체스 때보다 더 놀라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땅을 지키고 넓혀나가면 돼요.”

“…….”

“살롱을 중심으로요. 팔레트 영애, 가능하시다면 주변으로 연기를 보내주시겠어요? 보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요.”

“네. 가능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주세요. 우리 위치를 들킬 확률도 있으니까요.”

“네. 페넬로티 영애.”

“어떤가요? 팔레트 영애. 살롱 근처는….”

“…….”

“…….”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니스 후작이 약속은 지키나 보네.’

“그게 무슨 소리야. 페넬로티. 굳이 흩어질 필요가 없다니? 우리 땅을 지키고 넓혀나간다니?”

지도에 손을 댄다.

“이곳이 우리 땅이에요. 이곳을 지켜야 해요. 그 이후에 우리 모두가, 이 안전지대의 범위를 늘린다고 생각해야 해요.”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페넬로티 영애.”

“땅따먹기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거예요.”

“아….”

“지켜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에요. 사람을 찾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지역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해요. 필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예요.”

“공간을 지킴으로써 인명과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로군요.”

“네. 우리가 있는 이 살롱과, 우리가 앞으로 얻을 지역들을 성처럼 만들어야 해요. 저희가 있는 곳을 쉽게 들어올 수 없는 성벽처럼 느끼게 만들어야 해요. 언제나 공성보다는 수성이 유리한 법이에요. 이 살롱을 지키는 싸움을 하면서 점차 영역을 넓혀나가는 거예요.”

‘대충 이해했지? 페인트?’

“괜찮은가요? 페인트 영애.”

“네. 페넬로티 영애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멀 길도 한 걸음 한 걸음부터라고 했어요.”

“…….”

“그 시작으로… 일단은 살롱의 빛을 살리는 걸 최우선으로 하도록 해요.”

“그 말씀은….”

“우리가 있는 이곳에서부터, 빛을 만들어요.”

“…….”

“…….”

이제 싸울 준비를 하자는 소리였다.

“…….”

“…….”

영애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위치를 알리는 셈이니 적들이 찾아올 거예요.”

“네. 각오는 되어 있어요.”

“많이 다치실 수도 있어요. 신의 품으로 돌아가시는 영애분들도 분명 있을 거예요.”

“이미 각오했어요.”

“…….”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손에서 빛을 피운다.

빛을 피우는 마법은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다. 마법을 배우는 누구나 알고 있는 주문일 것이다. 아마 여기에 있는 영애들 대부분이 라이트 처음 배웠을 때를 떠올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일 것이다.

작은 촛불이었던 빛들은 어느새 크게 뭉쳐, 살롱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그렇게,

어둠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성에서 첫 번째 빛이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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