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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91화 (1,38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91화

피의 무도회(1)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정황상 2군사가 샷건을 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얼마나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지가 전해져 오는 상황,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게 놈의 정신건강을 위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조금만 더 1군사에 대해서 캐물었다가는 정말로 이 새끼가 제니스 후작을 죽이기 위해 찾아올지도 모른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자너.’

문제는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게 2군사뿐만이 아니라는 것. 그 누구보다도 비이성적인 인간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

본인도 본인이 어째서 움직였는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건 우리 같은 인간들에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건만, 누가 봐도 놈이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않고 온 것이 전해져 온다. 실제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자신이 페넬로티 영애의 손을 붙잡은 것인지, 어째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다.

본인이 드라마 속 주인공 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것일까. 미묘한 표정의 변화가 있었던 것뿐이었지만 진 군사의 당황한 얼굴을 적지 않게 본 나는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

“…….”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 떠들썩했던 무도회장에 다시 한번 침묵이 가라앉는다. 흐르고 있던 음악과 소음이 멈추고, 시선들이 집중된다.

그 와중에 김현성이 완전히 얼어붙은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인싸는 못 되겠자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도망치고 싶은 것은 2군사도 1군사도 아닌 김현성이 아닐까.

‘얘는 진심으로 춤만 권한 것 같은데 말이야.’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은 녀석이 어째서 갑자기 내게 춤을 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국의 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압박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간 소극적으로 참여했던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혼인동맹에 진심으로 임하고 있다는 리액션을 위한 적당한 상대가 필요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그나마 편지도 주고받고, 이야기도 좀 나누어 본 페넬로티가 괜찮은 상대처럼 느껴졌겠지.

‘아니면 진짜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고.’

김현성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이번 이벤트는 녀석 역시 큰 용기를 낸 이벤트였다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사회성 부족한 김현성이다. 남에게 춤을 권하는 건 누군가에게 별일 아닐지는 몰라도 최소한 김현성에게는 역사적인 대사건이라는 거다.

심지어 김현성에게는 갑작스레 난입한 제니스 후작과 설전을 벌일 만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없다.

이게 무슨 무례냐고 소리치거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여쭈어본다거나, 적절한 정답이 무엇인지 고를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그저 두 눈을 꿈뻑꿈뻑 뜬 채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세 명이서 얼어붙은 것처럼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이 지속된다.

물론 그 시간을 짧았다면 짧았다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적어도 김현성에게는 영겁처럼 느껴졌을 것이 분명할 것이다.

아무나 뭐라고 말 좀 해주면 안 될까? 나 팔 아픈데….

‘둘 다 고장 나 있으니 어떻게 하겠냐구.’

이건, 페넬로티 영애가 나설 수밖에 없다.

김현성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준 한마디.

“지금 이게… 무, 무슨 짓인가요. 제니스 후작님.”

퍼뜩 정신이 든 제니스 후작과 김현성 백작도 그제야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무례….”

갑자기 시바 시집도 안 간 영애의 팔을 붙잡다니요!

김현성 백작에 대한 무례이기도 해요!

이 멍청한 새끼야.

제니스 후작이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김현성 백작님. 페넬로티 영애와 선약이 있었던지라.”

“…….”

“급한 일인 터라 본의 아니게 김현성 백작님을 곤란하게 만든 것 같군요. 추후에 정식으로 사과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사과로 될 일이냐고요.’

게다가 페넬로티 영애의 의사 따위는 상관이 없나 보다. 애당초 우리 둘이 언제 무슨 약속을 했었던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새끼는 이렇게 무작정 들이대면 자신을 선택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시바 오만방자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다 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무슨 자신감으로 김현성 앞에서 들이댄 건지 알 수가 없을 지경.

아니면 그냥 김현성이 별다른 반응을 해오지 않을 거라 기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놈의 계산에 실수라고 할 것이 있었다면 김현성을 너무나 과소평가했다는 것. 조용히 입을 열어오는 현성이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선약 말입니까?”

“네.”

“…….”

“…….”

“아무래도 페넬로티 영애에게 직접 물어야겠군요. 정말로 제니스 후작과 선약이 있으신 겁니까?”

“네? 그… 그건….”

“그리고, 붙잡으신 팔은 놓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니스 후작님. 그녀에게 실례가 아닙니까.”

‘그래! 시바 팔 아팠어!’

“…….”

‘기 싸움 뭐냐구! 젠장!’

어째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조금 기분이 나쁜 듯한 모양새.

당연히 좋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간에 자신의 시간과 결심을 방해받은 것이었으니 말이다.

제니스 후작 역시 살짝 입술을 깨문 이후에 내 팔을 놓는다.

“불편하신 게 있으시다면 눈치 보지 않고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영애?”

“페넬로티 영애.”

‘근데 뭐 어쩌라는 거냐구….’

결국에는 선택지도 이쪽에게 와버린 상황. 슬그머니 좌중을 둘러보니 역시나 모두가 팝콘이라도 뜯어 먹는 모양새였다.

그야 갑작스레 무도회장에서 치정 싸움이 열렸으니 기대가 될 만도 하다. 심지어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 충혈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뭐라 뻐끔뻐끔거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확인해 보자 곧 무엇을 위한 아우성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김현성 백작?’

“…….”

‘김현성… 백작이라고 하고 있는 거 맞아?’

“…….”

‘닥치고 김현성 백작?’

“…….”

‘현성이 선택하라고?’

모두가 김현성 백작을 연호하고 있지 않은가. 이미 제니스 후작에 대한 신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일까.

‘시바 이거 뭐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구.’

영애들의 기대를 받들어 근본픽을 선택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겠지만 1군사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뭔가 마음을 먹었을 테니 이렇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판단도 선다.

혹시라도 귀띔을 해주려는 것인지, 공화국을 포기선언이라도 하겠다는 건지,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의도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충동적인 결정이겠지만 분명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럴듯한 목적이 있을 테니, 페넬로티 영애와 시간을 함께 보내려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미쳤다고는 해도 설마 정말로 김현성과 내가 있는 모습이 보기 싫다 돌진하겠는가.

진청이라는 인간은 이유 없이 개입했어도, 이유를 만들 녀석이다.

‘현성이랑 춤추는 거 미룬다고 딱히 해가 될 것 같지는 않은데.’

김현성과 거리감을 조금 더 가까이 하는 것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지금은 제니스 후작의 턴.

영애들의 기대를 배신하기는 싫었지만 이번만큼은 녀석의 손을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맞… 맞아요.”

살짝 고개를 숙인 얼굴.

“네?”

“제니스 후작님의 말씀이… 맞아요. 제가 깜빡 잊고 있었어요. 선, 선약이 있었네요. 춤을 권해주신 건 너무 감사드려요. 김현성 백작님. 약속을 잊고 있었던 것은 제 실수이니, 제니스 후작님과 먼저 볼일을 봐야 될 것 같아요.”

“…….”

“다음 기회에… 만약 기회가 있다면….”

“너무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넬로티 영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제가 페넬로티 영애를 곤란하게 한 것은 아닌지….”

“아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지금은 다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요. 죄송해요. 김현성 백작님. 다음에 꼭 만회할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실까요?”

“…….”

“…….”

“페넬로티 영애라면 언제든지 환영하겠습니다.”

“감사드려요. 김현성 백작님. 또,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유감이에요.”

“그럼, 선약이 있다고 하시니 저는 이만 물러가야겠군요.”

“다시 한번 죄송해요.”

꾸벅로티.

자신조차도 자신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는 페넬로티의 얼굴. 제3자가 보기에는 페넬로티 영애가 사랑에 패배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처럼 비추어질 것이다.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의 눈동자에는 언뜻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페넬로티….”

“…….”

“하아… 페넬로티 영애. 어쩌자고….”

하는 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마저 지지하는 것이 친우의 참된 도리라고 생각하는지 어느새 응원의 눈빛으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제니스 후작 이 새끼는 선약 선언을 확인한 이후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중, 본인이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느껴져 황당하기 짝이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은 이게 정답인데.

“페넬로티 영애 괜찮으시다면 춤을….”

“네. 좋아요. 제니스 후작님.”

그렇게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긴 두 사람.

음악이 흘러나오고 별것 아닌 시간이 지나간다. 이 새끼답지 않은 어색한 표정이 보인다.

‘역시 이 새끼 춤 못 추자너.’

갤러리들이 알아서 공간을 만들어 준 탓에 마치 주인공마냥 무대를 전부 사용하는 것은 빠질 수 없는 연출이다.

성에 차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페인트 영애가 무대를 마련해 준 것 같다. 커다랗게 한숨을 쉰 페인트 영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페… 페넬로티이….”

아직도 제니스 후작을 인정하지 않은 파스텔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팔레트 영애는 브러쉬 영애와 손을 모으고 이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니스 후작의 춤 실력은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하기는 했지만 갤러리들은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 어머….”

“계속 춤을 피하시는 것처럼 보여… 제대로 교육받지 않은 건 아닌가 싶었는데… 아름답네요. 페넬로티 영애는.”

‘그래 날 더욱더 칭찬해.’

“제니스 후작과 마찰이 생겼다는 건….”

“헛소문 아닌가요? 만약 그게 그저 그런 가십이 아니었다고 해도… 이미 화해한 것처럼 보이죠?”

“즐거워 보이는군요. 페넬로티 영애.”

‘그래 지금 즐거운 연기 하고 있자너. 막막 희망을 얻고 나아갈 것만 같은 모습 보여주고 있자너.’

완전히 나락으로 처박히기 전에 약간의 희망을 보여주는 빌드업은 공식이나 다름이 없다.

“역시 두 분은 미래를 약속한 걸까요?”

“글쎄요. 아마 확실한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확실한 게 없어요.’

소란스러운 장내, 빙글빙글 돌아가는 풍경, 춤을 추는 와중에 조심스레 입을 연다. 살짝 뾰로통한 얼굴로 말이다.

“제니스 후작님은 언제나… 절 당황스럽게 하시네요. 이번에는 정말로 깜짝 놀랐어요. 그걸로 끝이 아니라 거짓말까지… 하시다니… 제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세요? 김현성 백작님께서 이걸 어떻게 생각하실지… 얼굴을 못 들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페넬로티 영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하하….”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오신 건가요?”

“…….”

“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시려고 찾아와 주신 건가요?”

“…….”

조금 진지해지는 녀석.

“페넬로티 영애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

“…….”

이 새끼가 진실을 고백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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