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90화
뜻밖의 데뷔(25)
‘그럼 그냥 모든 게 무난하게 흘러갈 것 같았냐고.’
도대체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구.
“…….”
“…….”
아무 생각도 없었을 리는 없다. 녀석이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분명 페넬로티를 염두에 놓은 계획이 있었을 것이고, 그걸 실행할 자신도, 플랜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녀석이 상정할 수 없었던 변수가 나타났을 뿐이다.
절대로 상상할 수 없었던 변수 말이다.
‘그건… 그건 자기 자신의 마음이자너.’
으로 시작하는 로맨스 소설이 분명히 있을지도 모른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스토리 텔링, 남주가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것은 클리셰 중에서도 하책이라 할 수 있는 싸구려 클리셰였건만 이 새끼는 쌍팔년도 감성에 면역이 없는 것인지 훌륭하게 배역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누구도 아니라 진 군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녀석이 아니었던가.
사랑을 단순히 호르몬으로 인한 화학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녀석, 그런 종류의 감정을 단순히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미가 깊다.
당연히 본인이 가장 당황스러울 것이다. 페넬로티 영애에게 관심이 가고 그녀를 흥미로운 존재로 생각했던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미 깨닫고 있었지만, 도대체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혼란스러워하는 놈의 모습이 눈에 띈다.
아이나 페넬로티는 배제해야 한다. 그게 정답이다. 대업을 위해서라면 그녀에게 멀어지는 것이 맞다. 아니면 다른 루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거짓으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관계를 맺는다면, 종국에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1군사는 그런 선택지에 쉽사리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것이 모두 자기변명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당연한 수순, 공화국에 필요한 인재라느니 다듬어지지 않은 보석을 보고 싶다느니, 하는 것들은 전부 자기 자신을 속이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는 계속 부정해 오고 있었지만,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녀석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적어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존재했다.
자신이 아이나 페넬로티를 아끼고 있다는 것.
그녀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는 것.
그녀를 위험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이 정도인 것 같은데… 제 해석이 어떤 것 같아요? 군사님? 대충 맞아들어가는 것 같아요?
-내게 묻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군. 애초에 구분을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제니스 후작이 아니야. 저 녀석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놈의 마음을 내가 어떻게 알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아니, 그래도 조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봐요. 제니스 후작이 정말로 계획에서 페넬로티를 배제할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
-…….
-아! 그러고 보니까 그쪽 인선들 반응을 못 본 것 같네요? 분위기 좀 어때요? 이쯤 되면 페넬로티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만도 한데… 군사님 얘들 충성심 꽤 강한 편 아니었어요? 것도 쓸데없는 과잉충성하는 게 그쪽 특기잖아. 혹시 지들끼리 페넬로티 제거 계획이라도 짜고 있는 거 아니에요?
-걱정하지 마라. 그렇지 않아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나오고는 있다는 거네요. 아무튼 간에 말 좀 해줘요. 진 군사님 놀리려고 이러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필요한 일이니까. 물어보는 거잖아요.
-…….
-또 기분 나쁘다고 입 꾹 다물고 있는 거 아니죠? 제니스 후작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아야, 이쪽에서도 준비를 하죠. 어떨 것 같아요? 어떻게 나올 것 같아요? 혹시 공화국이고 나발이고 다 포기해 버리고 페넬로티 영애가 좋다고 쫓아오지는 않겠죠? 그건 너무 군사님답지 않은 행동이잖아요. 이러면 회차 스토리 라인이 꼬여 버린다고요.
-…….
-지금 좀 심란한 상태인 것 같아요. 군사님은 망원경이 없어서 못 보고 있겠지만, 어제는 막 물건 집어 던지고, 히스테리 부리면서 난리 났었다니까요. 자기 부하들한테 큰소리친 건 들었죠? 나중에 듣는다고 했잖습니까! 제기랄! 이러면서 쏘아보는데 눈빛으로 사람 죽이는 줄 알았다니까. 지금도 여기 힐끗힐끗 바라보고 있는데… 아, 아무튼 빨리 대충이나마 말….
-정말로! 정말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단 말이다! 제기랄!
-…….
-모르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나! 제길! 제기랄! 나는 분명히 모른다고 이야기했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저 개자식은 도대체 왜 저러고 있는지! 뭣 때문에 슬프고 혼란스러운 건지, 정말로 하나도 이해가 가는 게 없단 말이다!
-아… 아니, 왜….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 이기영! 정말로 모른다! 모른다고! 모른단 말이다!
-왜… 화, 화를 내고… 그래요….
-모른다! 저 미친 자식이 저러는 이유를 당최 모르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설명하라는 거냐!
-진정하세요. 군사….
-진정? 네놈 같으면 진정할 수 있겠나?!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제길. 어째서… 어째서! 제니스 후작 저 개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제길!
‘이 새끼…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있었나 보네.’
목소리에서 처절한 울분이 느껴진다.
더 이상 건드린다면 2군사의 이성이 끊어질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
심지어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리 소리를 친 것을 보니 직원복지로나마 제니스 후작에 대한 업무를 중단시키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군사님….
-후우… 후우….
-좀… 좀 쉴래요?
-…….
-…….
-내가 조금 흥분한 것 같군.
‘조금이 아니었자너.’
-아무튼 간에 난 모른다는 의사를 확실히 전했다. 네놈이 말해놓은 대로 김현성과 흑장미 살롱 영애들의 안전에 주의를 기울일 테니 특이사항이 있으면 또 연락하도록.
-아… 네. 고, 고마워요. 군사님… 그리고 여단 애들도….
-김창렬이 꼬리를 밟고 있는 중이다.
-고, 고마워요.
-천만에.
‘이 새끼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되겠다.’
괜스레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게 된다. 망원경으로 다시 한번 2군사를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눈에 핏발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옆에서 브러쉬 영애가 이쪽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움츠러들 필요 없어요. 페넬로티 영애.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당당해야죠. 오랜만에 나오신 무도회장이잖아요. 저번과 같은 사건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저기 제니스 후작 보이시죠?”
“네? 네….”
“정말로 뻔뻔하네요. 낯짝도 두꺼운 인간, 어떻게 바로 무도회장에 나올 수가 있는 걸까요? 다음 희생양이라도 물색하고 있나 보네요.”
‘애들아.’
“쓰레기 같은 인간. 페넬로티. 그놈이 선물해 준 다이아몬드 목걸이 지금 가서 얼굴에 던져 버려.”
‘그건 좀… 이거 비싼 건데… 가지고 갈 건데.’
“제물이면 뭐든지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보지?”
“…….”
“나 진짜 못 참겠는데. 내가 가서 한마디 하고 올까?”
파스텔 영애의 말을 페인트 영애가 받는다.
“경거망동하지 마세요. 파스텔 영애. 그럴수록 페넬로티 영애의 평판만 깎일 테니까요. 페넬로티 영애. 힘드실 거라는 거 이해해요.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고, 여기에 있는 게 참을 수 없으시겠죠.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브러쉬 영애의 말처럼 당당해지셔야 해요. 어깨를 펴고, 고개를 세우세요. 입가에 미소를 띠고 평소처럼 행동하세요. 그게 이기는 거예요.”
“네… 네. 페인트 영애.”
“팔레트 영애는 혹시나 제니스 후작이 이쪽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알겠습니다. 페인트 영애.”
“흥. 힐끔힐끔 여기 바라보는 꼴 좀 보라지. 그러게, 있을 때 잘해야지. 결혼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무슨 생각으로 여기저기 추파를 던진 거야? 퉤엣! 쓰레기 새끼.”
“침… 침 뱉지 마세요. 파스텔 영애!”
“뱉는 척만 한 거야. 뱉는 척만.”
‘너희 진짜 장난 아니구나. 애들아.’
무도회장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난리이기는 했다. 오늘만큼은 특별해야 한다면서 살롱의 사용인들이 모두 이쪽에 달라붙었을 정도, 무도회 입장 준비에만 몇 시간을 쏟았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머리 모양도 몇 번이나 바꾸고, 장신구나 화장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지우고 하고를 반복했다. 구태여 몰아주기를 할 필요는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들은 상대적으로 단출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셨다.
급한 것은 페넬로티 영애뿐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니스 후작에게 버림받은 페넬로티를 위해 영애들이 희생한 것이다.
숫자는 겨우 다섯에 불과했지만 기세는 마치 군단, 우르르 몰려다닌 게 하루 이틀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전우애가 더욱더 끈끈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분위기가 이토록 전투적이었으니, 무도회장이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큰 사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아이나 페넬로티의 복귀 무대로 관심이 쏠릴 만큼 쏠린 상황이었으니까.
거기에 영애들이 희생 아닌 희생을 하며 이쪽을 위해 힘을 써 줬으니 데뷔탕트 무도회가 아이나 페넬로티를 주목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슬쩍 걷기만 해도 여기저기서 시선들이 쏟아진다.
제니스 후작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는 소문도 퍼진 것 같다.
‘이건 분명히 페인트 영애 작품일 게 분명하자너.’
먼저 선수를 쳐서 좋은 여론을 형성한 것이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하루아침에 제니스 후작을 쓰레기로 만들어버린 셈이다.
저쪽 여론은 어떤지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영애들 사이에서는 제니스 후작의 평판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
딱히 확인해 볼 필요도 없다. 녀석을 벌레 보듯 바라보는 것은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뿐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페인트야. 독하다 독해.’
“흥. 뭐? 떠밀리듯, 장난스럽게 춤을 권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나요?”
“…….”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이에요. 저런 인간이 누군가랑 춤을 춰보기는 했겠냐고요. 저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퉤엣!”
“브러쉬 영애까지 왜 그러세요! 침 뱉지 마세요. 왜 파스텔 영애를 따라 하시고 그러세요?”
‘이제 그것도 재평가가 됐어?’
“오늘은 꼭 춤을 추시는 게 좋을 거예요. 페넬로티 영애. 보란 듯이 잘 지내고 있다고 과시하자고요.”
마치 사귀다가 좋지 않게 헤어진 사내커플이나 CC의 말로를 보는 듯하지 않은가.
모든 게 끝난 이후에 서로 정치하는 것도, 일부러 상대방에게 과시하는 것도 그렇다. 슬픔을 채 수습할 시간도 없이 곧바로 전쟁터에 몸을 던져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진지한 지원군이 있으니 이쪽은 상황이 더 나은 셈.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지원군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캐릭터의 갑작스러운 등장.
시작되는 급 전개.
“페넬로티 영애.”
“…….”
“…….”
“김현성… 백작님?”
“괜찮으시다면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이 새끼 갑자기 뭐야?’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 뭐 있었어?’
이거 누가 시켰어?
약간의 침묵,
그리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분위기.
주변에서는 당연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김현성 백작이 누군가에게 춤을 권한 것은 또 처음이거니와 페넬로티도 누군가와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김현성의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는 분위기가 부담스럽다.
“…….”
“…….”
“뭐해? 페넬로티!”
“페넬로티 영애. 대답해 주셔야죠. 김현성 백작님이 기다리시잖아요.”
“네? 네… 아… 네. 페인트 영애.”
“빨리 한 곡 추고 와!”
“…….”
“…….”
영애들에게 등을 떠밀려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내딛자 평소와 같은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손 위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 별안간 누군가가 팔을 당겨왔다.
“…….”
“…….”
‘뭐냐구….’
제니스 후작.
성큼성큼 다가온 녀석의 눈빛에 불길이 일고 있다. 이성적이지 않고, 계획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은 판단.
더 이상 진 군사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놈의 기세에 눌려 진 군사의 이름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진 군사님… 이 새끼… 이거… 왜 이래요?
-쾅! 쾅! 쾅!
-…….
-쾅! 콰드드드득! 쾅! 쾅!
-…….
-쾅! 쾅! 쾅! 쾅! 쾅! 쾅! 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