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82화
뜻밖의 데뷔(17)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이 아이나 페넬로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기사 무도회장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이름이었고, 사건이 터졌을 때 당시 자리에 있었으니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 정도야 당연하겠지만, 이 새끼가 그냥 지나치는 이름들을 잘 외우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라 할 만했다.
어찌 됐건 간에 무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머릿속에 저장해 놓은 것이다.
‘와 진짜 어렵자너. 비싼 몸이라 이거자너.’
의미부여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여전히 아이나 페넬로티는 녀석에게 스쳐 지나가는 단역이었고, 어쩌다 보니 계속 주변을 맴돌았던 캐릭터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3차 시도 만에 성공한 것도 기적에 가까웠던 셈이었다.
‘이 새끼… 은근히 냉정한 건 알고 있었는데….’
심지어 몇 번이나 고민을 하다 등장하셨다.
물론 그렇다고 녀석이 나쁜 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도와주지 않았다고 무작정 김현성을 질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래. 얘 원래 좀 싸하기는 했었자너.’
맨 처음 튜토리얼에서 만났을 때, 사람들을 모아 구조한 모습에 이 새끼가 무골호인이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이후 생각해 보면 그건 어디까지나 빵 형을 구할 수 있는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튜토리얼 던전의 기생충들에게도 별다른 호의를 베풀지 않았고, 지금껏 녀석과 함께한 것을 돌이켜보면 딱히 약자를 구하거나 힘든 이들을 도와주는 것에 큰 의미부여를 하지도 않았다.
모두를 위해 대륙을 지켜야 한다느니, 조금이라도 민간인 희생자를 줄이는 것에 집중한다느니 하지도 않는다.
결과적으로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하는 일들은 좋은 일의 범주에 들어가 있었지만 김현성은 기본적으로 바운더리 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관심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새끼… 질서선 아닐지도 몰라.’
김현성은 김명원이 아니다. 아무래도 겉모습이 주는 느낌과 따뜻한 아우라가 그런 느낌을 풍기다 보니 위와 같은 생각을 해버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전형적인 선역 주인공 재질과는 거리감이 있는 녀석이었다.
1회 차에서는 특히 더 그랬을 것이다. 최소한의 목적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던 2회 차와는 달리, 회귀자가 아닌 김현성은 대륙에서 살아간다는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
타인에게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 한 몸 간수하기도 힘들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대륙을 구한다느니, 대륙에 있는 소환자들을 하나로 묶어 그들을 보호하겠다느니 하는 거창한 목표 따위는 없다.
심지어 외신이 등장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시기. 김현성은 영웅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졌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실감하게 된다.
대륙에 새로운 사건이 생긴 이 시점에서 김현성을 담금질해야만 하는 사람이 1기영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그래… 이름 알아온 것만 해도 칭찬해 줄 만해.’
그래도 한 번 개입을 했으니 본인의 할 일을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제법 걱정스러운 듯한 얼굴.
‘은근히 신경은 쓰고 있었나 보네.’
사람은 순수한 만큼 도와주지 못했던 것도 마음에 걸렸을 테니까. 따귀를 맞고 혼자 훌쩍이고 있는 걸 외면하기는 좀 그랬겠지.
녀석의 얼굴이 왠지 모르게 편하게 보였다면 기분 탓일까.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던 것처럼 느껴졌다.
“저… 괜찮으십니까? 페넬로티 영애?”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올린 것은 당연지사. 이미 곁눈질로 놈의 상태를 확인하기는 했지만 김현성의 얼굴이 더욱더 확실하게 눈에 담겼다.
“…….”
“누….”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아!”
화들짝 놀란 페넬로티.
“아! 그러니까… 저….”
당연히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혼자 질질 짜고 있는 모습을 들켰으니 이게 딱 적당한 반응이다.
“정… 정식으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죄, 죄송해요. 이런 모습으로….”
“아닙니다. 페넬로티 영애. 오히려 허락받지 않고 접근한 제가 더욱….”
“…….”
“…….”
‘역시 이 새끼… 말솜씨 없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 같고… 제대로 위로해 주는 법도 모르는 것 같고… 그냥 신경이 쓰여서 일단 무지성으로 돌진하기는 했다만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 새끼 왜 모태솔로였는지 알 것 같자너.’
녀석이 갑작스레 손수건을 꺼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눈물 닦으라고?’
곧바로 손수건을 건네올 거라 예상했지만….
‘아니, 이 새끼….’
녀석이 손수건을 아이나 페넬로티의 입술로 가져간다.
“?”
‘뭐임?’
이 새끼 지금 뭐 하는 거임?
무자각인 거임? 아니면 암것도 모르는 영애 유혹하는 거임?
있는 순진한 척, 없는 순진한 척은 다 하더니, 사실은 1회차에서 유명한 카사노바였던 것일까.
당연히 입술에 묻어 있는 피를 닦아주기 위함이었겠지만 시바 결혼도 하지 않은 영애의 입술에 손을 댄다는 발상이 당황스럽다.
여기에 오기 전에 교육을 받았다면 이런 경솔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심지어 그것으로도 모자라 붉게 변한 뺨을 쓰다듬는다.
“?!”
‘너 이 새끼 진짜 뭐 하냐. 시바.’
잠깐 당황해서 아이나 페넬로티로서 취해야 할 행동을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지금 이 새끼를 밀어내야 할지, 아니면 도망치듯이 이 자리를 떠야 할지, 고민 아닌 고민이 든다.
결국 선택한 것은 얼굴을 붉히는 것. 이런 갑작스러운 스킨쉽에는 면역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푸욱 숙이자 아니나 다를까 깜짝 놀란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앗! 죄, 죄송합니다. 페넬로티 영애.”
“…….”
“제가 그만… 그, 그러니까 이건 간단한 치유 마법이 깃들어 있는 손수건입니다. 효과가 그리 크지 않지만 작은 상처 정도는 치료할 수 있었던 터라… 입술과 뺨 쪽이 다치신 듯하여 저도 모르게… 평소처럼… 제… 제가 모험가이다 보니….”
“…….”
“결코 페넬로티 영애를 욕보이거나 무례한 짓을 하려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물론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가 제국에서 막 넘어와 왕국연합의 예법에… 완전히 적응을….”
‘뭐래? 시바 제국에서는 영애 입술 막 만지고 그러냐고. 그딴 변명을 누가 믿어 주냐고.’
“이걸 어떻게 사과를 드려야 할지….”
‘뭘 사과해? 책임져야 된다는 소리가 먼저 나와야 되는 상황인데. 이 새끼 진짜 이렇게 멍청해서 이 험난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막말로 이쪽이 마음먹고 셋업했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약혼 엔딩이었다. 다른 영애들한테도 이러고 다니는 것일까.
“그저…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아니에요. 백작님.”
“…….”
“변명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른 의도가 없으셨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걸요.”
“네?”
“위로해 주고 싶었다는 게 느껴져서… 헤헤….”
“…….”
“상냥한 분이군요. 김현성 백작님은….”
‘야사시이 히토자너….’
“사실은 조금 무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무도회장에서 내내 무표정으로 있으신 것 같아서. 또 소환자분들은 거칠 거라는 편협한 인식도 조금은 가지고 있어서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위로를 건네주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네?”
“상냥하다거나… 그런 칭찬을 들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 그렇게 보이기는 해.’
“사실은 영애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도, 그냥 자리를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네? 그런데 어째서….”
“글쎄요. 어째서 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냥 지나치기 힘들더군요. 그저 단순한 변덕이었습니다.”
“아… 그, 그런데 울음소리를 들으셨다면….”
“네. 죄송스럽게도 전부 듣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개입하려고 했지만 폐가 될 듯하여… 그,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됩니다. 페넬로티 영애. 오늘 제가 보고 들은 것들이 결코 외부에 퍼져 나가는 일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괜, 괜히 죄송스럽고 부끄럽네요.”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영애께서 잘못하신 것이 아니니까요.”
“네… 네?”
“물론 제가 함부로 판단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페텔로티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또 영애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지는와는 관계없이… 영애께서는 할 일을 하셨던 겁니다.”
“…….”
“주변에서 영애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영애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서투른 위로를 드리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너 이 자식… 언제 봤다고 그렇게 칭찬을 해줘?’
그리고….
자꾸 그렇게 위로해 주면….
눈물이 나올 것 같자너.
페넬로티는 이런 위로가 처음이라 눈물이 줄줄 쏟아질 수밖에 없자너.
그렇지 않아도 억지로 흘러나오려고 하는 눈물을 참아내고 있었던 타이밍이었다. 갑작스럽게 김현성 백작이 등장하는 바람에 이를 악물고 체면을 차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녀석이 손수건으로 입술과 볼을 닦아줬다고 한들, 어떻게 방금의 그 슬픔이 가실 수 있었겠는가. 울면 안 된다고, 이런 추태를 다시 또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다.
“어….”
“…….”
“어라?”
‘어라? 한 번 들어가 줘야 되자너.’
“울…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 헤… 헤헤….”
“…….”
“잠… 잠깐만요. 백작님. 잠… 잠깐… 왜… 갑자기… 저… 정말로 울지 않으려고….”
입은 웃고 있다. 하지만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한 손으로 살짝 눈물을 훔쳤지만 한 손으로 닦아지지가 않는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슬픔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페넬로티. 그동안 받아왔던 슬픔을 한 큐에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결국에는 느슨했던 입꼬리조차 살짝 일그러진다.
분명히 꼴불견처럼 보이겠지. 그냥 위로 차원에서 건넨 한마디에 이렇게 동요하고 엉엉 울어버리다니.
살짝 무리수가 아닌가 생각하기는 했지만 원래 가끔은 무리한 수를 둬도 상관이 없는 법이다.
계속해서 떨리는 어깨, 수도꼭지라도 틀어놓은 것마냥 멈추지 않는 눈물.
‘이 새끼야. 빨리 위로 안 해줘?’
“저… 페, 페넬로티 영애?”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백작님. 흐… 흐윽… 갑… 갑자기…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
“…….”
‘아 이 새끼… 이거 딱 봐도 안아줘야 되는 타이밍 아니냐구.’
뭘 걱정하고 있는 건지는 알겠는데 이미 입술이랑 볼따구랑 전부 다 만지작거렸으면서 뭘 포옹 한 번 가지고 이렇게 고민하는 건지.
너 현대인이자너. 드라마는 많이 봤을 거 아니야. 시바 아이나 페넬로티는 진정 될 때까지 절대 울음을 멈추지 않아요. 정원이 떠나가도록 엉엉 우는 꼴 보기 싫으면 빨리 위로해 줘야 돼.
당황하고 있는 김현성 백작.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침내 페넬로티를 안아주기까지.
물론 이걸 포옹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슴을 빌려준 것도 아니고 꽉 안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액션을 취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목적을 완수한 아이나 페넬로티의 어깨가 점차 잠잠해지기 시작한다.
“저… 죄송합니다. 김현성 백작님.”
“아닙니다. 페넬로티 영애. 오히려 제가 더….”
‘첫 만남 괜찮아.’
체스 따위로 이어진 인연보다 훨씬 더 분위기 있는 첫 만남이다.
‘인사도. 인사도 해야지. 자기소개는 국룰이니까.’
살짝 떨어진 몸, 이제야 분위기가 살짝 정리됐다는 것을 깨달은 김현성은 약하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한번 이쪽을 바라본다. 녀석은 여전히 아이나 페넬로티를 바라보고 있는 중, 그에 페넬로티는 살짝 눈물을 닦으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네요.”
살짝 드레스의 끝자락을 잡아 들고 몸을 숙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현성 백작님. 페넬로티가 자작가의 3녀, 아이나 페넬로티라고 합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녀석 역시 어색하게나마 배운 예법으로 가슴에 손을 대고 고개를 살짝 숙인다.
“제국에서 온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야밤의 정원에서 만난 남녀 한 쌍.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는, 각자의 뜻을 가지고 있는 그들을 비추고 있는 것은 선선한 달빛과 별빛이다.
달과 별 사이에 페넬로티와 김현성이 서있다.
‘와 이게 진짜 근본이자너.’
근본 있는 첫 만남.
한겨울도 한여름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은 근본력.
고레와 한여름 밤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