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81화
뜻밖의 데뷔(16)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백이 느껴졌다면 기분 탓일까.
상사에게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상사의 따귀를 갈긴다는 발상이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벨리에가 옳은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합리적이고 간단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큰 흐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페넬로티 세계관에 한 획을 그었다 봐도 무방했다.
‘얘가 은근히 욕심이 있어 시바.’
그런 의미에서 알프스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인정받고 싶다는 벨리에 나름의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이건 더 이상 자신을 병아리로만 보지 말아 달라는 무언의 시위, 누가 시바 제정신으로 희생과 부활의 성자의 따귀를 때릴 수 있겠는가.
선희영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가 이 결단을 내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분명 내가 무언의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전까지 벨리에의 눈과 손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에게 올 페널티를, 이 사건 이후 선희영과 함께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본인의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장하다. 시바. 네가 장해. 그래. 그런 패기가 있어야 이 고이고 고인 길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거야.’
문제가 있다면 시바 생각보다 너무 아팠다는 것.
지 딴에는 힘 조절을 한다고 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린 몸이 휘청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초 근접전투직군으로 파란에 들어왔으니 신체 능력으로만 따지면 대륙 내 탑티어라고 봐도 무방하다.
장담하건대 진심으로 따귀를 때렸다면 입술만 터진 게 아니라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아니, 이미 목이 돌아가 뒈졌을 게 분명했다.
‘시바 그만하자고 할까. 쟤 손 의외로 매운데….’
본래 이런 종류의 플레이를 할 때는 세이프 워드를 정하는 게 국룰이었지만 이제 막 이 세계에 발을 들인 벨리에가 그것까지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일까.
슬쩍 피하고 싶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막내 길드원의 용기와 결단을 무시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참… 아직은 어설프자너.’
본인도 본인이 뭘 하고 있는 줄 모를 테니 그럴 만도 했지만 지금 당장 여기에서 강의 아닌 강의를 해주기에는 때와 상황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 이미 무대 위에 발을 내디뎠으니 여기서는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메시지를 보내도 되고 이쪽에서 임의로 세이프 워드를 자연스럽게 내뱉어도 될 것이다.
선희영이라고 말하면 지도 알아서 알아듣겠지. 아니, 알아서 제정신을 차릴 것이다. 근데 너….
‘살짝… 겁먹은 것 같은데? 아니지?’
“…….”
‘알프스 때문이구나. 방금 한마디 들었다고 바로 꼬리 내린 거야?’
눈빛에서 알 수 없는 흥분과 불안감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니야 겁먹지 않아도 돼. 나 이런 거 좋아해.’
집중력 떨어지고 있는 거 아니지? 그렇지?
여기까지 왔는데 무르는 거 아니지?
한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거 네가 잘 알고 있지?
여기서 도망치면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알지?
‘내빼려고? 진짜?’
이미 한 대 맞은 게 아까워서라도 이 분위기를 그대로 끌고 가야 했다. 원래 파트너의 자율성을 존중하지만 카리나 페넬로티가 겁을 먹고 병아리 벨리에로 돌아오려고 하는 듯하니 여기서는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게 정답이라는 판단이 선다.
카리나의 말처럼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붉어진 뺨을 부여잡고 그녀를 올려다본 것은 당연지사. 혼란스러움과 서러움 한 스푼, 자신을 때린 언니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을 또 한 스푼.
하지만 그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이 온갖 불쾌한 감정을 지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카리나 페넬로티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었다.
“저는… 저는 잘못한 거 없어요.”
이제 모든 것은 카리나 페넬로티에게 달려 있다. 그녀가 분위기를 이어나가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모양, 아이나 페넬로티의 표정에서 숨겨져 있는 뜻을 발견한 것일까.
그 사랑과 존경을 결국에는 읽어내고야 만 것일까. 곧바로 손을 치켜드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짜악!
하는 찰진 소리가 다시 튀어나온다.
‘힘 조절 성공했구나!’
첫 타와는 다르게 아프지 않다. 부어오르지도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기는 했지만 상냥함이 느껴지는 울림이었다. 피도 나지 않고, 입술도 터지지 않았다. 얼굴이 빨갛게 변하기야 하겠지만 부어오를 것 같지도 않다. 시바 현묘한 손놀림이었다. 이건 재능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말대꾸를 하게 되었니. 아이나.”
짜악!
“내가 말하고 있잖아. 아이나.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니?”
짜악!
“들려오는 소문이 참으로 터무니없더구나. 아니,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지. 페넬로티의 이름으로 키워주고, 길러주었더니 감히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해? 장하구나. 아이나 정말로 장해. 돼지처럼 얻어먹는 것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사람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언… 어니… 저… 저는….”
“누가 말해도 된다고 했지? 아이나 페넬로티.”
짜악!
“페넬로티 가문에 속해 있는 한, 나는 언제까지나 네 언니란다. 페넬로티. 그리고 널 교육하는 건 언니로서 주어진 권리와 의무지.”
‘텐션 좋다. 벨리에야. 지금처럼만 해라. 딱 지금처럼 만 가자.’
저저 알프스 저거 시바 굳어가지고 아무것도 못 하는 것 좀 봐.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물론 알프스의 심정도 이해가 가기야 한다.
‘벨리에 쟤는 천재자너.’
이미 상황이 이렇게까지 치달았는데 어떻게 갓반인이 이런 상황에서 치고 나올 수 있겠는가.
흔들리는 눈빛,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 듯한 표정,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지, 도대체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벨리에에게 집중하느라 알프스를 제대로 캐치할 수 없었지만 벨리에보다도 더 도망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녀였을 것이다.
“본, 본때를 보여주렴… 카리나.”
라든지.
“그… 그런데 조금 심하지 않니? 카리나?”
캐릭터의 일관성조차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라리 없는 게 더 나을 지경.
본인도 한번 불링을 해주는 게 좋다는 생각이 닿았는지 어색하게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이후에 손을 올렸지만, 그것마저도 벨리에에게 밀리며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결국에는 다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방관자의 포지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끼어들고 싶어 하는 건 같은데 전혀 끼어들지 못하고 있다.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게 된 것이다.
‘쟤는 안 되겠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정답이야.’
벨리에가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자연스럽게 알프스에게 포지션을 배정해 줄 수 있었겠지만 그녀에게도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 아쉬운데….’
더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아쉬운 것일까.
‘조금 더 매도해 줘도 되는데….’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조금 더 상스럽게 표현해도 되자너….’
그건 캐릭터랑 너무 안 맞는다고 판단한 것일까. 여전히 비슷한 패턴으로 이쪽을 압박하는 것은 살짝 아쉽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다채로움이다.
‘따귀랑 말대꾸하지 말라는 말밖에 못 하자너. 지루하다구… 갤러리가 지루해한다고! 이 정도 텐션으로는 현성이 소환 실패라고!’
“너는 내 말만 들으면 돼. 아이나. 내가 하라는 대로 하고,”
‘이게 한계인 걸까?’
지금까지 잘해줬지만 여기가 그녀의 종점역인 걸까. 그녀 스스로도 답답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뭔가 조금 더 해야 될 것 같은데, 조금 더 보여줘야 될 것 같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해하는 모습이다.
‘이거 불안한데….’
보통 사고는 이럴 때 터진다. 아니나 다를까 번쩍 들어 올린 손에 핏줄이 선 것이 보이는 상황, 더욱더 강도를 높이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보였다.
벨리에에게 조금 더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선… 선희영 님이 계셨다면….”
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나오면 안 될 것 같은 단어의 등장에 눈이 커다랗게 변한 병아리들,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알프스와,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 벨리에.
하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 시작한다. 선희영의 이름이 세이프 워드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아예 정신이 없는 알프스와는 다르게 그래도 벨리에에게는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는 게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걸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멈칫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서도 없이 등장한 세이프 워드였지만 페넬로티 세계관에서 그 이름 석 자에 얽힌 사연이 있는 것마냥 행동하는 모습, 치켜올린 손을 조용히 내리며….
“돌아가죠.”
“어? 어? 카… 카리나? 아이나는….”
“이 정도면 교훈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나.”
“…….”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네게는 들리지 않겠지. 그저 네가 페넬로티의 사람이라는 걸 항상 명심하려무나.”
“…….”
‘분한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괜찮았어. 힘내. 완벽하지는 않았는데 적어도 가능성은 보여줬어. 패기가 마음에 들어 패기가.’
오늘 훌륭했어. 수고했다고 꽉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흐뭇한 미소로 후배의 등을 바라봐 줄 수밖에 없는 상황, 불현듯 깨달은 것은….
‘나 시바 그러고 보니 왜 맞고 있었지?’
김현성 소환에 실패했다는 사실이었다.
“…….”
‘아니….’
“…….”
‘아니… 시바.’
벨리에에게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지만 정원에 홀로 남겨졌다고 생각하자 당황스러움이 먼저 차오른다.
당연히 녀석이 등장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솔직히 신경도 쓰지 않았다.
“…….”
“…….”
‘설마… 이 새끼… 이거… 아까도 안 나오고… 지금도 안 나오고… 생각보다 정의롭지 않은 건가?’
보통 선의의 중재자는 이런 거 중재 안 해주나?
억지로 귀를 막지 않은 이상에야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약간의 관심이라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김현성이 찾아와 벨리에를 말려주지 않았다는 게 황당하다.
물론 벨리에의 리딩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내가 아는 김현성이었다면 나타났어도 진즉에 나타났어야 했다.
‘가족들의 일이라고 생각한 건가?’
생각해 보면 분위기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지.
어디까지나 가문의 일인 만큼,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도 있고, 괜한 적을 만들 수도 있으니까. 알프스마냥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무대 위로 몸을 옮기기에는 조금 부끄러웠던 것이다.
망원경으로 시야를 위로 올리자 아니나 다를까 아직까지 정원을 떠나지 못하는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슬그머니 바닥에 쪼그려 앉은 것은 당연지사. 방금 일어났던 사건의 여파에 슬픔을 감추지 못한 아이나 페넬로티가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 시작한다.
“흐… 흐윽….”
자연스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건 외면 못 하겠지? 이건 외면하면 안 돼.’
와서 손수건이라도 빌려줘야지. 이걸 그냥 무시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선 넘었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고개를 푹 숙이며 주변을 둘러보자 불편해졌는지 자리를 옮기려고 하는 김현성이 보인다.
조금만 더 구슬프게 울어야겠다는 판단이 서 처연한 눈물을 계속해서 흘리고 있었을 때. 눈을 꽉 감은 김현성은 견디기 힘들다는 듯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중.
‘그래. 그거자너. 그거자너.’
그리고 이윽고,
“괜찮으십니까. 페넬로티 영애?”
‘내 이름…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었냐구….’
기다리고 기다렸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