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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76화 (1,37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6화

뜻밖의 데뷔(11)

“페, 페넬로티 영애. 정말인가요? 정말… 밤…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누셨다고요?!”

“아니요. 밤이 새도록 대화를 나눈 건 아니에요. 제니스 후작님께서 즐겨 하시는 게임을 같이 한 것뿐이라… 게임이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거든요.”

“그게 그거 아닌가요? 이럴 수가… 너무 늦은 시간까지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는 했는데… 정말로 밤을 지새우셨다고요?”

“…….”

“…….”

페인트 영애의 질문에 브러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그거 너무 야한 거 아닌가요? 페넬로티 영애? 미… 미쳤어. 미쳤다고… 어, 어떻게 밤새도록 대화를 할 수가 있는 건가요.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가요?! 남… 남사스러워라. 남사스럽다고요! 혁명적으로 남사스럽다고요! 저희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어른의 계단에 오르신 건가요! 제니스 후작부인은!”

‘도대체 어떤 부분이 어떻게 야한 건데? 뭐가 어른의 계단인 건데.’

“좋아할 일이 아니에요. 브러쉬 영애. 하아… 페넬로티 영애는… 도대체….”

“…….”

“제니스 후작님께서는 몇 시에 살롱을 나가신 건가요?”

“오, 오전 다섯 시 즈음에 나가셨어요.”

“후우… 다른 분들에게 들키지는 않았겠네요. 페넬로티 영애. 영애가 순진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물론 저는 영애와 제니스 후작님의 만남을 응원 드리고 싶은 입장이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에요. 아무리 살롱에 저희들이 함께 있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만약 오늘 일이 알려진다면 분명히 추문이 일 거예요. 혹시 페넬로티 영애를 시기할지도 모르는 다른 분들은 쓸데없는 소문을 확대하고 재생산할 거고요.”

“아….”

“제니스 후작님이 명예를 알고,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계신다면 오늘 일을 불문에 부치시겠죠. 혹시 추문이 일더라도 분명히 수습해 주실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후우… 제가 깨어 있었어야 했는데… 모두가 제 잘못이네요.”

‘페인트야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잘못은 제니스 후작이 한 거지. 뭐.

아직 사교계에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영애가 아무리 같이 놀자고 붙잡는다 하더라도 상식이 있다면 거절하는 것이 옳은 행동이다. 특히나 페넬로티 영애 같은 순진한 영애의 경우에는 더욱더 말이다.

중심을 잡아주지는 못할망정 지가 더욱더 신나 밤새도록 게임을 하도록 종용했으니 지탄을 받아야 함이 옳다.

파스텔 영애도 그런 제니스 후작의 행보에 불만이 있는지 표정을 찡그리며 말을 이어왔다.

“저. 페넬로티… 나는 그 사람 마음에 안 들어.”

“네?”

“뭔가 사람이 꺼림칙하다고 해야 하나… 굳이 11시에 찾아온 것만 봐도 그래. 혹시 딴마음 품고 온 건 아니야? 우리 예쁜 페넬로티를 어떻게든 손에 넣어보려고 기를 쓰고 있는 것 같다니까. 오늘 일부러 여기서 밤을 지새운 것도 분명히 다 계획한 걸 거야. 페넬로티 영애가 더 유명해질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추문을 이용해서 기정사실화시키고 싶은 거라고!”

“그, 그런가요. 하지만 제니스 후작님은… 분명히 오늘 일을 비밀로 해주시겠다고 하신걸요.”

“전부 다! 거짓말이라고! 분명히 다른 생각이 있을 거야!”

“너무 흥분하지 마세요. 파스텔 영애. 제니스 후작님은 분명 명예를 아시는 분일 테니까요.”

혼자서만 의심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 것이 보였지만, 그런 그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제니스 후작의 호감도는 하늘을 꿰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새 있었던 대화를 조금 풀어주자 여론이 좋은 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또… 또 무슨 말씀을 들었나요?”

“그냥… 지루하지 않았다고… 즐거웠다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미… 미친!”

“와….”

“정… 정… 정말인가요? 실제로 그런 말을 듣는 게 가능한 건가요?”

“네. 분명히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페넬로티 영애는 어땠는데요?”

“네? 저는….”

“네.”

“사실은 저… 저도… 즐… 즐거웠던 것 같아요.”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 미쳤어요! 미쳤다고요! 미친! 미친!”

“정말… 실제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군요. 정말로… 정말로 브러쉬 영애의 말처럼… 페넬로티 영애는 어른이 되신 거군요. 말로만 들었었는데… 정말로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운명의 짝을 만나는 경우도 있는 거군요.”

“잠깐 모두들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니까! 다들 그렇게 몰아가지 마! 데뷔탕트 무도회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인데… 벌써부터… 운명의 짝이라느니 그런 소리 하면서 페넬로티를 흔들지 말라고!”

“제니스 후작이라면 나쁘지 않아요. 물론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이런 기회가 흔하게 오지는 않을 거라고요. 파스텔 영애도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어제 무도회장에서 본 신사분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디 제니스 후작 같은 인물이 있었는지.”

“그렇지만 너무 이른 결정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 막 한 사람 만났을 뿐이고… 벌써 결정하는 건 조금 이르지 않아?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옳고 그른 걸 판단할 수 있지? 그렇지 페넬로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시가렛트 영애가 파스텔의 말에 답했다.

“물론 파스텔 영애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으, 응….”

“우리 흑장미 살롱에게 다른 분들을 알아볼 수 있을 기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얘는 오랜만에 대사 치면서 왜 이렇게 표정이 염세적이야.’

“페인트 영애의 말대로 제니스 후작님이라면 조건도 외모도, 능력도, 매너도 모두 합격점에 있으신 분입니다. 괜히 다른 분들을 알아가려는 시도를 하려다… 시기를 놓치게 된다면… 늙은 귀족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게 될 겁니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파스텔 영애가 페넬로티 영애의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 아니라면…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책… 책임질 수 있는데….”

개미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파스텔 영애도 파스텔 영애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얘네들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연초만 찾는 팔레트 영애가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 왜 이렇게 꿈도 희망도 없니. 그런 자세로 시바 이 험한 무도회장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처리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꿈과 희망을 키워나갈 시기에 너무 염세적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페인트와 브러쉬도 살짝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팔레트의 경우에는 그런 모습이 조금 더 두드러진다.

아무래도 그녀의 가문이 다른 영애들의 가문보다 더 보수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 없이 정략혼으로 팔려가듯이 시집가는 영애의 삶에 근본적인 회의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아무리 그래도 그러면 안 돼. 시바 주체적으로 움직여야지.’

“그러니… 그냥 좋을 기회가 왔을 때 잡으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페넬로티 영애. 친구로서 진심으로 해드리고 싶은 조언입니다. 제니스 후작, 잡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

“…….”

“그…럼… 어떻게 할 거야. 페넬로티.”

“저는….”

“…….”

“역시… 다른 분들과도 만나보고 싶어요.”

“…….”

“어째서입니까?”

“그냥….”

“…….”

“그냥 그러고 싶어서요.”

“…….”

“모든 게 전부 새로운 경험이잖아요. 어제 제니스 후작님과 대화하면서 정말로 즐거웠어요. 저는 그런 게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더욱더 이런 경험들을 많이 가지고 가고 싶어요.”

“하지만 페넬로티 영애.”

“물론 파렛트 영애가 무슨 뜻으로 그런 조언을 해주셨는지는 이해가 가요. 어떤 부분을 걱정해 주시는 지도 알겠고요. 하지만… 지금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요. 조금 더 여기에서 머물면서, 여러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고, 다른 분들도 모두 알아보고 싶어요. 데뷔탕트 무도회는 길잖아요?”

“아….”

“…….”

“…….”

괜스레 조용해지는 살롱이 눈에 들어왔다.

파스텔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페인트와 브러쉬는 이쪽의 선택을 존중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진심 어린 조언을 던진 팔레트 영애는 살짝 못마땅한 눈치이기는 했지만 무언가 고민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멍청한 페넬로티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응원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은 멍한 얼굴을 선보이기도 했는데, 아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복기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후회할 겁니다. 페넬로티 영애.”

“그래도 상관없어요. 그것도 제 선택인걸요.”

“어차피 저희는 무, 무도회에 제대로 나갈 수도 없습니다. 살롱에 제대로 된 손님들도 모실 수 없을 거고….”

‘그런 아니야. 우리 어제부로 떡상했다니까.’

타이밍 좋게 사용인들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영애님들~ 오늘 스케줄을 상의하고 싶은데 잠깐 시간 되시나요?”

‘봐.’

“상의할 게 있나요? 어차피 뻔할 텐데요.”

“아니요~ 살롱에 방문 신청을 해주신 분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걸요?”

“네? 그게 정말인가요?”

‘그럼 정말이겠지.’

“네. 오전 스케줄부터 방문 신청이 계속 쌓이고 있어서… 브런치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신 분들이 무려 16팀이에요. 어서 초대장을 확인하시고 최대한 빠르게 답장을 해주셔야 해요~”

“저희가 선택하는 건가요?”

“네.”

“정말… 저희가 선택해도 되는 건가요?!”

“네. 이럴 시간이 없다니까요. 영애님들. 빨리 신사분들에게 의사를 전달해야만….”

‘이게 당연한 결과자너.’

시작은 아마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무도회장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페넬로티 영애를 한 번 즈음은 미리 견식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제니스 후작이 관심을 보이기까지 했으니, 아마 미래의 후작부인을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는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냥 누군가 페넬로티 영애를 데리고 간다고 생각하니 안달이 났을지도 모른다.

제니스 후작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필시 보통 영애가 아니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뭐 이유야 많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흑장미 살롱의 평가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라는 것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페인트가 시야에 비쳐왔다. 혁명적인 브러쉬 영애와 함께 오늘 스케줄을 조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오늘 스케줄을 어떻게 소화함에 따라 살롱의 향후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살롱 안을 다시 재단장하고, 만나기로 한 영식들에게는 초대장을, 만나볼 필요가 없는 놈들에게는 정중한 거절의 편지를 쓰고 있는 와중, 시가렛트 영애만이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이 바람을 불러온 게 페넬로티 영애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으니 더욱더 당황스러운 거겠지.

아이나 페넬로티는 조금 어수룩하기는 했지만…

‘자기답자너.’

언뜻 보면 자신감이 없고 어눌하기는 했지만… 자기의 본 모습을 진심으로 보여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하는 사람이었고 불확실한 미래에 겁먹기보다는 당장 눈앞에 있는 것에 더 집중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아이나 페넬로티의 방식이 옳았나 틀렸나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었고, 앞으로도 행복할 거라는 사실 하나뿐이다.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주먹을 꽉 쥔 팔레트 영애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영식들과의 만남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한 귀족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 팔레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네이션트 남작님?”

“부르셨습니까? 팔레트 영애.”

“괜찮으시다면 잠깐 산책이라도 나가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식전에 같이 한 대 태우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렇죠. 식전에 피는 연초가 또… 같이… 한 대… 넷? 네넷?”

“라이오스에서만 재배되는 잎으로 만든 특별한 연초가 있습니다. 아마 남작님 마음에도 드실 겁니다.”

그 말에 경악하며 입을 커다랗게 벌리는 페인트 영애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어. 우리 살롱은 어차피 배경으로는 못 비비니까. 차라리 저런 게 먹힐 수도 있다니까.’

도박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녀의 선택이 틀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정상적인 매물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당당한 여자를 싫어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발코니 밑에서 보이는 팔레트 영애는 네이션트 남작, 그리고 남작을 따라 나간 몇몇 놈들과 함께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연초를 주제로 한 대화가 썩 즐거운지,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우리는 개성 있고, 스페셜하고, 위험하고, 유니크한 매력으로 가야 돼. 그래야 경쟁력이 있을 거야.’

심지어 팔레트 영애의 모습을 본 다른 영애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따로 회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흑장미 살롱의 방향성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데뷔탕트가 무도회가 떠들썩해졌다는 것은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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