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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74화 (1,37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4화

뜻밖의 데뷔(9)

진 군사는 이 새끼는 이기영에게 통수를 맞기 전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라이오스에서 진 군사가 내게 관심을 가졌던 이유 역시, 자신과 동류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짜고짜 병신 같은 게임을 들이밀었던 것도, 손가락을 걸고 내기를 하자고 했던 것도 모두가 이기영이 자신과 동류일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기영이 맛을 보지 못했던 1군사의 경우에는 당연히 더 오랜 시간 동안 동류를 찾아 헤맸을 가능성이 높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제니스 후작이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하기야 했다.

물론 그 관심은 남녀 간의 애정과는 거리가 멀었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이 새끼는….

‘이 새끼가 누군가를 좋아하기는 해봤겠어?’

네가 시바 불처럼 뜨거운 사랑을 해봤냐고.

진 군사 이 새끼는 낭만파 지혜 누나와는 달리 호르몬으로 인한 화학작용에 몸을 던지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남녀상열지사와 가장 먼 사람을 한 사람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언하건대 주저하지 않고 이 새끼에게 표를 던지지 않을까.

본래 우리 같은 인간이 다들 그렇기는 했지만 나르시시스트 속성까지 추가된 진 군사는 자신 외에는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그래서 더욱더 의심스럽다.

이 새끼의 눈에서 은은한 애정이 묻어나오는 것이 말이다.

물론 답이야 뻔했다.

‘시바 연기 한번 잘하자너.’

머릿속에서 계산 아닌 계산이 끝난 것은 순식간, 어째서 진 군사가 알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는지, 어째서 이런 야심한 시각에 방문해 소녀 마음에 불을 지르려고 하는지 역시 뻔했다.

‘낚으려고 하는 거구나?’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이성이 아닌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인간에 대해 흥미가 인 것이다. 단순히 흥미뿐만이 아니라 소유욕으로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과 동류일지도 모르는 저 물건을 가지고 싶다는 저열한 욕구였다. 아마 놈이 정하얀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겠지.

그때와는 좀 상황과 종류가 달랐지만 말이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시바. 이 새끼는 용서가 안 되자너.’

순진한 영애 꿰서 제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 거자너. 무조건이자너.

일단 알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거절할 수 없어 받기는 했지만 단순히 살롱의 방문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과하다.

심지어 옷도 갈아입고 오셨다. 다짜고짜 찾아와 남은 체스를 두고 떠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꽤 본격적이다.

물론 영애의 살롱을 찾을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범규를 따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제니스 후작의 얼굴에는 친절과 애정이 자리해 있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시바. 이런 새끼가 뭐 첫눈에 반하고 그런 게 있겠냐고. 다 연기지. 시바.’

하지만 영애들은 이런 판타지 같은 사랑을 믿는다. 제니스 후작에 눈에서 묻어나오는 감정을 확인한 영애들은 지들끼리 손을 꼭 붙잡고 다 들리는 귓속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미… 미쳤어요. 미쳤다구요. 눈빛 보셨어요? 보셨냐고요. 목걸이는 또 어떻고요. 아무렴 살롱의 첫 방문이라고 하기는 하지만 선물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요? 저… 이런 일은 한 번도 못 봤어요. 이건 청혼인 건가요? 혁명적인 청혼인 걸까요?”

“진… 진짜 제니스 후작부인되는 거야? 페넬로티가… 벌써? 아직 좀 이르지 않아? 페… 페넬로티가… 이대로 가버리는 거야?”

“후우… 제니스 후작이 푹 빠지신 것 같네요. 하기사 제가 봐도 페넬로티 영애는 아름다우니….”

“저 진짜로 죄송합니다. 페인트 영애. 근데 저… 진짜 마지막으로 연초 한 대만….”

‘아 진짜 연초 빌런….’

“쉬잇!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앉으세요.”

‘암만 그래도 너무 쳐다보는 거 아니냐고.’

시대상 남녀를 단둘이 둘 수 없다. 살롱 안에서 사용인이나 혈육들이 대기하고 있을 수 없으니, 영애들은 방해가 되지 않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떨어져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말로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이 모여서 앉아 있는 소파와 나와 진 군사가 앉아 있는 테이블은 거리가 꽤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눈빛이나 대화를 들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진짜 왕국 연합 귀족들은 연애는 어떻게 하냐.’

친구들이어서 망정이지 부모님이 저 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제정신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게 일반적인 상황이다. 4영애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고, 진 군사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신경을 쓰는 쪽이 더 바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미 자기소개를 한차례 끝난 상황, 녀석이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몸을 앉혔다.

“일단 이렇게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 아니에요. 이렇게 살롱을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인걸요.”

“…….”

“그런데 역시 찾아주신 이유는… 일전에 두셨던 게임… 때문인가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습니다만….”

“네?”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닙니다.”

싱긋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본인이 좀 생겼다는 건 알고 있는 새끼가 보낼 수 있는 미소였다.

누가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영애를 꼬시기 위한 악마의 미소다. 지 얼굴과 능력이 영애들에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새끼의 미소였다.

‘내가 시바 이럴 줄 알았자너.’

“앗!”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플러팅, 설정상 아이나 페넬로티는 이런 관계에는 무지하다.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이들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더욱더 당황스럽다.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는 타이밍. 당황스러운 얼굴을 숨기기 위함이었지만 붉게 물든 귀까지 숨길 수 있을 리 만무, 아마 1군사 이 새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페넬로티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 않을까.

분명 페넬로티 영애의 붉어진 귀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아… 그러니까… 저… 저… 저….”

“그렇게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영애에게 부담을 드리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니니까요.”

“…….”

“데뷔탕트 무도회는 깁니다.”

“네? 아… 네… 길… 길죠….”

“많은 분들과 대화를 해보시고 조금 더 페넬로티 영애 자신에 대해서 알아갈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으… 저, 그, 그런 건 잘….”

“다만 언젠가 영애가 결정을 내릴 때… 제가 영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감 지리네. 뭐 아무나 만나서 춤춰도 네가 다 이길 수 있다는 거냐고.’

너무 재수 없자너 이 새끼.

“한데… 체스는 언제부터….”

“아… 어릴 때부터… 두기 시작했어요.”

“혹시 따로 배우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저… 그럴 기회가 없어서… 그냥 기보를 보고 배웠거든요.”

“혼자서 말입니까?”

“네. 처음에는 가문의 사용인들이 가끔 함께하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서… 정확히 말씀드리면 체스의 시작과 끝이라는 책을 보고 공부했거든요. 혹시 알고 계신가요?”

“물론입니다. 입문하기에 좋은 서적이죠. 그 책의 저자인 세이트리스 자작과 게임을 한 적도 있습니다.”

“아!!!! 정말인가요! 저 그분의 팬이에요!”

“하하하. 그렇습니까?”

그렇게 이야기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제니스 후작이 생각보다 더 진지하게 선자리 아닌 선자리에 임했던 터라 분위기가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조금은 낯간지러운 질문도 오고 갔을 정도, 이를테면….

“아… 저, 그… 그건…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저… 사실 가족이 많았으면… 좋겠어서… 아이는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힘이 닿는 데까지….”

“그렇습니까?”

같은 가족계획 말이다. 아무래도 단순한 연애가 아닌 정략결혼을 목적으로 한 만남이니만큼 이런 질문은 통과의례 같은 느낌이었다.

자녀계획은 중대사인 만큼 자리에 맞지 않은 질문이라고도 볼 수 없다. 그냥 평범한 이성과 이성의 만남이었다면 녀석도 저런 걸 던지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시대 배경상, 이후에 대한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나는 당신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그리고 있다는 표현이라는 거다.

제니스 후작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아이나 페넬로티가 제니스 후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제니스 후작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인지, 같은 질문들은 기본이다. 물론 아무리 선 자리라고는 하지만 진도가 빠르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녀석의 화술이 이런 당황스러운 질문들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해줬기 때문에 어린 영애의 입장에서도 부담 갖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을 정도, 이 새끼는 커뮤니케이션 장애가 있는 게 아니라 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물론 모든 질문에 답할 수는 없다.

‘너무 능력 있으면 또 이상할 테니까.’

“죄, 죄송해요. 사실 제니스 후작가 같은 명망 높은 가문에 시집간다는 것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그… 그리고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제가 공부가 부족해서… 제니스 후작가에 대해서도 잘… 정말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영애. 제가 드리는 질문은 영애가 가지고 있는 교양이나 기품, 지성, 능력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요. 단지 제가 영애와의 만남을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너 이 새끼. 진짜 빠꾸 없구나.’

이렇게 낚은 다음에, 네가 공화국 군사라는 거 밝히고 시바, 사랑을 인질로 잡고 걍 전술, 행정 노예로 쓰려는 거지? 그렇지?

이 새끼의 모든 행동이 가문 안에 갇혀 있었던 순진한 영애를 꼬시기 위한 행동이었으니 어떻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청의 진짜 모습을 알고 있는 만큼 이 새끼의 모든 연기가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물론 그 와중에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여기까지 찾아온 진짜 목적 말이다.

“어떻습니까. 슬슬… 아까의 게임을….”

“아… 그렇죠. 그, 그런데 어떻게 하죠. 저 사실… 기보를… 잃어버려서… 원래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제가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후… 별 의미는 없겠군요.”

‘그렇지. 식었지?’

아이나 페넬로티는 이미 지나간 게임에 흥미를 느끼고 있지 않다. 사실 체스를 둘 여유조차도 없다. 기보를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오히려 자신과의 만남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는 걸 인지한 재수 없는 제니스 후작의 입꼬리가 느슨해진다. 이 만남을 조금 더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듯한 얼굴.

녀석이 둘 모두를 만족할 수 있는 패를 꺼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허면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준비한 게임을 같이 즐겨보시는 건.”

“이건….”

“단순한 놀이입니다. 체스나 장기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할 겁니다. 물론 그것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만… 페넬로티 영애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금 더 설명을….”

“아니요. 대충 알 것 같아요.”

아이나 페넬로티 반전매력 발사.

냉철 모드.

천재 모먼트.

“네?”

“대충은 이해했어요. 보드도 실제 지형을 그대로 가져왔고… 장기말들의 구성도 재미있네요. 보급이 필요하다는 것도 흥미롭고요. 왕을 먼저 잡는 쪽이 이기는 건가요?”

“네.”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 제가 알아야 할 특수한 룰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눈빛이 달라졌자너.’

순진하고 어리숙한 것 같았던… 미래의 자녀계획에 대해 얼굴을 붉히던 아이나 페넬로티의 모습은 없다.

제니스 후작의 시야에 비친 것은 예의 무도회장에서 봤던 그 괴물일 것이다.

상대방의 목을 물어뜯고, 사냥감을 농락하고 죽이던 예의 그 괴물, 어쩌면 이게 아이나 페넬로티 속에 숨겨진 진짜 본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이건 페넬로티 영애가 모르는 자신의 기벽이자 성향일 것이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보드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 라이오스 때는 룰도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은 고인물에게 쳐 발리기는 했지만 아이나 페넬로티는 그때의 이기영이 아니다.

‘이제는 무려 룰도 알고 있다고… 할 만하다고.’

게다가.

-진 군사님. 헬프!

-…….

-진 군사님 도와줘요.

-웃…기지 마라.

-한 번만 도와줘요. 자신과 자신의 싸움이에요. 어디 가서 이런 싸움 못 하는데. 가슴이 웅장해지지 않아요?

-매번 개 같은 짓거리를 하는군. 이번 작전은 따로 진행할 테니. 그리 알도록.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더 이상 네놈의 그 더럽고 유치한 수작에 놀아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이쪽은 이쪽대로 결과물을 가지고 올 테니 네놈도 네놈대로 결과물을 가지고 오란 말이다. 이상이다.

-뭐 갑자기….

곧바로 끊겨 버린 통신.

‘와 이 새끼….’

“…….”

“…….”

네가 진짜 시바 기영이 미치는 꼴을 보고 싶구나.

‘핸들이 고장 난 페넬로티 영애를 보고 싶은 거지?’

그걸 원하고 있는 거지?

보드를 세팅하며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 제니스 후작, 1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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