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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73화 (1,37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73화

뜻밖의 데뷔(8)

-아니, 왜 그렇게 화가 났어요?

-이번에는 또 무슨 개짓거리를 할 생각이냐. 이기영.

-아니, 개짓거리라뇨? 저는 제 할 일 하고 있을 뿐인데….

-뻔뻔한 개자식… 웃기지 마라! 네놈 분명히….

-제가 뭘요? 제가 뭘 했는데요?

-…….

-내기 체스라는 말에 접근한 것도 1군사고, 나한테 다짜고짜 E2, E4 갈긴 것도 1군사고, 2시간 뒤에 방문한다는 것도 1군사님인데, 아니, 왜 저한테 그러세요? 저는 가만히 있었다고요. 작정한 건 1군사고요. 애초에 여기 1군사님이 있는 것도 몰랐구만….

-그건….

-설마 제가… 군사님 놀리고 싶어서 1군사한테 작업 쳤겠어요? 그거 자의식 과잉이에요. 군사님. 나도 할 거 많아요. 시바 현성이 때문에 심란해 죽겠고만… 원래 살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고 흘려야 하는 일이 있는 법 아니겠냐고요. 이번 일이 딱 그 짝이라니까요. 쓸 수 있는 게 보이면 써야죠. 제니스 후작님이 알아서 길을 열어주신다는데 이걸 어떻게 거절해요?

-…….

-뭐라고 하고 싶으면 저한테 할 게 아니라 1군사한테 해야지. 누가 시바 그런 은밀한 시간에 순진한 영애 살롱 방문 신청을 하냐고.

-…….

-그리고 제가 여기에 많이 다녀봐서 아는데 1회 차랑 2회 차랑 분리해야 된다니까요. 동일시하면 손해 본다니까. 자 따라 해보세요. 1군사랑 나랑은 다른 사람이다! 나는 1군사 같은 사람 모른다! 나는 2군사다!

-지랄하지 마라. 이기영. 내가 그걸 몰라서 지금… 제기랄… 제길!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1회 차와 2회 차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는 걸 이 새끼가 모르고 있을 리 없다. 오히려 나보다 더욱더 냉정하게 분리해서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두 눈으로 직접 지켜보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본인의 얼굴을 하고, 본인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장 증오해 마지않는 웬수와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있으니, 그걸 가만히 지켜봐야만 하는 이 새끼의 심정이 어떨까.

‘속이 타들어 갈 게 분명하자너….’

아니, 겨우 그 정도가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의 눈알을 파내고 싶지 않을까.

차라리 1군사가 뒈지는 꼴을 보면 봤지, 이 꼴은 보지 못할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고, 가장 쉬운 방법인 것과는 별개로 본인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전부 다 집어 던지고 있는 거냐고.’

의문의 암살자가 1진청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는 거다.

-암튼 이건 꼭 필요한 일이에요. 군사님. 정 보기 싫으면 딴 거 하고 있어요. 애초에 좀 제대로 된 신분 좀 구해줬으면 얼마나 좋았게요? 바닥부터 올라가야 되니까 괜한 어그로 끌다가 1군사님 같은 사람들한테 플러팅 당하죠.

-플러팅? 웃기지 마라. 저 녀석은 아이나 페넬로티에게 흥미가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그저….

-아니, 시바 왜 자꾸 1군사를 대변해요? 대변 안 해도 된다니까. 다 이해한다니까. 그리고, 이게 플러팅이 아니면 뭐가 플러팅이에요? 시바 이제 막 데뷔한 영애한테 11시에 찾아오겠다는 게 정상이야? 암튼 보기 싫으면 보지 말든가!

다시 한번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당연지사. 더 이상 진군사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으아아아! 하며 분노를 표출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것 같기는 했지만 이 새끼의 장단에 맞춰줄 여유는 없었다.

‘시바 밥도 못 먹게 생겼자너.’

“드레스 갈아입어요! 페넬로티 영애!”

“저… 식, 식사는 어떻게….”

“지금 식사가 문제예요?! 2시간 후면 제니스 후작이 온다잖아요!”

‘시바. 배고프다고… 아까부터 계속 배고팠다고….’

“핑거 푸드라도 가져올 테니까. 일단 조금 참으세요. 페넬로티 영애. 저희 살롱에 들어오는 첫 손님이에요. 대접을 소홀히 할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제니스 후작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저희 살롱의 흥망성쇠가 결정될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야? 페인트?”

“당연하죠. 파스텔 영애. 물론 제니스 후작이 페넬로티 영애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살롱에 방문하시는 거겠지만… 그래도 손님을 맞이한다는 건 중요해요. 그게 제니스 후작님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더욱더요.”

“근데 페넬로티는 어때? 그 사람 마음에 들어?”

“네? 아… 잘, 잘 모르겠어요. 일단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아서….”

“페넬로티 영애! 그 사람 꼭 잡으세요. 혁명적이에요! 혁명적이라고요!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방문을‘통보’하다니 기개가 있으신 분이라고요! 신분도 좋고! 외모도 합격점이에요! 이제 후작부인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냐고요!!”

“괜히 제가… 긴장돼서… 진, 진정이 안 됩니다. 연초 한 대만….”

“살롱에 연초 냄새 풍길 일 있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 주세요! 팔레트 영애!”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제니스 후작부인!”

‘아니, 브러쉬야. 급발진 하지 마.’

하기사 이런 영애들의 반응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당연히 난리가 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그냥 살롱을 방문한다고 해도 여기저기서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상황, 영애들이 이토록 흥분한 이유는 녀석의 방문 시간대에 있었다.

귀족들의 문란한 사생활이 가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지만,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체면을 중요시한다.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가와는 관계없이 겉으로는 자신의 체면과 사회 범규를 지키는 것이 기본 소양이었다. 그 소양이라는 것이 남녀칠세부동석과도 같은 구시대적 산물인지라 이 새끼들은 남녀를 한곳에 두지도 않는다.

지금은 살롱이라는 형태로 영애들이 한 방에 모여 있는지라 다른 사용인들이 없었지만, 보통의 데이트 때도 시종이나 하녀, 혈육, 보편적으로 부모님을 대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제니스 후작과 내가 어디 물레방앗간에서 단둘이 체스를 두다 다른 이들에게 들키는 상황이 찾아온다면 변명의 여지 없이 무조건 결혼이다.

그것 외에는 페넬로티 영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상.

만약 제니스 후작이 그걸 거절한다면 페넬로티 가문은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녀석에게 결투를 신청할 터였고, 심한 경우 영지전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물론 저주받은 3녀의 경우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지는 않을 것 같기는 했지만….

요지는 녀석이 밤 11시에 내게 만남을 신청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거다.

‘확실히 제국보다 더 구시대적이야.’

통금이 엄격한 영애와 영식들은 공식적인 일정 외에 저녁에 이성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혜성처럼 나타나 플러팅 아닌 플러팅을 갈겼으니 영애들의 마음에 불길이 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살롱 안에서는 때아닌 1군사 맞이가 준비되는 중, 이미 무도회장에 들어가기 전 완벽하게 세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페인트 영애는 아이나 페넬로티를 한층 더 빛나게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영애들. 장신구 가지고 온 것 있으면 다 꺼내봐요.”

“아… 하녀한테 맡겨놨는데.”

“전부 가지고 와 보세요.”

“근데 페인트… 구태여 옷을 갈아입을 필요가 있어?”

“당연히 갈아입어야죠! 무도회장이랑 살롱 안은 또 다른 법이에요! 시간, 상황, 장소에 따라 입는 옷이 다르다고요! 페넬로티 영애가 가문에 밉보이고 있다고 광고라도 할 생각이 아니라면 드레스도 갈아입고, 장신구 세팅도 전부 바꿔야 해요. 제니스 후작부인이 될지 말지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요.”

‘나 근데 제니스 후작부인 할 생각 없는데….’

“조금 더 심플한 거 없을까요? 사용인들 좀 불러주세요. 머리도 다시 만질 테니까요. 브러쉬 영애는 살롱을 맡아주세요.”

“네. 저만 믿으세요! 이 만남 반드시 성사시킬 테니까요.”

“팔레트 영애는… 후우… 지금 빨리 한 대 피우고 오세요.”

“감… 감사합니다.”

“나는… 나는 뭐 할까?”

“아이! 파스텔 영애! 사용인들 좀 불러와 주시라니까요!”

“아… 으… 응!”

살롱 안에 배속된 사용인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것은 순식간이다. 살롱의 총 감독관이 되어버린 페인트 영애에게 사용인들이 질문을 퍼붓는다.

“테이블은 어떻게….”

“딸기 퐁듀 초콜릿으로 부탁드려요. 가볍게 마실 수 있는 와인도 세팅 부탁드릴게요.”

“네. 페인트 영애님.”

“살롱 안을 다시 한번 청소해야겠어요. 조명은 조금만 더 어둡게 하죠. 아니요. 아니요. 네 조금 더 어둡게요. 은은하게 부탁드려요. 아니에요! 이게 아니라고요! 아! 그냥 나와보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뭐 제니스 후작 여기에서 자고 간데? 너네 왜 이래? 걍 잠깐 만나서 이야기나 하자는 건데.’

“브러쉬 영애!”

“네! 제가 핸들링하겠어요! 혁명적인 분위기로 만들어 드리겠어요!”

“팔레트 영애도 좀 도와주세요! 꽃도 바꿔야 해요! 전부 흑장미로!”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해? 우리도 옷 갈아입어야 되는 거 아니야?!”

“갈아입어야죠!”

‘얘네들 제법이네.’

파티를 자주 열었던 입장에서 봐도 페인트 영애의 수완은 제법이다. 다소 밋밋했던 살롱이 변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여기저기에서 흑장미가 장식된다.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테이블과 소파, 심지어 살롱마다 비치된 발코니까지 신경 쓰는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영애들도 눈에 보였다. 무도회장에서 입었던 화려한 드레스가 아닌, 수수하다 못해 밋밋하게 느껴지는 드레스였다. 심지어 장신구도 차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얘… 얘들아… 시바… 감동이자너…’

물론 아이나 페넬로티 역시 무도회장에 들어갈 때와 비교한다면 다소 수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4영애와 함께 있자니 다소 화려한 것 같다.

“루사이드업 트윈테일로 하죠. 머리 장식에 조금 신경을 더 써야겠어요. 흑장미 하나 올릴까요.”

“미… 미친! 혁명적인 스타일이에요!”

“페넬로티… 예… 예쁘네. 역시 나랑….”

그리고….

“제니스 후작이 방금 출발하셨다고 하네요.”

녀석이 드디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요. 제니스 후작은.”

‘뭔 생각이겠어? 그냥 아무 생각이 없는 거지. 체스에 미쳐 가지고. 뭐 시바 시간이고 나발이고 신경도 안 쓰고 있을 거야.’

“그 기백은 높이 살 만해요. 다만 선물로 뭘 가지고 올지가 신경 쓰이기는 하네요.”

“제니스 후작가 정도라면 어마어마하지 않을까. 게다가 이런 시간에 직접 방문하는 거니까. 본인도 실례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면….”

‘선물은 좋은 거 주겠지.’

간지가 안 나서 그렇지, 가오가 정신을 지배하는 새끼였으니까.

보통 살롱에 방문하면서 들고 가는 선물이 가문의 위신과 재력, 또 자기 자신의 품위와 명예와 직결되는 만큼 괜찮은 물건을 들고 올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녀석이 가짜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1군사의 캐릭터 성이 어디로 간 것은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와. 시바.’

발코니에서 망을 보던 팔레트 영애가 말을 이어왔다.

“시종들이 선물을 들고 오고 있습니다! 시… 시종들이….”

시종들이 선물을 들고 오고 있단다. 규모로 보니 아이나 페넬로티뿐만이 아니라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에게 줄 선물도 함께 준비가 되어 있는 모양.

이윽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살롱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됐다.

“들, 들어오세요. 제니스 후작님.”

“흑장미 살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흑장미 살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흑장미 살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는 영애들.

“늦은 시간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똑같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현하는 1군사.

“잠깐 시종들을 살롱 안으로 들여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에요. 제니스 후작님.”

그리고 한곳에 선물을 쌓기 시작한 시종들.

“흑장미 살롱 여러분들을 위한 자그마한 선물입니다.”

물론 거절 따위는 없다. 여기서는 겉치레로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무례였으니 말이다.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페넬로티 영애에게는 따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만….”

“아? 아! 감… 감사해요….”

“…….”

“…….”

시바 알이 큼지막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컸다.

‘와….’

시바 X나 컸다.

내 눈이 다 휘둥그레질 정도로 X나 컸다.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 새끼… 설마….’

진짜… 이 쓰레기 새끼 설마….

‘암것도 모르는 영애… 꼬시려고 하고 있는 거냐고….’

공화국으로… 전향이라도… 시키려고… 하는 거냐구.

‘제정신… 이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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