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72화
뜻밖의 데뷔(7)
당연히 흥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물론 나와 대국했던 놈들의 수준을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승리이기는 했지만 기물과 보드도 보지 않은 채로 많은 이들과 함께 대국했다는 건 결코 일반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기예가 아니었다.
아무렴 머릿속에서 보드를 5개나 그리고 있었으니 아이나 페넬로티가 평범한 영애로 보일 리 만무, 1군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얘… 인재 욕심 많은 편이었으니까.’
애초에 라이오스에서 정하얀에게 쪽지를 날린 것도 그녀의 재능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이성에게 흥미가 있다기보다는 재능 있는 영애, 천재일지도 모르는 영애에게 흥미를 느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니, 단순한 흥미라고 보기에도 부족하다. 놈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이 놀라움이라는 감정이었으니까.
아마 아이나 페넬로티의 스타일도 녀석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미친듯한 공격성이었자너.’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를 것 같던 영애는 다른 세계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무자비했다.
상대방을 물어뜯고, 질근질근 밟는 것도 모자라 반항할 수 없는 상대의 목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작은 보드 판 위에서 그녀는 피식자를 끝까지 추격하는 포식자였으며, 자비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심연의 괴물이었다.
녀석뿐만이 아니라, 이 대국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들의 눈에는 아이나 페넬로티 영애가 그렇게 비추어졌을 것이다.
‘캐릭터 확실하자너. 이건 관심을 끌 수밖에 없자너.’
물론 녀석을 제외한 갤러리들은 그저 페넬로티 영애가 이룬 업적을 칭송하는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꺄아아아아아아악!”
“미쳤어요! 페넬로티 영애! 이건 진짜 미쳤다고요! 이… 이게 도대체….”
“천재예요? 페넬로티 영애는 혹시 천재였나요? 네? 천재인 건가요?”
“아, 아니요. 저 그냥… 체스를 좋아해서… 혼자서 그렇게 두는 경우가 많아서….”
“혹시… 나, 나랑 사귀어 줄 수 있어? 페넬로티?”
“네? 네?”
흑장미 살롱의 영애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살롱의 영애들도 모두가 달라붙어 있는 상황, 방금 자신들이 본 게 정말로 현실이 맞는지 눈을 비비고 있는 이들도 눈에 들어온다.
‘이거 소문은 제대로 퍼지겠자너.’
모르긴 몰라도 이제 이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페넬로티 영애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방금 어떻게 한 건가요? 어떻게….”
“저 재수 없는 새끼들 아무 말도 못 하는 꼴 보라지!”
‘파스텔 영애야… 넌 진짜… 대단하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칠 수 있을까.
“룰은 알고 계십니까? 흐헷! 아이고~ 아이고~ 나 같으면 쪽팔려서 고개도 못 들었다. 콱 나가 죽어야 되는데 말이야!”
실제로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 나를 비웃고, 멸시했던 업보가 어디 간 것은 아니었던지라 더욱더 부끄럽겠지.
아마 데뷔탕트 무도회를 탈주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이쪽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놈들의 이름을 모르는 이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숨도 쉬지 못하고 발린 5인조가 되겠지.
“대… 대단하시군요. 페넬로티 영애….”
“하… 하하… 하… 대… 대단하십니다.”
‘할 말은 그것밖에 없어?’
“…….”
“…….”
“즐거웠어요! 남작님!”
“하… 네… 네. 저도… 저희들도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영애. 그… 그럼… 저희는….”
수치심에 붉게 물들어 있는 얼굴, 심지어 이 새끼들은 반성한 것 같지도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떻게든 페넬로티 영애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물론 지금 당장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여론 보이냐고.’
“페넬로티 영애!”
“살롱에 찾아가도 될까요? 페넬로티 영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조금만 시간을 내주시면 안 될까요?”
“아! 그….”
“원래 재수 없는 자식들이었어. 페넬로티. 너무 신경 쓰지 마. 나 저놈들이랑 같은 왕국이거든. 조금 똑똑한 걸로 맨날 으스대고 다니더니… 이번에 임자 만난 거지. 뭐. 내가 언젠가는 저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주제에 잘난 척은 엄청 해대고… 꼴좋네. 꼴좋아. 저거 부끄러워서 춤이나 권할 수 있겠어?”
“네? 저… 저는 그러려고 한 게…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니요! 잘했어요. 페넬로티 영애. 저 사람들 솔직히 왕… 왕재수였거든요.”
문제라고 할 만한 것은 인파가 너무 몰리다 보니 1군사 녀석이 내게 말을 걸 타이밍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이대로 그냥 보낼 리가 없는데….’
내가 아는 진 군사라면 시바 이걸 그냥 보고만 있을 리가 없는데….
물론 1군사가 지금 작전 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눈에 띄는 행동은 최대한 지양하려고 할 것이다. 놈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켜 좋을 게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으로 나는 우리 진 군사를 믿을 수밖에 없다. 본래 천재라는 것들은, 특히나 진청 같은 종류의 새끼들은 무료함을 견디지 못했으니까.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자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시점에서 우연치 않게 흥미를 끄는 물건을 만났다.
이걸 시험하고 확인해 보고 싶은 욕구가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했다. 아이나 페넬로티라는 인물에게 생긴 궁금증.
갑작스레 나타난 어린 천재에 대한 호기심. 결정적으로 이 여자라면 자신을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작은 기대감까지.
어쩌면 동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품고 있을 게 분명하겠지.
‘1군사야. 너 원래 이런 거 잘 참는 성격 아니자너.’
그래서 맨 처음에 나랑 만났을 때도 다짜고짜 게임 하자고 지랄했던 거자너.
‘너 원래 빠꾸 없잖아. 작전 중이라는 건 알지만… 진짜 이대로 보낼 거야?’
만약에 지금 헤어지면… 이 넓은 무도회장에서 또 언제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고. 너 원래 주목받는 거 좋아하잖아.
나 이대로 간다? 진짜 이대로 영애들이랑 살롱으로 돌아간다. 어차피 지금 무도회장 개판 나서 춤이고 뭐고 없는 거 알지? 진짜로 간다?
아니나 다를까.
“E2, E4.”
녀석이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
“…….”
‘믿고 있었다고 젠장!’
심지어 먼저 게임을 하자고 권하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는다.
‘너 이 새끼 빠꾸 없는 거 알고 있었다고! 등장씬 뭐냐고!’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대뜸 말로 말을 옮기고 있었다.
“E2, E4.”
‘그냥 다짜고짜 바로 시작하는 거냐고. 예열 같은 거 없이 그냥 바로 들어가는 거냐고!’
“네… 네? 저… 갑자기.”
의문을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다. 갑작스레 발걸음을 내디디며 E2, E4라고 외친 인간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탓이다.
하지만 1군사는 물러서지 않는다. 다만 담담히 다시 한번 입을 열 뿐이었다.
“E2, E4.”
‘아니, 시바 아무리 그래도 자기소개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새끼 이렇게 예의가 없어?’
녀석이 어떤 신분으로 왔는지 궁금증이 일기는 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금방 놈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페넬로니 영애. 제 기억이 확실하다면… 저 문장은… 제니스 후작가의 문장이에요.”
“네… 네?”
‘뭔 후작을 달고 왔어?’
“서쪽 끝에 있는 헨리 왕국을 떠받치고 있는 다섯 기둥 중에 하나예요. 헨리 왕국은 다른 왕국들에 비해 작지만… 제니스 후작가는 충성심 높고 명망 높은 귀족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림자를 자처하고 있어…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는 절대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또 그림자야? 이 새끼는 그림자 페티쉬라도 있나?’
당연하지만 일단은 응수를 할 수밖에 없다.
“C7, C5.”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물론 이기는 게 전부는 아니다.
‘그냥 흥미를 끌면 되는 거 아닌가?’
계속해서 대국을 이어나가며 퍼포먼스를 위해 다시 한번 눈을 손수건으로 질끈 묶어버린다.
그 와중에도 이 양보 없는 공방은 계속되는 중, 사냥개마냥 자신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오는 이쪽이 당황스럽기는 했는지, 갑작스레 수비적으로 돌변하는 1군사가 보인다.
그냥 호기심에 한번 대국을 신청했지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상대방의 역량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 분명하리라.
아마 상상 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혜지니와 오랜 싸움으로 다져진 그 날카로움이 어디 가는 게 아니다.
검을 휘두른다면 너 자신도 다칠 각오를 하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오히려 경계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네 마실 나가는 느낌으로 임했던 1군사의 얼굴에는 어느덧 짙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1군사가 행복하니까. 된 거자너.’
한쪽은 함정을 판 채로 기다리고 남은 한쪽은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들어간다. 이쪽은 가장 자신 있는 1군사를 끌어들이고 있었고, 1군사는 그게 아니꼬운지 의미 없는 소모전을 최대한 지양하려고 하고 있었다.
물론 대국은 딱 여기까지.
어차피 목적은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라 어그로를 끌려는 거였으니까. 슬쩍 1군사, 아니, 제이스 후작의 반응을 살핀 이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숍 C3.”
라이오스 이벤트의 재림. 아무 의미도 없는, 아니, 있어 보이는 한 수. 재미있게 대국을 즐기고 있던 제이스 후작의 눈썹이 살짝 올라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마치 설명하라는 듯한 얼굴이다. 혹시 실수한 것은 아닌지, 머릿속에 있는 기보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궁금해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에 닿았는지 가볍게 고개를 터는 모습이 눈에 보여 왔다.
의미 없이 움직인 비숍에게 무언가 본인이 해석할 수 없는 뜻이 있다 여긴 것이다.
그리고 녀석이 막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흑장미 살롱 영애분들.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타이밍에 딱 맞게 무도회가 마무리됐다.
“아… 아쉽게 끝났네요. 재미있었어요. 제이스 후작님.”
살짝 고개를 숙이며 기품 있게 인사하기.
1군사 역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이디.”
‘레!’
“…….”
‘이!’
“…….”
‘디!’
시바 설마 설마 했는데 레이디가 나왔자너.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곧바로 입을 열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한데… 마지막 수에 대해서 질문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대답해 주지 않아야겠지.
“앗! 죄, 죄송해요. 이만 들어가 봐야 될 것 같아서.”
원래 언제나 궁금증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법, 신데렐라마냥 재빠르게 회장을 탈출하려고 했을 때. 누군가가 내 손을 붙잡는다.
시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뒤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시간 뒤에 찾아뵙겠습니다. 페넬로티 영애.”
직후,
“네?”
“어…?”
“어? 어?”
“어?”
“네?”
“페넬로티 영애. 방, 방금….”
영애들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꺄아아아아아악!”
“미… 미친! 2시간 뒤면 11시 아닌가요?”
“아무리 그래도 너, 너무 야심한 시각 아닌가요!”
“방금 손잡은 거 맞죠? 손잡은 거 맞죠?! 저분이 페넬로티 영애의 손을 붙잡은 거 맞죠?! 제, 제가 뭘 본 건가요! 제가 도대체….”
“찾아오겠대요! 살롱에 찾아오겠대요!”
“이건 미쳤어요! 미쳤다구요! 혁명적이라고요! 청혼할 건가 봐요! 제이스 후작이 청혼할 건가 봐요! 아니 이 시점에서는 이미 청혼이나 다름이 없다고요!”
그리고.
-지… 지랄하지 마라.
다른 쪽에서도 커다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랄하지 말란 말이다! 제기랄!
분명 무언가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