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61화
면회(11)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아무리 녀석이 정신적으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라파엘의 주먹을 피하지 못할 리 만무, 그냥 맞아준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단언하건대 김현성에게 피할 마음이 있었다면 눈을 감고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피하지 않은 이유야 많겠지만, 보통 청춘 드라마에서는 저런 주먹은 맞아주는 것이 국룰이었으니 맞아줬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대충 보기에도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녀석, 라파엘의 진심을 담은 펀치에 그 많은 생각들이 전부 날아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느끼는 게 있지 않았을까.
잠깐 동안 공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녀석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다.
죽빵을 한 대 갈긴 이후 그대로 돌아가기는 뭣 했는지 라파엘은 다시 한번 뜨거운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중,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한 대 더 때리려고?’
-개자식. 그 썩어빠진 정신을 뜯어고쳐….
‘아까는 분명 할 말… 그것뿐이라며… 그대로 돌아가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간신히 몸을 일으킨 김현성에게 다가간 라파엘이 기세가 올랐는지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두른다.
퍼어어억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쓰러진 것은 당연지사. 오뚜기마냥 다시 몸을 일으킨 김현성에게 라파엘이 또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이쯤 되면 그냥 저 새끼가 김현성을 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전에 날개가 뜯겨 나간 복수라도 하는 걸까.
얼굴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것을 보니 자신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질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암만 그래도… 너무 얼굴만 때리는데.’
퍼어어어어억!
콰아아아아아앙!
-일어서… 이 개자식!
이쯤 되면 김현성도 반응할 만하련만 아직까지도 아무 말 없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만 있다.
-네가 그러고도…!
김현성이 갑작스레 라파엘에게 주먹을 휘두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콰직! 콰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라파엘이 땅바닥에 처박히는 모습이 보인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콜록! 뭐? 너….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도대체 뭘 알고 있다고 그딴 소리를 지껄여…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갑작스레 온도가 올라간 것 같은 느낌. 그 뜨거움에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도저히 이걸 바라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다 큰 새끼들이 왜 청춘드라마 찍고 있냐고.’
너네 십 대 아니라고 이십 대라고….
아니, 요즘 십 대들도 이런 거 안 한다고….
라파엘 이 새끼는 주변의 온도도 함께 뜨거워지게 하는 데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이 쓸모없는 회색 비둘기의 재능을 발굴해 낸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내가 원하는 재능은 아니었다. 솔직히 망원경을 돌리고 싶어진다.
어처구니없었던 것은 이 두 새끼들이 서로 한 대씩 주먹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 잘 싸울 수 있는 새끼들이 왜 꼭 한 대씩 주먹을 주고받고 있는 걸까.
구태여 피할 수 있는 걸 왜 얼굴로 받아내고 그걸 다시 되돌려 주고 있는 걸까. 어째서 시바 이 정도로 뜨거워진 것일까.
제3자의 입장에서 저 모습이 어떻게 보이고 있을지 정말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것일까.
화려한 무투술은 어째서 봉인하고, 뒷골목 시정잡배마냥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걸까.
라파엘 이 새끼는 본래 대륙 놈이니 감성이 그쪽이라고 해도, 저 새끼는 지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청춘드라마의 한 장면이라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매력이기는 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퍼억!
-웃기지 마!
‘아니, 시바 이거 소리는 진짜 못 듣겠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태에 모니터링을 해야 한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도저히 저 뜨거운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다.
두 사내놈이 감정을 폭발시키고 있는 현장, 용암 같은 눈물이라도 흘러나왔다면 정말로 저걸 직시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음소거해야겠다. 시바.’
아니나 다를까 속에 있는 감정을 쏟아내는 것만 같은 두 녀석, 라파엘이 굴린 스노우볼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다면 녀석의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는 것, 스펙의 차이도 차이거니와 애초에 저 꼬맹이가 김현성의 상대가 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자존심 때문에 이를 악물고 김현성의 주먹을 맞아가며 청춘을 주고받고 있었지만 속에 품고 있는 분노와는 관계없이 놈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아직까지 멀쩡한 김현성과의 차이는 분명하다.
죽빵을 맞고 바닥에 쓰러진 라파엘은 이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힘들어 보인다.
뻐끔뻐끔 소리를 내며 김현성을 향해 달려드는 녀석,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건지 절대로 쓰러지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느껴졌지만 하체에 힘이 실리지 않은 주먹이었기 때문인지 김현성을 쓰러지게 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끼는 당최 포기하지 않는다.
‘추하다… 파엘아. 진짜 추하다. 그만해라….’
이 새끼는 끝끝내 몸을 일으켜 쓸모없는 청춘을 휘둘렀다.
‘시바. 잠깐 들어볼까.’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 개자식! 절대로 용서 못 해. 김현성.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 한다고!
‘아니다. 그냥 듣지 말자.’
누가 보면 라파엘이 놈을 쥐어패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입술만 터진 채로 간지나게 피를 닦고 있는 김현성과는 다르게 라파엘 이 자식은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여전히 손을 위로 올리고 있는 중, 얼굴이 부어올라 한쪽 눈은 거의 감겨 있는 것만 같다.
이미 한물간 감성을 최대한 보여주기 위해 발악하는 모습, 단언하건대 90년대 로맨스 소설에서도 저런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이기연이라도 등장해 놈들을 말려야 하는 걸까. “두 사람 다 그만해요!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옷!”라고 외쳐야 이 새끼들이 만족시킬 수 있을까.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번에는 저 현장을 찾을 자신이 없다.
파란 유소년 아카데미에서 진 군사가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게 느껴질 정도, 하지만 일단은 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 얘 죽겠자너.’
라파엘의 생사가 정말로 걱정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본래의 계획에서 좀 많이 벗어나기는 했지만 이 상황을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고 느껴진 탓이다.
혹시라도 도착하기 전에 이 부끄러운 이벤트가 끝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새끼들은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서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이 원인인 건지, 아니면 그저 관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날아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야에 녀석들이 비치자마자 곧바로 소리를 내 지른 것은 당연지사.
“라파엘 님!”
당연히 잘난 느그 현성이보다는 못난 우리 파엘이를 챙겨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었다.
“혀… 형?”
“…….”
깜짝 놀란 라파엘, 그리고, 괜스레 시선을 피하고 있는 김현성.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요!”
‘스토리가 너무 구려. 시바.’
김현성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고 싶었지만 쌍팔년도 감성에 도저히 몰입을 할 수 없는 타이밍, 하지만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자너. 엄청 흔들리고 있자너.’
“…….”
“…….”
‘아직 일주일도 안 됐는데 벌써 후회하고 있는 것 같자너.’
회사설이 흐릿해지고 있는 지금 이 타이밍에 마주한 이기영은 녀석에게는 어떻게 비칠까.
저번 대화에서 한 번 파국을 맞아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힘들면 걍 기어들어 오지. 뭣 하러 그렇게 고집부리고 있는 거냐고.’
“형… 형 죄송해요. 제가….”
‘그래. 시바. 넌 죄송해할 만해.’
원래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이번 사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얼굴도 안 보려고 했었는데, 굳이 여기까지 날아오게 만들었잖아.
워프게이트를 거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다. 평소였다면 라파엘에게 실망했다는 눈초리를 쏴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지만 이 갑작스러운 이벤트의 먹잇감은 김현성이었다.
“라파엘 님 괜찮으신가요?”
‘얼굴 좀 치료해 주고.’
“저, 저는 괜찮아요. 형.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요.”
‘이 새끼 자존심 때문에 괜찮은 척하네.’
“…….”
“…….”
‘윽박 한번 질러줘야지.’
“현성 씨.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요!”
누가 보더라도 가해자는 라파엘이다. 박사님의 치료가 가장 시급한 것은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김현성의 광기는 가짜 광기로 느껴질 정도였다.
‘라파엘 이 새끼가 진짜 광기였어.’
덕분에 속이 시원해지기는 했지만… 갑작스럽게 오두막에 찾아와 대뜸 주먹을 휘둘렀으니, 언제나 패배하는 연하 금발남의 팔이 잘려도 딱히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최초로 잘못한 사람보다는 더 상처 입은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 국룰 중에 국룰, 그게 감성 로맨스의 서브 남이라면 더욱더 맹목적으로 옹호를 해줘야 한다.
상황이 이상하게 변하기는 했지만 이용할 건 이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딱히 김현성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마음 따뜻한 기영이가 우리 라파엘이의 상처를 외면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그동안 내가 취급이 너무 박했지?’
라파엘도 자신이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관심과 옹호에 얼굴이 밝아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터진 만두 같은 얼굴을 하고선 말이다.
당연하게도 의기양양해진 것은 라파엘 쪽,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은 김현성 쪽이다.
“형 그만하세요. 제, 제 잘못이에요. 제가 먼저….”
‘아 좀 넌 가만히 있어 봐. 시바. 넌 잘못 없어. 아무튼 없어.’
“뭐 하고 있었던 거냐고 물었잖아요! 어떻게… 사람 얼굴을 이렇게….”
“…….”
“달라지기는 한 건가요?! 달라지려고 여기에 처박혀 있었던 거 아니었냐고요! 뭐가 달라진 건데요? 도대체… 뭐가….”
“…….”
‘그래. 네가 생각해도 어이없지?’
정신병 고친다고 그렇게 생난리를 치더니, 결국 여기서 하는 게 쌈박질이자너. 시바. 선빵 맞은 건 조금 불쌍하기는 한데. 그래도 무대응으로 수습할 수 있었던 거자너.
한 방 맞고 안 일어났으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너도 속에 있는 화 풀려고 하다가 이 사달이 난 거자너.
‘시바 눈물 좀 흘려줘야겠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화가 난 상황 속에서 김현성을 위해주고 걱정해 주고 있다는 스탠스가 들어맞는다. 이 눈물은 녀석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뭐가 달라진 건데요! 거울 보셨어요? 오히려 지금 현성 씨 모습이 이상하다는 거 왜 모르고 계신가요. 제가 알고 있던 모습이랑 너무 멀어졌어요.”
“…….”
‘와. 독하다 독해. 이래도 안 넘어와?’
“이제… 속이 시원하신가요?”
‘이제 속 시원해?’
“원하시는 대로, 전부 다 되니까. 이제 속이 후련하신가 보네요. 본래의 눈 색도 되찾으시고 그렇게 아무렇게나 예전처럼 마음가는 대로 사니까. 이제 좀 만족스러우신가 봐요.”
‘진짜 이 독한 새끼. 시바. 이래도 안 넘어오냐고.’
녀석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에게도 의심이 들 만한 타이밍이기는 할 것이다. 본인이 망가졌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고, 이 주먹다짐 한 방에 그동안의 치료가 전부 의미 없는 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모르긴 몰라도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아왔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오늘 새벽에 잠 못 이루다가 럼주 한 병 깔 각인데.’
그래. 차라리 한 병 까고 깔끔하게 넘어와.
차라리 술을 마셔.
“저는… 저는… 뭐가 달라진 건지 모르겠어요. 이게 의미가 있는 건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부끄러움과 자기혐오에 빠진 김현성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당연히도 나 역시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
계속해서 시비를 거는 것보다는 라파엘을 부축하면서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안녕히….”
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안녕히 계세요.”
‘뒤돌아 보지 말자. 기영아. X나 쿨했어.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