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60화
면회(10)
“혹시 형 눈 색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온 것도 김현성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
“…….”
라파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어왔다.
“…….”
그럼….
‘당연히 그 새끼 때문이지.’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장난질을 쳐놓은 것은 나였지만 원인 제공자가 김현성이었으니 김현성의 잘못이라 함이 옳다.
심지어 본인이 수습할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습하지 않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게 정말 이 새끼가 원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
당장 이곳으로 기어들어 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대체 어째서 연결이 희미해지고 있는지 울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건만 김현성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그… 다투셨다는 것과 관계가 있나 해서요.”
‘이젠 김현성이 누군지도 모르겠자너. 시바. 내가 알던 김현성이 맞는지도 모르겠자너.’
잠깐만 연결이 끊겨도 호흡곤란이 왔던 우리 현성이는 도대체 어디 가고, 버릇없는 느그 현성이만 남았단 말인가.
물론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싸운 직후 곧바로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꺼버리는 것은 내 임의대로 이걸 껐다 켰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희미한 끈만 남긴 채로 천천히 죽여 버린 것이기는 했지만, 솔직히 이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하다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상징처럼 존재했었던 금안을 잃어버린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묵묵부답. 이번에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겠지만 아쉽게도 이쪽 역시 양보할 생각은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새끼는 지금 이 상황을 반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흔한 문자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게 녀석이 이 상황을 환영하고 있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회귀자 사용설명서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거겠지.
좋으시겠네. 우리 김현성 씨. 시바.
‘치료 한번 잘 해보라지. 나도 나 좋다는 사람 많아. 시바.’
너무 생각이 많았던 것일까.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감돌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눈치를 보고 있는 라파엘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 것은 당연지사.
녀석의 눈은 이미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드디어 김현성과 내 연결이 끊어졌다고 신나게 춤을 출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우울한 것 같은 모습이 눈에 띈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일그러지는 얼굴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니요. 현성 씨 잘못은 아닐 거예요. 분명히 저한테 뭔가 문제가 있겠죠. 사실은 제가 현성 씨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해서….”
“형 잘못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맞아. 내 잘못 아니야. 그 새끼 잘못이야.’
전부 그 새끼 탓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아니, 형은 정말 이 상태로 괜찮으신 건가요?”
“네.”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요?”
‘괜찮자너. 지가 싫다는 데 뭐 어떡해. 나도 이제 그 새끼 신경 안 쓸 거야. 대신 너 있자너. 그래서 오늘 같이 밥도 먹은 거구….’
내가 너랑 왜 만나줬겠어.
“네. 괜찮아요. 라파엘 님.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정말로 영혼이 멀어지고 있는 건지, 저랑 현성 씨가 가지고 있는 유대감이나 신뢰에 문제가 생긴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일시적인 현상처럼 보이고… 아니, 일시적인 현상일 게 분명해요.”
“…….”
“무엇보다, 이게 급한 게 아니니까요. 지금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비하면 가벼운 일이에요. 나중에 현성 씨랑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면 금방….”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형. 영혼이 연결되었다가 떨어지는 건데… 그게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요?”
“네?”
“저… 바보 아니에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그게 지금의 형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리가 없잖아요. 영혼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잖아요….”
“…….”
“원인은 분명히 그 새끼한테 있겠죠. 정말로 그게 일시적인 현상이 맞는 건가요? 만약 되돌아오지 않으면… 형은… 어떻게… 어떻게 하실 건데요? 버틸 수 있으신 건가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분명히.”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그 상실감을 견딜 수 있으실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으세요?”
“네? 저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으신가요?”
아무래도 너무 우울한 척을 했던 것일까. 생각보다 이 새끼의 얼굴이 진지하게 비친다.
동정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녀석의 텐션이 생각보다 많이 올라가 있었다.
잠깐 김현성의 대체품으로 녀석을 써볼까 했던 고민이 의미가 없어질 정도로, 녀석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라파엘이 조용히 다시 한번 말을 잇는다.
“형… 모르시고 계셨겠지만… 사실 저… 아직도 김현성이 싫어요.”
‘아니, 그건 알고 있었는데. 모를 수가 없는 건데. 너 누가 봐도 김현성 싫어하는데….’
“속을 알 수도 없고, 폭력적인 사람이에요. 자기밖에 모르고요. 악, 악마 같은 새끼예요. 게다가 형한테… 형한테 그렇게 심한 짓을 했던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형이 얼마나 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고… 기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표현방식이 잘못된 것처럼 느끼기는 했지만 적어도 그건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 시바 내가 괜찮다는데 이 새끼는 왜 이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게 형을 지탱해 주고 있다고, 그게 형의 영혼이 마모되는 걸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형이 그나마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었는데… 전부 제 착각이었던 걸까요? 제가 잘못 생각했던 걸까요?”
이미 잔뜩 흥분해 있다. 몇 분 전에 마리엔 이야기를 나눴던 것이 거짓말 같다.
이 새끼는 갑자기 왜 급발진을 해서 이를 꽉 깨물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꼴은 또 가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머리통을 열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관계가 너무 일방적이라고는 생각한 적이 없으신가요? 이런 건 정상이 아니에요. 형은 이 대륙에 많은 일들을 혼자 견뎌내면서도, 그 새끼를 걱정하고 있는데, 이상하잖아요. 이게 진짜로 영혼이 연결된 사람한테 할 수 있는 행동인가요? 친우라고 형제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한테 할 수 있는 짓인가요? 어째서… 어째서 그런 놈이… 제길….”
“라파엘 님… 잠깐 진정하세요.”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힘든 시기에 있는데… 이런 쓸데없는 일에… 정말로 형을 생각한다면 이래서는 안 돼요. 이건 잘못된 일이에요. 형. 형은 조금 더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해요. 형은 행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전부 자기 잘못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요!”
“…….”
자꾸만 로맨스 소설의 서브 남주가 할 것만 같은 대사를 지껄이기 시작한 라파엘 때문에 정신이 없다.
심지어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다.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눈빛을 하고 말이다.
떠올리기 싫은 눈빛이었지만 녀석에게서 파란 유소년 아카데미, 뜨거운 온도의 대명사 김명원의 얼굴이 슬쩍슬쩍 비친다. 곧바로 청춘 드라마를 한 편 찍을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불합리해요. 불합리한 일이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에요.”
“네?”
“저… 먼저 가 볼게요.”
‘뭐야. 저 새끼 왜 저래?’
“아니, 라파엘 님. 앉으세요. 지금 설마….”
“갑작스럽게 죄송해요. 조금 더 즐거운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다음에 꼭 불러주세요. 아니, 제가 먼저 연락드릴게요. 형.”
“라파엘 님! 라파엘 님!”
이라고 부르기도 전에 저벅저벅 걸어간 녀석이 회색빛의 날개를 펼친다.
심지어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치기까지 한다. 내 속도로는 녀석을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망원경으로 녀석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라파엘 파티 납치사태를 생각해 보면 녀석 역시 급발진의 아이콘이라고 할 만했지만 놈이 이 정도로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전까지 나눴던 대화가 차분했기 때문에 이 새끼의 급발진이 더욱더 도드라진다.
‘아니지?’
“…….”
‘아니지?’
녀석이 날아가는 방향은 누가 보더라도 왕국연합 쪽, 김현성이 있는 위치를 안기모에게 전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제길… 어째서….
“…….”
-어째서. 난 왜… 제길….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계속해서 날개를 뻗고 있는 녀석이 어느 순간 쿵 하고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설마 설마 했지만 목적지는 정말로 김현성이 머무르고 있는 오두막, 익숙한 풍경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간 김에 박사 새끼를 죽여주지 않을까. 퀘스트라도 내려볼까.
저걸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말아야 하는지 파악하기도 이전에 녀석은 김현성이 쉬고 있는 오두막으로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 문을 두들기지도 않고 대뜸 문을 발로 찬 이후에는….
-김현성!
커다랗게 김현성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의 등장에 깜짝 놀란 것 같은 김현성의 얼굴이 눈에 띈다.
의식적으로 망원경으로 녀석을 살펴보지 않았었지만 그간 마음고생이 있기는 했었던 모양,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이라도 든 것처럼 보였다.
녀석 역시 눈 색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지난 싸움에 계속해서 매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은 모습인지라 솔직히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그래. 시바 그럼 그렇지.’
마치 폐인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잠을 자지 못했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고, 입술도 다 터 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피부는 푸석푸석해 보였고, 처음 봤을 때 같은 상쾌함이 없다.
단언하건대 저 상태로는 절대로 이온음료 광고를 맡을 수 없을 것이다.
혹시나 아무 상관 없는 것처럼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씻겨나가기는 했지만, 새로운 불안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라파엘이 녀석에게 전부 다 불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닌가?’
라파엘은 대화를 하러 김현성을 찾은 것 같지는 않다. 일단 저 둘이 한자리에 있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던 시점.
김현성이 조용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김현성….
-…….
-김현성. 너… 이 개자식.
-…….
김현성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냥 조용히 녀석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김현성을 향해 쇄도하는 라파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김현성에게 달라붙은 라파엘의 모습.
다행히 검은 들지 않았지만 대신 이를 악물고 주먹을 치켜드는 녀석이 보인다.
얼마나 주먹을 꽉 쥐었는지, 손이 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이 저런 주먹에 맞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라파엘 이 새끼 쳐 느려 자빠졌는데… 저렇게 대놓고 치려고 하면 누가 맞아주겠냐고… 아… 정진호한테 발려 놓고 느끼는 게 없나 봐. 쟤는.’
퍼억!
콰아아아아아아앙!
어처구니없지만 녀석의 주먹이 그대로 김현성의 안면에 틀어박힌다.
“어?”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김현성이 오두막을 뚫고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순식간에 폭음과 함께 먼지가 날아다니고, 어느 정도 먼지가 걷히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라파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김현성은 여전히 쓰러진 채로 누워 있었는데 아예 전투 자체를 포기한 것 같은 모양새인지라, 라파엘도 천천히 주먹을 거두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형편없는 새끼.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 김명원을 떠올리게 하는 청춘드라마 여름 감성, 난데없이 등장한 수정펀치에 소름이 돋기는 했지만….
‘속이 뻥 뚫리자너.’
답답했던 속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넌 형편없는 놈이야. 쓰레기 같은 자식.
-…….
-할 말은 그것뿐이야.
-…….
‘현성이… 정신 차리나?’
수정펀치에 정신 차려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