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47화
귀환(7)
‘사실은…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도 없자너.’
몇 달, 정말로 길게 잡아 몇 년 정도는 녀석들과 함께 지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영원할 수는 없다.
이기영도 이기영 나름대로의 삶이 있다는 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은 스스로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적어도 2회 차에서는 계속해서 꼬맹이 흉내를 내면서 살 수는 없다. 이 새끼들과 소꿉장난을 하자고 본캐를 부캐로 옮길 수 없지 않은가.
꼭 현재의 이기영을 포기한다는 걸 전제로 삼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1회 차와 2회 차는 다르다. 놈들은 1회 차의 빅보이, 칼턴, 유진이 아니다. 기분 좋은 유희를 즐기자고 놈들의 집에서 놈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사실은….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것부터가 넌센스야.’
그만큼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쓸데없는 자가진단을 해보자면 어쩌면 애기영은 정말로 놈들을 부모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렸을 적의 이기영을 놈들로 인해 보상받으려고 하는 것이 기저에 깔리지 않았을까.
이미 한 차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선다.
“…….”
“…….”
녀석들은 좋은 부모와는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비상식적으로 애정을 쏟아준 녀석들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목숨을 바친 놈들이 아니었던가. 놈들이 마련해 준 환경은 거지 같기는 했지만 함께 있을 때 즐거웠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애기영은 놈들의 사이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꼈었고, 또 편하다고 느꼈었다는 거다.
싸구려 클리셰 드라마에 흔하게 나오는 설정이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놈들이 성공한 어른이 된 이후에 어른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지랄발광을 떠는 경우들.
어른이 된 이기영은 당연히 그런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정 많은 가정환경을 탓하기에는 일찍 철이 들어 자라기도 했고,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율하밖에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애기영은 생각이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애새끼영 이 새끼는 분명히 보상받고 싶어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놈들을 쓰다 버릴 새끼들로 생각했었을지도 몰라도, 지금은 놈들을 보호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놈들이 애새끼영의 보호자가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갈 곳 없는 거 확실한 거지? 우리가 괜히 이 꼬맹이 납치하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닌 거지?”
“…….”
“무, 무슨 납치야! 빅보이 이 새끼야! 무서운 소리 그만해. 그냥 딱 하루만 맡아주는 거니까.”
“제기랄 방 청소도 안 해놨는데. 이 꼬맹이 누울 자리는 있으려나.”
“네 침대에서 재우면 되지!”
“여, 여기서는 이야기할 만큼 했으니까. 일단 가자고. 우리도 퇴근해야지. 응?”
“꼬맹아. 우리가 생… 생긴 건 이래도 절대 나쁜 아저씨들이 아니에요.”
“…….”
“아니, 가, 가끔 나쁜 짓을 하기는 하는데… 그렇게 막 글러 먹은 어른은 아니라는 거야. 응? 이, 이해하지? 널 막 어떻게 하려고 데려가는 게 아니라 딱 하루, 딱 하루만 재워주려고 하는 거야. 다음 날은 아동보호센터나 보육원에 데려다주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도 괜찮고. 네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말이다. 린델은 어린아이들이 지내기 좋은 곳이니 너도 아마 만족할 거다. 응?”
“…….”
“부모님은… 혹시 부모님은 계셔?”
“아니요….”
“혹시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우리가 막 출신성분을 따지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게 네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혹시 네가 어디 왕국연합 귀족 가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귀족이나, 응? 그런 거라고 해도 몸값 요구 같은 건 절대로 안 하는 착한 사람들이야.”
“예시가 너무 적나라해서 오히려 더 의심이 가잖아.”
“그, 그럼 어떻게 해? 이 꼬맹이가 안 일어나려고 하는데….”
“…….”
“…….”
“우리 절대로 무서운 사람 아니라니까.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꼬마야. 이 린델이라는 도시는 말이다. 그렇게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에요. 우리가 정말로 널 납치하고 팔아넘기고 이런 사람들이었으면… 아니, 그런 생각만 해도 잡혀가는 무서운 곳이라니까. 그러니까 안심해도 된다.”
“…….”
“미, 미치겠네. 이거 어떻게 해야 돼? 칼턴?”
“뭐든지 나한테 묻지 마 빅보이 이 새끼야! 네가 알아서 해야지 왜 나한테 책임을 들이밀어?”
“네… 네가 집에 데려가자며!”
“…….”
“젠장… 꼬마야. 아저씨랑 같이 집에 가면 네가 먹었던 햄비어를 배 터질 때까지 먹게 해주마. 어, 어때?”
“사탕 줄 테니까 따라오라는 범죄자 새끼처럼 말하지 말라고 빅보이!”
“…….”
“…….”
빅보이 녀석은 그 와중에도 내 손을 꽉 잡고 있다.
“제길… 귀찮은 일에 휘말렸어… 엄청 귀찮은 일이 휘말려 버렸다고….”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난 원래 이런 성격이 못 된단 말이야. 제길… 거지 꼬맹이 하나한테 햄비어 꼬치 하나 쥐여 주려다가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냐고.”
“네 업보인데 뭘 어떻게 하겠어?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이 새끼야.”
“꼬, 꼬맹이가 안 일어나는데 어떻게 해?”
“…….”
“…….”
“어. 일어났다. 그, 그래 꼬맹아. 우리가 전부 다 알아서 해줄 테니까. 믿고 따라오라고. 약속했던 햄비어 꼬치도 배가 터질 때까지 먹게 해줄 테니까. 응?”
“그러니까 범죄자 같은 대사 치지 말라고 했잖아. 빅보이.”
“제대로 걸을 수는 있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행선지가 정해진다. 칼턴과 유진이 가게의 문을 닫는 와중에도 빅보이 녀석은 내 손을 꼭 붙들고 있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놈들은 나를 신줏단지 모시듯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안내하고 있었다.
낙오자의 거리를 몇 분이나 거닐었을까.
“자. 얼마 안 걸렸지?”
빅보이와 칼턴, 유진이 살고 있는 집이 시야에 비쳐왔다. 요즘 린델에서 이런 집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물어져 가는 건물.
그래도 오랜 세월 동안 모험가 짓거리해오며 어느 정도 돈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로 개털인 모양인지 문 앞에는 여러 종류의 명세서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중얼거리는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월세 또 밀렸어?”
도대체 정체불명의 햄비어 레시피에 얼마나 쏟아부은 걸까. 제2의 인생을 생각하며 가게를 여는 것에 도대체 얼마나 돈을 허비한 걸까.
빅보이 이 새끼가 무식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방 안은 세 남자가 지내기에는 무척이나 좁다. 구역질 나는 냄새가 나고 있었고, 먹다 남은 음식이 땅바닥을 굴러다닌다.
그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아무 곳에서나 훌렁훌렁 작업복을 집어 던지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비친다.
“빅보이 아직 온수 나와?”
“끊긴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럼 이 꼬맹이는 어떻게 씻겨?”
“왜. 씻기게?”
“그럼 이 새끼야. 내일 저 꼴로 보호 센터에 데려가게?”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찬물로 씻기면 안 돼?”
“안 되겠다. 물 좀 끓여와야겠다. 빅보이.”
“제… 제길….”
머뭇머뭇거리는 사이에 자꾸만 일이 진행되고 있다.
“…….”
“…….”
‘시바… 도대체 뭘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아니, 애초에 여기까지 놈들을 따라왔을 때부터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1회 차에서처럼 놈들의 방을 청소해 주고, 이 위생 관념 없는 새끼들에게 잔소리 좀 해주고, 같이 식사를 하며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당황스러운 부분은 이지혜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변명은 아니지만 그녀가 적절한 시기에 이걸 멈춰주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이기영이 이 패배자 놈들과 소꿉장난을 하러 기어들어 가는 꼴을 지켜볼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어쩔 작정이냐고 연락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그녀는 이 상황에 굳이 개입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내 선택에 모든 걸 맡기려고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휴식을 계속해서 권하기도 했으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쉬어보라는 것인지, 아니면 간만에 유희를 즐겨보자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선택은 비합리적이다.
현 대륙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내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그걸 가장 잘 알고 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이 누나는.’
“배고프냐. 꼬맹아?”
“…….”
“…….”
“빅보이, 꼬맹이 입에 햄비어나 물려줘.”
다시 한번 고개를 들어, 입안에 들어온 것을 우물거렸을 때였다.
옆 주머니에서 살짝 진동이 느껴진다.
놈들은 목욕물을 데우랴, 음식을 대령하랴, 잠잘 곳을 만들어주랴, 다시 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누나에게 연락이 오지 않았을까 여신의 손거울을 확인해 보니….
[기영 씨?]
하는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
“…….”
“…….”
‘우리 현성이자너.’
김현성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
“…….”
스스로도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시작한다.
진짜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드라마 속 조연이 된 것은 아니다. 그림은 그렇게 보일지는 몰라도 정신이 퍼뜩 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래 시바. 내가 투자한 게 얼만데.’
하나밖에 없는 회귀자를 키우기 위해 그동안 개고생한 기억이 떠오른 것은 당연지사.
녀석을 구워삶기 위해서 얼마나 굴러다녔던가. 심지어 김현성 이 새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작 나가떨어져야 했던 돼지 새끼도, 그리고 우리 하얀이도, 튜토리얼 때부터 키워온 내 새끼들을 버리고 무슨 부귀영화 누리겠다고 빅보이 패밀리와 함께 오순도순….
‘거지 코스프레를 하고 있겠냐고… 그동안 고생한 게 다 뭣 때문이었는데. 시바.’
잠깐 감정적이 되기는 했지만, 그동안 투자했던 코인과 주식들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침투한 순간 벼락을 맞은 것마냥 제정신이 들어온다.
[급히 할 말이 있으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이 누나. 시바 김현성한테 연락 넣어 놓은 건 아니지?’
아무래도 누나가 이쪽을 주연으로 괜찮은 단편영화를 찍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지금까지 투자한 걸 생각하라는 거겠지. 정말로 이 모든 걸 내던져 버리고 녀석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 지혜 누나는 분명히 질문을 내던지고 있었다.
내가 어째서 여기까지 놈들을 따라왔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불분명했지만 이 질문에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놈들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
“…….”
은혜를 입었으니 보은을 할 차례였다.
“꼬맹아 목욕할 준비 됐냐?”
슬그머니 후드를 벗은 것은 당연지사.
조용히 나를 지켜보던 놈들의 얼굴이 조금씩 이상해지는 게 시야에 비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