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31화
1하얀(14)
“아. 우리 꼬맹이 간만에 나왔는데 햄비어 좀 입에 물려 줘야 되지 않겠어?”
“무슨 날인지… 오늘따라 전부 다 품절이더라고….”
“제기랄.”
‘아니, 무슨 또 햄비어야.’
“여기 직원들한테… 말 좀 해놓으면 가져와 주지 않을까?”
“병실도 빌려 쓰고 신세 지는 것만으로도 눈치 보이는데… 파란 길드 직원들을 부려먹자고? 이 새끼 이거 이게 다 공짜인 줄 아는 모양이네. 이거 다 빚이야 인마.”
‘빚 아니야. 이 새끼들아.’
“대형길드 놈들이 얼마나 악착같은 놈들인데. 우리 꼬맹이 후원해 준다는 것도, 그리고 그걸 빌미로 우리가 여기에 체류하는 비용이랑, 쓰는 비용이랑 전부 다 계산하고 있을걸? 마탑에 꽂아준 거야 우리 능력으로 안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손을 안 벌린다는 느낌으로 가야지. 안 그러면 괜히 나중에 발목 잡힌다. 그게 이 새끼들 수법이야.”
“…….”
‘그냥 혜지니 재량이자너.’
“그게 아니라면 우리 같은 놈들한테도 이렇게 잘해줄 필요가 없다고.”
물론 그럴듯한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여러 일터를 전전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저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냥 기분 좋게 파란 길드의 호의를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분명 있겠지만 꼬맹이가 지고 있는 빚을 본인들이 최대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겠지.
학자금 대출에서 허덕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너무 오바하고 있는 것 같아. 게다가 그거 전부 다 무용지물 됐자너.’
“하….”
“뭐… 뭐야. 왜 그래? 또 꼬맹이는….”
“전부 다 빚이라면 이번에는 엄청 빚진 거겠네요. 이곳 병실을 사용하는 비용이랑, 또 파란 길드 사제들의 도움까지 받았다면서요.”
“어… 어… 그, 그… 그건 그렇지만….”
“형들 생각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하는 게 좋다고요. 너무 위험한 일이면 안 받는 게 좋고요. 원래 일을 고를 때는 신중히 한다면서요. 그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라고 해놓고서는 뭐예요. 이렇게 다치기나 하고… 뭐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요?”
“이, 이번에는 말이다. 그냥 운이 없어서 그래… 우리도 다 생각이….”
“됐어요. 빅보이 형은 가만히 누워 계세요.”
빅보이가 입을 다물자, 눈치를 보던 칼턴이 입을 열어온다.
“그, 그런데 정하얀 님.”
“아… 네?”
본인에게 화살표가 돌아올지 몰랐던 정하얀은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지만 앞서 느꼈던 것처럼 이런 분위기를 꽤 편안하게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꼬맹이가 정말로 천재가 맞습니까?”
‘아니 시바 그런 것 좀 물어보지 말라고.’
“천, 천재의 기준을 어떻게 둬야 될지 모르겠어서… 확, 확실한 건 재능이 있다는 거예요. 오히려 마탑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나이가 어려서… 마력이 올라오지 않았지만… 아마 3년? 아니, 5년만 지나도….”
“…….”
“…….”
“들, 들었어? 유진?”
“그… 그래. 나도 들었다. 칼턴. 우리 꼬맹이가 천재란다.”
‘아니, 잘 모르겠다잖아. 갑자기 왜 또 천재 설로 가는 건데?’
“흐… 흐흐흐흐흐흐….”
“아니, 이, 이럴 게 아니라 한 잔 받으시죠. 정하얀 님.”
“아, 아니요… 저는 술을 잘 못 먹어서….”
2회 차 하얀이는 잘 마시던데.
“그럼 아무 음료라도 사다 드려야 되나?”
“전부 술밖에 안 사 왔는데. 미치겠네. 지금 또 나가?”
“아,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요.”
침상에 누워 있는 빅보이가 딴지를 건다.
“그러게… 여러 가지로 응? 종류별로 팍팍 담아서 사 왔어야지. 이 새끼들은… 상 차린 게 그게 뭐야?”
“형은 좀 가만히 계세요.”
물론 녀석을 닥치게 만드는 것은 꼬맹이의 역할이다.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튀어나오고, 처음에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녀석들에게 술이 한두 잔씩 들어가기 시작하자, 어느새 분위기가 풀어진다. 정하얀도 이제는 긴장한 기색이 없다.
워낙 친화력이 좋은 녀석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하얀이 이쪽에 마음을 조금 주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을 안 마신다는 그녀 역시 조금씩 홀짝홀짝 싸구려 럼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살짝 얼굴이 벌게져 있는 그녀에게 술이 조금 더 들어가자 역시나 그간에 묵혀왔던 속마음이 튀어나온다.
“잘, 잘못되어 있어요.”
“…….”
“지, 지금의 마탑은 잘못되어 있다고요! 진리를 찾기 위해 공부하고 또 공부하던 마법사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나요! 지금의 마법사들을 마법사가 아니라 그저 전쟁 도구일 뿐이에요. 깨, 깨어 있는 마법사들이 없다고요!”
누가 묻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마탑이 겪고 있는 문제를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네. 그렇고말고요.”
“아암. 그렇고말고. 마법사들이 타락한 지 좀 됐지. 물론 모든 마법사들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나 때는 말이야. 원정이나 던전으로 갈 때 여러 가지 마법을 익히고 있는 마법사들이 많았다고. 근데 요즘은?”
“…….”
“그런 마법사들을 구하기 힘들뿐더러, 공격마법 하나를 더 외워야지 하는 놈들이 수두룩해. 화력이 높다는 건 좋다 이거야. 근데 마법사의 역할은 그것뿐만이 아니잖아. 던전의 유물을 연구한다든가, 숨겨진 비밀을 풀기 위해 던전에 들어가는 마법사들은 없다고.”
“…….”
“전부 다 돈이야. 돈. 파티에서 마법사가 필요하면 돈부터 내라는 식이라고… 생각해 봐. 유진. 요즘에 먼저 던전으로 가자고 말하는 마법사들 찾아본 적 있어? 원래 마법사들이 제일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게 정석 아니었어? 마법사가 돈 주고 용병들을 구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 말이야.”
“제, 제 말이 그 말이에요! 아티팩트 연구나, 고대 유물이나 숨겨져 있는 지식을 찾기 위해 활동하는 마법사들이 더 이상 없다고요!”
심지어 생각보다 죽이 잘 맞는다.
“마법사는 전쟁 도구가 아니에요! 물론… 물론…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 균형이 너무나도 치우쳐져 있는 느낌이라고요.”
“좀 속물들이 많기는 하지.”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튀어나온다. 처음에는 분명 칼턴과 유진, 빅보이가 말이 더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정하얀이 말이 더 많다.
“연구하는 시간도 아까워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쓸데없는 논문 쓰지 말라고 하고… 이, 이럴 거면 마탑이 무슨 필요가 있겠냐고욧!”
“정하얀 님 말이 옳지!”
“아암. 아암!”
‘심지어 이 새끼들 안 취했어.’
왜 자꾸 정하얀이 접대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까. 정하얀의 잔이 빌세라 잔을 채우는 칼턴과, 혹여나 안주가 떨어질까 깨끗한 앞 접시에 안주를 차곡차곡 담고 있는 칼턴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걸 보고 있자면 누가 봐도 이 새끼들이 정하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냥 전쟁 마법사 전문 양성소라고요!”
“그렇지!”
“그렇죠! 그 말이 맞습니다요! 정하얀 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요!”
“아암! 그렇고말고! 그거지!”
그 모습이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정하얀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결국에는 짧은 식사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 것은 당연지사. 해가 지고 나서도 몇 시간이 더 넘게 이어진 술자리 끝에….
“아… 이, 이제 가 봐야겠네요.”
정하얀이 자리에 마지막을 고했다. 당연히 빅보이, 칼턴, 유진은 이쪽과 외박이 가능한지 묻고 싶은 모양새였지만, 안 그래도 정하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들이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무엇보다….
‘내가 이 새끼들이랑 같이 있기 싫자너. 시바 꼴 보기도 싫자너.’
지금은 정하얀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더 중요했다.
“그럼… 또 보자고.”
“다음에 또 나올게요.”
“다음이 언젠데?”
“아마 그렇게 멀지 않을 거예요. 정기휴가 같은 것도 있는 모양이니까. 이번 같은 식으로 만나지만 않으면 돼요. 제발 몸부터 좀 챙기시라고요.”
“그래. 인마. 우리 생각은 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니네 생각 하나도 안 해. 이 새끼들아.’
빅보이, 칼턴, 유진과는 마지막 포옹으로 짧은 작별인사를 끝내고, 정하얀과 함께 파란 길드를 나선다.
워프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상쾌한 공기가 필요했는지, 걸음을 옮기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살짝 볼이 붉어진 모양새, 후아후아 하며 숨을 고르고 있다. 당연히 감사의 인사를 보낼 수밖에 없는 타이밍이었다. 조금 쑥스럽지만 용기를 냈다는 느낌으로 말이다.
“저… 정하얀 님 감사합니다.”
어색한 침묵을 깬 한마디였다.
‘우리 이제 베프되는 각이자너.’
“뭘, 뭘요.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그리고 저도 즐거웠던 걸요.”
“…….”
“좋은 가족들을 두셨네요.”
“…….”
“친형제이신가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쟤네랑 나랑 너무 다르게 생기지 않았어?’
“아니요. 그, 그러니까… 저를 구해주신 분들이에요.”
“아!”
“가족은 아니지만… 가족 같은 형들이에요.”
정하얀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저는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따지고 보면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은 형들이지만… 빅보이 형이 그랬어요. 그런 걸로 너무 기죽지 말라고.”
당연히 빅보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하래요. 형도 가족이 없었대요.”
순식간에 빅보이를 고아로 만들어버렸다.
“다른 사람들이랑 다르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가족을 선택할 수 있으니까 오히려 운이 좋은 거래요.”
방금 내가 지어낸 소리다.
“소중한 사람이면 전부 가족이래요. 자기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면 된데요.”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정하얀이 더 잘 깨닫고 있을 것이다.
‘기죽지 말어.’
그녀 역시 가족을 선택할 수 있을 터였다. 따지고 보면 2하얀도 본인이 가족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가.
자신을 버린 부모님이나 언니들보다는 한소라와 이기영이 그녀의 가족이다. 나 역시 그녀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고 말이다.
1하얀 역시 마찬가지, 여기서도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김아영? 기에나 할머니?’
“정하얀 님도 소중한 사람이 있나요?”
내 질문에 정하얀은 곰곰이 생각하다.
“…….”
“…….”
사랑에 빠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1기영이랑은 이미 접촉한 건가.’
접촉 타이밍이 늦춰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모양, 자주 만나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1기영을 알고 있다.
내 예상이 틀렸을 수도 있었지만 볼을 붉히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지금 그녀가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1기영일 거라는 확신이 선다.
‘최근에는 전혀 접촉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가?’
저번 죽음도 녀석이 관련이 있는 걸까?
아직 정확히, 얼마나 가까워진 건지, 어느 정도 관계를 구축했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가 지금 건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이번 만남도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을 터, 지금도 입가에 미소를 보이는 것을 보면 그녀가 현재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좋은 말 고마워요.”
꽤 예쁜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1하얀을 조금은 보듬어 줬다고 생각했었지만….
이 주일 후,
“…….”
“…….”
정하얀은 다시 한번 목을 매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