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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329화 (1,32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329화

1하얀(12)

닫혀 있는 문밖에서 기에나 할머니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면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어지간히 속이 시원했던 것인지 평소 조곤조곤하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정말로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매번 제멋대로에 골칫거리였던 손녀딸이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해 보면….

‘뭐 그럴 만하자너.’

정하얀의 당황하던 얼굴도 떠올랐을 것이고, 자신의 설득을 가볍게 무시하던 정하얀에 대한 통쾌함도 있었을 것이다.

기에나 할머니 역시 정하얀에게는 이렇게 눈치 없는 캐릭터가 필요했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 역할을 본인이 할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이었겠지만 정하얀과 기에나 할머니는 입장상 그리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더 이상 정하얀을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갑작스레 나타난 그 새끼, 애새끼영.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바라보고 있자면 더욱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지금까지 겪은 적이 없는 일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말로 당황한 얼굴이다. 더불어 그 얼굴 한편에는 수치심마저 보인다.

그야 마치 쓰레기장 같은 방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누구라고 해도 마치 발가벗겨진 것 같은 기분을 떨쳐내기 힘들겠지.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

이런 건 남의 도움 없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건데.

본인이 변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 이전에 산처럼 쌓여 있는 물건들은 정리할 의욕을 포기하게 만든다.

아마 정하얀 역시 방 안이 이 꼴이 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이걸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고 있었겠지.

“경, 경비를 부, 부, 부를 거예요! 나, 나가세요! 용건이 있다면… 나중에 정식으로 문의를….”

‘아직도 저런 소리를 하고 있자너.’

“지금 뭐 하고 계시는 건, 건가요!”

‘뭐 하고 있기는. 청소하고 있자너.’

모두에게 통용되는 소리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가끔은 환경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때가 있다.

이런 곳에서 사는 것보다 그래도 깔끔한 곳에서 사는 게 그녀의 정신건강에 좋을 거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청, 청소는 하려고 했어요! 최, 최근에 너무 바빠서… 제가 할 테니까… 이, 이런 일 부탁드린 적 없다고요.”

“그럼 같이 해요!”

정하얀이 뭐라고 소리치든 간에 이 눈치 없는 꼬맹이는 멈추지 않는다.

“아… 그, 그건 거기다가 두면 안 되는데! 아아!”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정리에 진심인 꼬맹이는 그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논문이나 기록들은 여기에다 두면 되고….’

“그건 버리면 안… 안 돼요!”

‘아니 뭘 버리면 안 돼. 어떻게 봐도 그냥 쓰레기구만. 좀 버려. 제발. 제발 좀 버려.’

그나마 주기적으로 클린 마법을 외워주고 있기는 했는지, 냄새가 나거나 바퀴벌레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그게 아니었다면 나도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단시간 내에 해결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기틀이 잡힌다.

물론 기틀만 잡힌다뿐이다. 아직까지 쓰레기의 산을 파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로프 있는 서랍 쪽은 괜히 건드리지 말고….’

아. 창문 여는 걸 깜빡했네.

창문을 열자 오랜만에 상쾌한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금 어두웠던 방 안에도 빛이 들어선다.

“연구 자료들은 이쪽에 놓을게요, 정하얀 님!”

“…….”

“사적인 물품들은 이쪽에 넣어둘 테니까 정리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내… 내가 전부 다 치우려고 했는데….”

“…….”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동적이었던 정하얀의 움직임이 점점 적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유의미한 변화였다. 옆에 있는 꼬맹이가 신경 쓰이기도 했겠지만 도저히 손을 쓸 수 없어 보였던 방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 것이다.

정하얀의 눈에도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지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먹다 남은 음식들을 봉투 안에 넣거나 본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따로 챙기기 시작한다.

정하얀이 스스로 움직이며 땀을 흘려본 지가 얼마나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마에 땀을 훔치며 어느새 방 정리에 열을 올리는 중, 심지어 주도적으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그건 그쪽에 모아둘 거예요.”

“네.”

“연구자료들도 구분해야 하는데….”

“제가 분야별로 정리해 놨어요!”

“아… 다, 다행이다.”

“이건 버려도 될까요?”

“안, 안 돼요. 버리면… 버리는 건 안 돼요.”

‘도대체 왜 이렇게 안 버리려고 하는 거야? 누가 봐도 쓰레긴데 왜 간직하려고 하는 건데.’

“공, 공간 확장마법을 사용해서 창고를 따로 만들어야겠어요.”

“아… 네.”

“이… 이렇게.”

“이쪽에 만들어 놓으시는 게 편하실 거예요. 창고 같은 경우에는 많이 사용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아니면 차라리 커다란 서랍을 입구로 확장마법을 걸어두시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좋겠네요.”

주문을 외우기 전에 슬쩍슬쩍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반짝이는 꼬맹이의 눈을 본 것일까. 따로 설명을 하거나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조용하고 천천히 스펠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쪽이 마법을 알아보기 쉽게 배려한 것이 분명하리라.

“캐비닛 쪽에 확장마법은….”

‘심지어 기회도 주려고 하자너.’

“아… 제, 제가 해봐도 괜찮을까요?”

‘조금 버벅거리는 게 좋겠지.’

“아… 아니,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잘, 잘 봐요. 아직 마력이 부족해서… 그, 그러는 것 같은데. 마법진을 활용해도 되니까. 제가 도와 드릴….”

“아… 네. 네.”

큰 마력이 드는 것도 아니었고, 주문 자체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무사히 캐비닛에 확장마법이 들어간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정하얀의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구만리였다.

정하얀이 컬렉션이라고 부르고, 내 눈에 쓰레기로 보이는 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도 일, 그나마 비슷한 특징을 가진 쓰레기들이 꾸역꾸역 모아놓자 그럴듯한 모습이 되기는 한다.

“앞으로는 저런 물건들은 이쪽에 모아놓는 거로 해요.”

정하얀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멍하니 자신의 컬렉션을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2하얀도 저런 면이 있지.’

거의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 보니 정하얀이 산처럼 모아놓은 쓰레기들은 대부분 작동되지 않은 고대의 아티팩트들이었다.

물론 아무리 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기는 했지만 그녀에게는 소중한 물건들인 모양, 2하얀이 한소라가 만들어준 굿즈들을 애지중지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실수로 아티팩트 하나를 떨어뜨리자.

“아아! 이, 이걸 떨어뜨리면 어떻게 해요!”

하는 노호성이 들려왔다.

‘아니, 그렇게 소중한 거면 왜 땅바닥에 굴러다니게 했냐고. 도대체 뭐가 그렇게 소중한 거라고 화까지 내고 그래.’

“아아… 흠집이라도 났으면 어떻게 해. 저, 저리 비켜보세요. 이쪽은 제가 정리할 테니까.”

그래도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꼬맹이에게 화를 내는 건 너무 하다는 자각이 있기는 했는지 급하게 흥분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컬렉션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몇 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렇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차도가 빠르다.

정하얀 본인이 열정적으로 임해주고 있다 보니, 처음 그 쓰레기장은 어느새 온데간데없다.

캐비닛에 있는 컬렉션 진열장도 나름 멋들어진 모습이었고, 혹시나 보존마법까지 걸어주는 모양새.

한차례 밀린 일들을 전부 끝내 놓은 사람처럼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한껏 숨을 들이마시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온다.

‘어때? 하면 되자너.’

“…….”

“…….”

‘상쾌하지?’

“…….”

“…….”

정하얀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은 세세하게 정리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하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감돈다.

당연히 이다음은 자신을 도와준 꼬맹이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할 차례, 정하얀은 쑥스러운 듯했지만 그래도 조용히 입을 열어왔다.

“고마워요.”

라고 말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네… 네?”

“기에나 스승님께서 정하얀 님의 연구보조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들을 도와주라고 하셨거든요.”

“아… 사, 사실 필요 없기는 한데….”

‘아니, 필요 없는 수준이 아니었는데?’

“스승님께서 많은 것들을 배우면 좋을 것 같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기에나 할머니를 스승님이라고 꼬박꼬박 부르는 게 중요하다. 그게 정하얀과의 거리를 좁혀줄 테니까 말이다.

여느 때처럼 재능 있는 마법사들이나 많은 후원을 받고 들어온 수습마법사들을 제자로 들이게 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연구보조로 가끔 들를 거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맞다.

제자를 들이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는 정하얀도 어느 정도는 수긍한 모습, 실제로 도움이 되기도 했고, 이 꼬맹이는 생각보다 더 유능하고 똑똑하니 말이다.

사실 애새끼영의 재능을 그 누구보다도 먼저 확인한 것이 정하얀이 아니었던가.

함께 마법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꽤 즐겁기도 했고,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나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였으니 나쁘지 않은 제안일지도 모른다.

물론, 정하얀은 머뭇거리고 있었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는 것이 불편한 건지, 두려운 건지, 어쩌면 너무 빠르게 다가가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며칠에 한 번씩 찾아올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에나 할머니에게도 배워야 할 게 많아서….”

“…….”

“…….”

“아… 네. 그, 그 정도라면… 저, 저도 궁금한 점이 몇 가지 있어서….”

‘여기서 퇴장하는 게 좋나? 이제 거의 다 봤나.’

“그럼 오늘은….”

이라고 말을 꺼내려고 했을 때.

“밥… 밥 같이 먹을래요?”

라고 말을 이어나가는 정하얀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뭐?’

“아,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여기서 같이 먹어요.”

‘그래. 이건 당연히 해줬어야지. 그냥 보냈으면 진짜 양심 없는 거지. 이게 한국인의 정이지. 시바. 다른 건 안 해줘도 밥은 먹이고 보내줘야지.’

그나마 2회 차보다는 사회성이 있다. 타인에게 먼저 밥 먹고 가라고 말하는 정하얀이라니… 그녀의 성장에 눈물이 날 것만 같다.

“별… 별거 없기는 한데… 시간이 늦어서… 조금 그렇기도 하고….”

‘아무렴. 뭐라도 다 괜찮아. 햄비어보다 안 좋겠어?’

“기, 기다리세요.”

“네.”

그렇게 멍하니 정하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위에서 올라온 음식인가 싶어 정하얀이 천천히 문을 열었을 때.

“어?”

조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박주화의 얼굴이 눈에 보였다.

정하얀의 방문을 직접 두드렸다니 이해가 되는 모습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어 보인다.

정하얀은 평소대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고,

“죄송합니다. 정하얀 님. 혹시… 안에….”

“네? 아… 네.”

“죄송합니다. 정하얀 님께 용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 일단… 파란 길드에서 온 급보입니다. 저… 그러니까. 보호자분이….”

“네?”

“…….”

“…….”

“누구요?”

“빅보이 님께서… 치명상을 입고 의식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다.

“어… 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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