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25화
1하얀(8)
‘시바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내가 생각했던 그림은 분명히 이게 아닌데. 문자 몇 마디로 위로 아닌 위로를 받고 출발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친한 사람들이랑 한 번씩 연락 주고받고 재충전하면서 대륙을 구하기 위해 시바 숭고하고 고독한 출정을 떠나고 싶었던 건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제동이 걸려 버렸다.
“이 새끼… 정신병을 고치려고 간 게 아니라 정신이 나가려고 간 거 아닐까?”
-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주 화기애애하고 난리 났네.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배알이 꼴린다. 서둘러 다시 한번.
[현성 씨? 뭐 하시고 계세요?]
라고 베톡을 보내봤지만 이번에는 확인하지도 않고 있다. 분명히 오른쪽 허벅지에서 진동을 느꼈을 터였다.
녀석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주머니로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은 결국 여신의 손거울을 확인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대상과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 손거울을 확인하거나 하는 것은 매너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아프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이기영의 대한 매너가 가장 중요한 것이 국룰이 아니었던가. 저녁 식사에서 갖춰야 할 매너 따위보다 더욱더 중요한 매너였다.
‘시바 이 새끼 이러는 거 보니까 다 때려치우고 싶어지자너.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거기 가서 개고생을…….’
현자타임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지만 정상참작의 여지는 있다. 애써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 저런 행동을 한 이유가 설명이 가능하다.
“…….”
“…….”
‘그냥 빨리 돌아오고 싶은 거겠지.’
-하하하하하! 현성 씨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아시는군요.
-하하….
‘그래서 대충 맞춰주는 거겠지.’
지금 김현성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저 공간에서 나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차도가 있어야 하고 의존증 같은 부분에서 큰 진전이 있었다고 의사에게 피력하는 것이 중요했으니 말이다.
일반적인 식사 자리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됐다고 말하는 자리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지 않아도 돌팔이 박사 놈이 솔루션 중에 하나로 거리 두기 운동을 제안한 상황이었으니 저런 상황에서 이기영의 문자에 허겁지겁 칼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가 없다.
예의 그 의존증 같은 것들이 다시 발현되었다고 광고를 하는 꼴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김현성의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 하하하하.
-많이 좋아지신 것 같군요. 하하하….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아… 네.
‘정신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거 맞기는 하지?’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시바 근데 용서할 수는 없자너.’
다 큰 성인 기영이는 용서해도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애기영은 시바 절대로 용서 못 하자너.
정상참작의 여지는 없다. 곧바로 베톡에서 녀석을 차단하고, 모든 SNS에서 녀석의 계정을 차단하는 것으로 마무리.
아예 회사설도 끊어버리고 싶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어린 기영이는 그 정도로 모질지 못하다. 확실한 것은 이후에 김현성이 대가를 받을 거라는 것 하나였다.
심지어 착해 보였던 박사님 또한 돌팔이 새끼처럼 비치기 시작한다. 무언가 커다란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새끼 혹시 악마 관계자 혹은 문어 촉수 관계자가 아닐까.
김현성의 농담에 배꼽 빠지게 웃는 것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했다.
“…….”
“…….”
‘아니야. 시바 이러지 말자.’
지금 당장 김현성을 심판하고 싶기는 했지만….
‘그래도 지가 변하고 싶어서 간 건데 뭐 어떻게 하겠어.’
물론 완전히 치료되는 걸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게 김현성의 자존감 올리기에 도움이 된다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허용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1회 차의 김현성을 보고 온 이후라 더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어쩌면 이번이 녀석의 첫 휴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1회 차와 2회 차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성찰할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다.
녀석의 20대에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전쟁과 싸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그래도 시바 용서가 안 돼.’
[응원하겠습니다.^^]
같은 문자나 한 통 넣어 주면 좋아 죽겠지.
“…….”
“…….”
망원경을 돌려 버린 이후에 천천히 마법사의 탑으로 향한 것은 당연지사. 물론 기분이 편치는 않았다.
‘뭔가 찜찜하자너.’
이대로 떠나기에는 조금… 찝찝하자너.
손거울에서 진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서둘러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빠?
-…….
-오빠? 뭐예요?
-아니, 누나. 안 그래도 내가 연락하려고 했었는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있잖아. 김현성 이 새끼가….
‘챙겨주는 거 지혜 누나밖에 없자너.’
-아니, 김현성 이야기 말고요. 그 멍청이가 또 무슨 멍청한 짓을 했는지 듣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그거 말고 할 말 없어요?
-갑자기 왜?
-왜긴 왜요? 혜지니가 사색이 돼서 전화를 했으니까 그렇죠. 갑자기 혜진이한테 안아달라고 말했다면서요. 뭐예요? 갑자기. 몸도 어려지더니 정신도 어려진 거예요? 이거 오빠 아니잖아. 무슨 애마냥….
-…….
-진짜?
-아니,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영향이 없지는 않은 것 같네. 1회 차에서 조금 기분 나쁜 일이 있었거든.
-이 오빠 봐. 진짜로 부정 안 하네….
-오히려 조금은 받아들이는 편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악물고 부정해 봐야 도움도 안 돼. 그래도 컨트롤할 수 있는 범주 내에도 있고,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네.
-아이구 그랬쪄요? 우리 기영이 오빠. 힘들었어요?
-놀리지 마. 누나.
-놀리는 거 아니에요. 아예 농이 안 들어간 건 아닌데 오빠가 힘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아무튼 들어보니까. 아예 다운된 건 아닌 것 같아서 안심은 되네요.
-그럼 뭐. 당장 죽으려고 하는 줄 알았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에 따라 다르죠. 저도 오빠가 애처럼 변한 것 같다는 건 대충 느끼고 있었으니까. 진군사 놀릴 때야 항상 유치해졌었지만 이번에는 특히나 더 유치했었잖아요. 거의 베니고어 님이랑 수준이 비슷해진 것 같았을 때부터 예상하기는 했어요.
-설마.
-아무튼 힘내요.
-…….
-뭐 힘들면 그만두라느니, 다 포기해도 된다느니 같은 말은 안 할래.
-…….
-어차피 진심으로 들리지도 않을 테고, 어려지건, 힘들건 간에 오빠가 책임져야 하는 일은 있으니까요.
‘이 누나는 이럴 줄 알았자너.’
-대신 응원 정도는 해줄게요.
-…….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달려갈 거고.
-…….
-그리고 언제나 말했지만 저는 오빠 믿어요~ 혹시나 잘못되면 복수는 해줄 테니까. 안심하라고요.
-누나가 그런 말 하면 진짜로 무섭더라.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 농담은 하지 마.
-아무튼 얼굴 한번 보자고요. 내가 갈까? 아니면 오빠가 올래요?
-아니, 굳이 올 필요 없어. 어차피 금방 갈 거라서.
-에이 뭐예요. 내 입장에서는 얼마 안 됐지만, 오빠 입장에서는 얼굴 본 지 한참 됐을 텐데… 한번 봐야 하지 않겠어요? 나만 보자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한번 모여요. 어차피 마법진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잖아. 오빠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 멍청이한테 면회하자는 명목으로 한번 모이자고요. 오빠가 좋아하는 돼지가 맛있는 거 먹는 것도 같이 구경하고… 와인도 한잔하고….
-…….
-돌팔이의 거리두기 운동이야 그냥 말 한마디 하면 끝날 거 알잖아요. 오빠 은근히 의존증 있는 거 알죠?
-내가?
-안 그런 척하면서 사람들한테 많이 의지하잖아. 내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겠지만 오빠도 다른 사람들한테, 특히 김현성한테 의존하고 있다니까.
-무슨 멍청한 소리야?
-이 오빠 좀 봐. 내가 바보인 줄 아나 봐. 한 배에서 나온 쌍둥이 아가들도 서로가 없으면 허전함을 느낀다고 한다던데…. 세라핌이랑 케루빔 보면 몰라요? 근데 당신들이야 오죽하겠어요?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면서요. 처음부터 없었으면 몰라도, 그런 유대감으로 한 번 묶이면 절대로 예전으로는 못 돌아가요. 김현성이야 멍청하고 유약해서 그걸 못 버티고 티 내고 있는 거고…. 오빠는 아닌 거고….
-…….
-솔직한 생각을 말해볼까요?
-…….
-오빠가 어려져서 감정이 컨트롤되지 않는 것도 맞지만, 1회 차로 넘어간 것도 없지 않아 영향이 있을 거예요. 연결되어 있는 게 끊어지지는 않겠지만 뒤죽박죽 되어버린 시간선을 넘으면서 일시적으로 약해지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
-김현성한테는 그 시간이 찰나이겠지만… 오빠한테는 아니잖아요? 이번에는 얼마나 오래 있다가 왔어요? 일주일? 한 달? 그리고…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있다가 다시 돌아올 생각인 건데요? 1년? 2년? 그다음에는 또 얼마나 있다가 올 건데요?
-누나 망상도 진짜 가지가지 한다.
-망상이라고 생각해요. 난 내 생각이 별로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하거든. 어차피 내가 뭐라고 해봤자. 오빠가 한 번 마음 먹은 건 안 변할 거라는 걸 알지만…. 제 입장에서는 짧게나마 다 같이 모여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봐요. 애초에 정신과 치료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게 좋다고요. 정신이 연결되어 있는 두 사람한테 거리를 두라는 게 말이에요, 방귀예요? 물론 그 돌팔이 박사야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언제는 해야 된다며. 김현성 제정신 아니라고 난리 칠 때는 언제고.
-아! 그때는 오빠가 심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그렇죠! 1회 차로 가게 될지도 몰랐고! 어려진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될지도 몰랐으니까 그랬지!
-누나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야?
-참… 말이 안 통하네. 됐어요. 시발 말을 말아야지. 아… 아무튼 저도 오빠 보고 싶다고요.
-…….
-…….
-말은 고마워. 단짝.
-진짜 멍청하다니까. 됐어요.
-…….
-내 단짝. 이번에도 무사히 돌아오기나 해요.
‘이 누나 걱정 많이 하는 것 같자너.’
솔직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 맛에 어리광부리는 건가 싶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누나의 추측이 맞고 틀리고와는 관계없이 말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인사를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조금 더 있기야 했지만 곧바로 마탑으로 향한 이후에 마법진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한 번 사용되고 파괴되어야 하는 육망성 마법진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정확히 어느 시점으로 가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이곳으로 넘어왔을 때와 같다.
1회 차에서 뭔가 오류가 있었고, 그걸 수정해야 한다면 이 마법진이 나를 알아서 적절한 시간대로 옮겨줄 것이다. 시간선은 뒤죽박죽이었지만 적어도 이 육망성과 내 이해관계는 일치한다고 장담할 수 있다.
구멍 난 대륙의 서사를 메우고 오류를 수정하는 것.
작금의 상황을 오류라고 인지하고 있다면, 내가 할 일이야 뻔했다.
그리고.
[답장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잠깐 일이 있어서…. 아무튼 기영 씨.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도… 응원하겠습니다.]
문자가 도착했다.
“…….”
‘그래도 역시 얼굴 한 번은 보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는데.’
“…….”
‘누나랑 하얀이랑, 현성이랑, 돼지 새끼랑, 희영 씨랑 혜진이랑, 다른 길드원들도 전부 다 모여서 식사 한 번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좋지 않은 타이밍이고 휴식을 할 입장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다 함께 모이는 자리를 만들어 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면회 일정에 대해서….]
막 답장을 하려던 찰나에.
곧바로 시야가 뒤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