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18화
1하얀(1)
‘도대체 정하얀을 왜 살려?’
첫 번째로 든 것은 의문이었다.
‘도대체 왜?’
조금 미안한 발언이기는 했지만 정하얀의 퇴장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일이었다.
1회 차를 관통하는 가장 큰 서사 중 하나였으며 가면 쓰레기의 계획 중에 가장 길고,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그녀는 외신들과 인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유일한 패이자 키였고, 현시점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지상전을 해상전으로 뒤바꾸고, 린델을 통째로 텔레포트 시킨 업적은 두말하면 입 아프다.
1회 차에서 신에게 가장 근접한 것은 김현성도, 이기영도 아닌 정하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은 필수 불가결했다.
‘세계관의 최강자였으니까.’
정하얀의 퇴장 시기 역시 무척이나 시기적절했다는 거다.
인류와 외신들이 서로 치고받고 있었던 타이밍이었고, 서로가 가진 자원을 모두 쏟아붓고 있었던 타이밍, 1기영과 1지혜가 이제야 자신들이 대륙을 컨트롤 할 수 있다고 느꼈을 때, 정하얀은 무대에서 내려갔다.
이윽고 이지혜 역시 무대에서 내려간 이후 1기영의 회귀 계획은 시작된다.
아니, 이미 한참 전에 시작은 되고 있었겠지만 본격적으로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신호탄을 던진 것은 돼지 새끼였고, 녀석을 건진 것은 카스가노 유노였다. 결단을 내리게 결심하게 만든 것은 이지혜였던 것 같았지만, 돼지 새끼부터 이지혜까지 가는 배에는 정하얀이 탑승해 있었다.
그녀는 선원이 아니라 승객이었다. 언젠가는 내보내야 하는 승객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정하얀을 살려야 한단다. 각 진영의 힘을 조율하고, 외신전을 끝의 끝까지 이끌고 간 이후에 퇴장해야 하는 정하얀을 살리고 싶단다.
‘말도 안 돼.’
혹시나 뭔가 착각한 것이 아닐까. 혹은 조혜진이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혹시나 1하얀의 퇴장 시기에 문제나 생기나? 당장 문제가 생길 일이 있어서… 그걸 해결해야 하는 건가?
일단은 조혜진을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
“…….”
“그게… 도대체 뭔 소리예요?”
“그걸 저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합니까? 부길드마스터가 말한 건데.”
“확실히 그렇게 말한 거 맞아요?”
“네.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얀이를 살린다고요? 이번에만?”
“네? 이번에만 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정확한 워딩이 어떻게 된다고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씀드리면 부길드마스터가 헤르엔에서 자신을 구출해 마탑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연유를 물어봤지만 하얀 씨를 살려야 한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표정이 어땠는데요?”
“글쎄요. 평소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만… 제게 육망성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주신 이후에는 갑작스레 사라지셨습니다. 바쁘다고 하시고는….”
“정말로 저였어요? 혹시 저랑 닮은 사람은 아니었나요? 저보다 조금 더 살이 빠진 것처럼 보인다거나….”
“아니요. 지금보다는 약간 자라신 것 같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부길드마스터였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어째서 미래의 제가 그런 말을 던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
조혜진은 궁금증이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것저것 물어오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상해.’
확실히 이상해.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정하얀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무대에서 퇴장하는 순서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정하얀이 죽은 걸 보고 온 건가?’
지금부터 더 미래에 있는 시간 선에 있는 이기영이 정하얀의 죽음을 바라보고 과거에서부터 문제를 고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현시점에서 정하얀이 죽는다는 건 1회 차가 터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니 미래의 내가 다급해질 만했다.
문제는 정하얀의 죽음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것.
‘누가 정하얀을 죽일 수 있는데?’
도대체 어떤 사고가 나야 마법의 신이 죽을 수 있는 건데?
생각나는 것은 1기영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1기영이 정하얀을 당장 퇴장시킬 만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녀석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정하얀은 이미 손안으로 들어온 패였고, 녀석은 그 패를 던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
다른 녀석도 아니고 1기영이라면 자기 손으로 버리기 전까지는 절대 그녀를 잃지 않을 것이다.
“…….”
“…….”
정하얀이 일찍 무대에서 퇴장하는 가설이 들어맞지 않는다면….
‘그냥 변심인 건가….’
가져다 붙일 이유는 많다.
그냥… 중요 서사가 뒤바뀌어도 올바른 미래로 향하는 게 가능한 건지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갑자기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판을 뒤집어 보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확률은 낮지만 그냥 1회차 정하얀에 대한 동정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생각이 정리가 된 겁니까?”
“아니요. 아직.”
‘생각해 보면 정하얀이 그렇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정하얀이 정확한 타이밍에 퇴장해야 하는 것 하나다.
그 방법이 꼭 죽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죽은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고, 아예 사라졌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인이 어찌 됐건 간에, 미래의 이기영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렸든 간에 확실한 것은 정답은 마법사의 탑에 있다는 것 하나였다.
때마침 이야기를 마친 빅보이와 칼턴 유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후우… 후우….”
잔뜩 성이 난 것만 같은 얼굴, 이번에는 정말로 서로 치고받았는지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승자는….
‘빅보이인 것 같자너….’
아니나 다를까 사뭇 당당하게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거기에 다짜고짜 말을 걸어온다.
“조혜진 님.”
“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무래도 그 제안을 거절해야겠습니다.”
“…….”
“알고 계시겠지만 최근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터라… 당연히 파란이나 조혜진 님의 의도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같은 놈들에게 과할 정도로 잘해주시는 것도… 또 꼬맹이를 생각해 이렇게 좋은 제안을 주시는 것도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일단 곧바로 다음 행선지를 정하는 것보다는 저희끼리 천천히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가지고 싶습니다.”
‘정론이네.’
“솔직히 말해서, 대륙의 미래니, 린델의 미래니 하는 것들은 저희 같은 하루살이들한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대국적인 차원에서는 당연히 조혜진 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이 맞지만….”
‘이 새끼 왜 이렇게 말을 잘해?’
“솔직히 저희 꼬맹이를 전쟁에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꼭 그런 의미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빅보이 님. 아시다시피 마법사의 탑에서는 살상마법 외에도 여러 가지 마법을….”
“정하얀 님께서도 결국 전쟁에 참여했잖습니까.”
“그건….”
“조혜진 님. 우리 꼬맹이는 말입니다.”
‘낯 간지러워 이 새끼야.’
“조금 상처가 많습니다.”
“…….”
“…….”
‘여기서 신파 드라마 찍지 마.’
“아직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 꼬맹이는 쉴 시간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빅보이… 너 이 새끼….’
녀석의 말은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다. 중간에 말이 막혔는지 조금 말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나가기는 했지만 진심은 틀림없이 전해져 온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녀석의 말이 조혜진에게 먹히고 있다는 것. 도대체 뭐에 꽂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조혜진 역시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쉴 시간 필요 없어.’
“…….”
“…….”
칼턴과 유진 역시 녀석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 같은 모양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녀석의 허락 따위는 필요 없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 말이다.
“가고 싶어요.”
“…….”
“…….”
“마법사의 탑에… 가고 싶어요.”
미지의 학문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 그리고 꿈에 대한 갈망.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너… 너 꼬맹이 이 새끼. 지금….”
“갈 거예요. 가고 싶어요.”
갑작스레 찾아온 아들의 첫 반항에 당황하는 아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아마 저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사춘기자너.’
“너 지금 내가 무슨 심정으로….”
“형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갈 거예요. 마법사의 탑으로.”
“…….”
“전쟁터에 서게 돼도 상관없어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
“제가 꼭 지켜드리겠다고 말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듯한 눈빛. 담담한 어조.’
“…….”
“…….”
“이… 이 건방진 꼬맹이 새끼가… 누가 네 도움이 필요한 줄 알아?!”
“…….”
“네 나이 때는 말이다. 원래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 게 정상이라고! 아무리 미쳐 버린 곳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그냥 즐겁게 뛰어노는 게 전부야. 엉? 누굴 지키겠다느니 어딜 건방지게 그런 소리를 해?”
“저는… 이미 결정했어요. 형.”
“뭐?”
“미안해요. 빅보이 형. 하지만 꼭… 꼭 가고 싶어요.”
이 싸구려 신파극에 이 배우의 연기력을 선보여야 한다는 것이 가슴이 아프다.
“제…기랄. 이 건방진 꼬맹이 놈이.”
“죄송해요. 형.”
“네 마음대로 해!”
라는 말을 내뱉으며 문을 쾅! 닫아버리는 것까지 완벽하다. 어처구니없다는 것은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는 것까지.
아니나 다를까 칼턴과 유진이 내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왔다.
“너무 마음 쓰지 마라 꼬맹아. 어차피 빅보이도 그냥 던진 소리였으니까. 우리 모두 네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고… 물론 빅보이도 동의한 내용이고. 하하하핫. 괜히 네가 자랑스러워서 그러는 거야.”
‘이 새끼들아 너희들 싸구려 신파극에 신물이 난다. 진짜.’
“드디어 자기 의지로 건방지게 그런 말을 뱉는 게 자랑스러운 거지. 나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널 믿는다. 이렇게 슬슬 어른이 되어가는 거지. 지켜주겠다는 둥, 뭐 힘이 되겠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하기에는 우리가 아직 팔팔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빛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고. 하핫.”
멀쩡한 정신으로 듣기에 부끄러운 대사들이었지만 녀석들은 이게 낭만이라고 생각하는지 거침없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노예 소년이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를 확고하게 말한 것이 그리 자랑스러운 걸까.
심지어 칼턴 녀석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새끼들 도대체 왜 이래….’
미쳐 버린 분위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지경.
심지어 방문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빅보이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설상가상으로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아….’
“지팡이다.”
‘이건 또 언제 준비했어? 어떻게 봐도 싸구려는 아닌데.’
“나는 네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말이다.”
‘쫌 하지 마. 얘들아. 이런 드라마 찍지 말라고.’
“그러니까… 열… 열심히 하든가 말든가 해라….”
부끄럽다는 듯이 손에 지팡이를 꽉 쥐여주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녀석, 어차피 조금 있다 방에서 볼 건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소년 만화의 주인공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마냥 커다랗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네!”
“…….”
“…….”
그리고 정확히 십여 일이 지난 이후,
마법사의 노예였던 꼬맹이는 마법사의 탑으로 향하게 된다.
빵 동생을 잃은 김현성이 다시금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