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314화
마법사의 탑(27)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노예기영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평소의 빅보이가 알 던 꼬맹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마치 약에 취한 것만 같은 표정도, 평소보다 더욱더 하이하게 올라간 말투도, 붉게 빛나고 있는 인장도, 모든 정황이 지금의 꼬맹이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모든 지표가 꼬맹이의 최면각인이 발동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난 이미 제정신이 아니자너.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자너.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중이자너.’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빅보이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하고, 침통하고, 그리고 약간의 후회와 자조가 섞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실제로 꼬맹이가 자신과 함께 있으면 불행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지라 더욱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 그리고 정말로 꼬맹이의 말이 사실일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 정말로 나와 있을 때 이 꼬맹이가 행복했을까에 대한 의문.
여기저기에서 날아 들어오는 검과 화살 마법보다, 꼬맹이의 한마디가 빅보이를 더욱더 아프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리라.
당연히 송수경은 비릿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이 새끼 진짜 취미 나쁘자너.’
은근슬쩍 꼬맹이를 자신의 옆에 두려는 포지션을 취하는 행동조차 빅보이를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쓸데없는 전쟁에서 자신이 이겼다는 것을 구태여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가히 찐따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어질 정도였다.
“듣지 마! 빅보이!”
“…….”
“진심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잖아.”
“나도… 나도 알고 있다. 제기랄.”
“저 개자식들이 꼬맹이를 노예의 인장을 이용해서 꼬맹이를 세뇌한 거라고!”
“나도 알고 있다니까! 이 새끼들아!”
알고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혼란스러움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완벽했던 연계가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대열이 흐트러져 있었던 송수경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다시금 대열을 정비한다.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빅보이와 유진을 밀어내고 방진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빅보이와 유진, 칼턴이 수적 열세에서도 그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저 기사들이 갑작스러운 기습에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상황이 어둡지 않았거나,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송수경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노예 꼬맹이의 충성심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상한 주문을 해오는 것이 들려온다.
“어떻습니까? 당신이 원한다면 그들에게 돌려보내 드릴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주인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 기영이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나 다름이 없다.
“싫… 싫어요!”
“히히하하하 네? 정말입니까?”
“너무너무… 너무너무 싫어요!! 저는 주인님이랑만 있을 거예요! 주인님 곁에만 있을 거예요! 떨어지기 싫다고요! 제발… 제발요! 보내지 말아주세요!”
“히하하하하하 그렇습니까?”
“저… 저 형들은 매일매일 혼자 내버려 두기만 하고….”
‘그러게 왜 혼자 내버려 둔 거냐고! 젠장! 애기영은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단 말이야!’
“맛도 없는 햄비어 고기만 줬다고요! 주인님은 다르잖아요! 계속 곁에 있어 주실 거잖아요! 그렇죠?”
‘햄비어만 처먹였다고!’
“매일 방도 어지럽히고! 냄새나고! 저는 주인님이 좋아요! 주인님과 영원히 함께할 거예요!”
‘진심 반 거짓 반 펀치!’
빅보이의 가슴은 찢어질 수밖에 없다. 설정상 꼬맹이가 험한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끝났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저 자리에서 곧바로 무너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송수경이 입 찢어진다. 입 찢어져.’
빅보이는 애써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
“…….”
‘아… 안 돼.’
너무 뻔하다고.
‘이미 써먹었다고….’
여기서 이것까지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에바라고.
‘똑같은 거 도대체 언제까지 할 거냐고….’
하지만 클리셰는 지지 않는다. 명작의 탄생을 위해서라면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강행해야 할 때가 있고, 그 타이밍이 지금 눈앞에 있다.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신체가 반응하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악어의 눈물이라고….’
눈물을 흘릴까 흘리지 않을까 고민도 하기 이전에 이미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헤… 헤헤… 저는 주인님이 좋아요!”
라고 말하면서도 꾸역꾸역 눈은 눈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저는 주인님과 평생 함께할 거라고요!”
라고 기쁘게 웃으면서도 눈에서는 왈칵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멍청해요! 멍청한 형들이랑은 같이 있기 싫어요! 매일매일 집 안에 내버려 두는 형들이랑은 더는 같이 있기 싫어요!”
‘들리니? 빅보이? 마음의 소리가? 내 눈물이 보이니?’
“저는 주인님과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저는 주인님을 위해서 태어났으니 주인님께 봉사할 거예요!”
“너… 꼬맹이… 너….”
‘내 눈물이 보이냐고.’
“더 이상 아무 생각하지 않고 주인님을 모실 거예요! 저는 주인님을 지킬 거에요! 그 누구도 제게서 주인님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요!”
텐션이 올라간 목소리가 서글프게 들려오는 것은 눈물 때문일까.
‘당연히 먹힐 줄 알았다고….’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엄청난 포텐을 보여주고 있는 연기라 자부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애매하지만 무언가 벽을 넘은 듯한 느낌. 아니, 우연이 만들어진 결과물일까. 기쁜 목소리에서 슬픔이 묻어나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세뇌당한 노예기영이의 목소리는 틀림없이 슬픔을 내뱉고 있었다.
구해달라고, 도와달라고, 형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시바… 이거자너.’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 빅보이 녀석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게 당연했다. 이미 노예기영의 모습을 보고서는 눈물 콧물 전부 흘리고 있는 중, 이 살얼음판에서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칼턴과 유진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기사들 몇몇과 마법사들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온갖 악독하고 잔악한 짓을 저지른 저 새끼들의 마음조차 울리고 있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저는… 저는 주인님을 가장 사랑해요!”
‘원맨쇼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됐다. 꼬맹아….”
“그러니까. 주인님과 저를 아무도 떨어뜨릴 수 없어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보이 형… 명대사 오졌자너.’
“흐윽… 끄으윽… 흐윽.”
눈물 때문인지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잔뜩 흥분해 있는 송수경의 표정은 너무나도 잘 시야에 비친다.
이 새끼야말로 피가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다.
분한 건지, 화가 난 건지 어떤 감정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쪽을 빼앗긴 기분이지 않을까.
비록 육체를 지배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어떤 한 부분이 빅보이 일행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 사뭇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원래 녀석 같은 놈들이 꼭 저렇다. 별것 아닌 일에 쉽게 흥분하고 쉽게 의미부여를 한다는 거지.
특히나 빼앗는 걸 좋아하면서 빼앗기는 것은 죽도록 싫어한다.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누가 봐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후우… 후우….”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보니 곧 폭발할 것 같은 모양새. 하지만 결국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와. 이걸 참내.’
그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놈은 빅보이 일행과 노예기영에게 가장 잔혹한 최후를 선물해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거… 별로 재미없어졌군요.”
‘입 근육 떨리는 거 봐. 소리 지르고 싶은데 참고 있는 거자너. 쟤 분명히 혼자 있었으면 소리 질렀어.’
“웃기지도 않은 신파극을 봐주는 것도 여기까지입니다.”
‘그 신파극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다? 바로 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노예는 이미 제 것인데.”
구태여 저런 대사를 치는 것을 보니 억울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죽이세요.”
“…….”
“…….”
‘악마 새끼 이거.’
극에 몰입하고 있었던 마법사와 기사들 또한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송수경을 바라본다.
비록 인신공양을 일삼는 저주받을 새끼들이었지만 꽃기영이 이끌어낸 작고 따뜻한 마음이, 이 새끼들이 최소한의 도리를 지키고 싶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빅보이 일행을 죽이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애초에 저 연쇄살인마 놈들이 누구를 죽이는 것에 거리끼겠는가.
다만, 노예기영이 저들을 죽이게 만든다는 것은 웬만한 사이코패스가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발상이다.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저들을 징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조금이나마 자신의 마음을 배신한 노예기영에게 내리는 벌이었을 것이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네… 네! 할 수 있어요!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손은 떨리고 있다.
“자아… 당신의 새로운 시작에 방해가 되는 버러지들입니다. 간단한 주문을 외우면 끝나겠죠?”
“네! 네… 네!”
천천히 주문을 외운다.
자꾸만 눈물이 왈칵왈칵 튀어나와 참을 수가 없다. 물론 그 와중에도 높은 텐션은 유지한다.
“주인님과의 새로운 시작을 방해하는 버러지들이에요! 죽어 마땅한 적들이에요! 주인님을 위협하는 악당들이라고요!”
마음의 망설임을 눈치채고 있던 것일까.
어느새 적들에게 궁지에 몰린 빅보이와 칼턴, 유진은 조용히 송수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목숨을 구걸하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이 더욱더 송수경의 성질을 건드렸는지 놈은 거칠게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죽이라고!”
“네! 명령에 따를 거예요!”
“세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하지만 주문을 외울 수밖에 없다. 노예기영은 주인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빅보이의 얼굴에도 어느새 체념이 들어서고 있었다. 칼턴과 유진 역시 마찬가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꼬맹아.”
“…….”
“행복해야 한다.”
“…….”
“꼭.”
노예기영의 손에서 뻗어 나간 마법이 빅보이의 옆에 있던 기사의 몸에 적중했다.
우연에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물. 명령을 수행하려고 했던 꼬맹이의 손이 흔들렸을 뿐이다.
한순간이었지만 빅보이를 위하는 꼬맹이의 마음이 노예낙인을 이겨냈다는 숨겨진 설정이 숨어 있었지만 이 사실을 송수경이 알 리 만무.
크게 당황하는 놈의 표정이 보이기가 무섭게….
‘아직 지지 않은 거냐고!’
빅보이가 몸을 일으켰다.
이 타이밍을 놓칠 정도로 녀석은 멍청하지 않다. 곧바로 기사가 가지고 있는 도끼를 들어 올리고 우당탕탕 몸을 날려 마법사의 얼굴에 도끼를 찍는다.
칼턴은 장화에 숨겨진 단검을 기사의 갑옷 이음새에 밀어 넣는다.
“제길!”
하는 송수경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빅보이가 커다란 도끼를 녀석의 어깨에 집어 던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히으아으으으윽!”
‘비명 소리 뭔데! 시바!’
콰직 하고 어깻죽지에 깊게 틀어박힌 도끼.
“제길… 제길! 히이익… 으아아아아!”
삼류 악당답게 곧바로 꽁지 빠지게 도망치려 발악하는 꼴도 추하기 짝이 없어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어졌을 때.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를 기억한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김현성의 발걸음 소리처럼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