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98화
마법사의 탑(11)
혹자는 너무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니냐며 감독을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본래 이렇게 정 없고, 아포칼립스를 생각나게 하는 막장 세계관이야말로 동화 같은 이야기가 잘 먹히는 법이다.
게다가 타겟층이 꿈 많은 놈으로 자란 20대의 김현성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욱더 이 이야기가 들어맞는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애는 시바 원래 이런 거 좋아한다고. 얘는 대놓고 밝고 희망찬 게 취향이라고.’
소년 만화 주인공 클리셰는 너무 흔하기는 하지만….
언제나 왕도는 패배하는 법이 없다.
이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는 대충 머릿속에 구상되어 있는 상태, 일단 가장 어려운 플래그 꽂기를 달성했다는 생각이 들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첫 만남이 있었던 때부터 정확히 삼 일이 지난 시점, 일도 안 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김현성이 먹는 것이라고는 하루에 한 번 오두막에 들르는 꼬맹이가 준 빵 한 덩이가 전부였다.
꼬맹이의 주머니에서 빵이 무한으로 생성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일도 안 하고 빵만 얻어먹는 꼴은 가관이었다.
딱 보기에도 넉넉하지 않은 꼬맹이가 준 빵 한 덩이가 그리 탐이 났을까.
실의에 빠져 있는 녀석이었기에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지만, 양아치 같은 행보라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
-맛있네….
‘그럼 시바 맛이 있지. 맛이 없겠냐. 조금 더 그럴듯한 맛 평가는 없냐고… 그것도 꼭 내가 간 다음에 처먹더라.’
-…….
이 새끼는 빵만 처먹을 줄 알지, 거지 꼬맹이가 저런 멀쩡한 빵을 구하기 위한 여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귀하게 커서 그런가, 병에 걸린 소년이 이곳에서 얼마나 힘든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한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 와서도 엘리트 코스를 밟았느니 수박 겉핥기식으로는 알고 있겠지만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었겠지.
매일매일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빵을 훔치는 꼬맹이의 고난과 역경을 조금만 상상해 주면 좋으련만….
-맛있어.
심지어 사흘 전과 똑같은 대사를 치고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얻어맞아 가며 빵을 훔치고, 역겨운 놈, 역병에 걸린 놈이라 비난을 받으며 헤르엔의 길거리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비 맞은 꼴로 빵 한 덩이를 가지고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눈물이 다 흐를 정도이지 않은가.
‘내가 시바 사람을 잘못 본 거냐구….’
“…….”
‘이 새끼는 내가 진짜 무한의 빵 주머니라도 가지고 있는 줄 아는 거냐고.’
물론 가지고 있기야 했다.
눈앞에 있는 덩치 말이다.
“흐흐흐… 이 새끼 이거… 내일도 빵을 먹겠다고? 응? 빵이 그리 좋냐.”
‘이 새끼가 내 무한의 빵 주머니자너.’
“헤… 헤헤….”
“헤르엔에 오더니 아주 빵만 처먹네, 이 꼬맹이 새끼. 갑자기 지 입으로 사달라고 했을 때는 내 귀를 의심했는데 사주길 잘했어. 흐흐흐… 아껴 먹으라고 했더니 며칠도 안 돼서 이걸 다 비우는 거 봐. 이 조그만 뱃속에 그지 새끼가 들어 있나. 흐흐. 그 와중에 햄비어는 아껴먹으려고 꼭꼭 구석에 숨겨 놓은 거 보라고… 칼턴.”
“왜 눈치를 줘? 빅보이? 안 그래도 삐쩍 마른 애한테….”
“아니, 눈치를 준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지. 혹, 혹시 내가 한 말이 눈치를 준 거라고 들린 거면 그렇게 생각 안 해도 돼. 더 많이 먹어도 상관없다. 안, 안 그래, 유진?”
“맞아. 꼬맹아. 요즘 벌이가 꽤 좋거든. 이 방을 빵으로 가득 채워도 남을 만큼 주머니가 두둑하다니까. 네가 복덩이다. 이 자식아. 하하핫.”
“네?”
“믿거나 말거나지만 네가 온 이후로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어… 뭣보다 빅보이 저 녀석이 제대로 일이라는 걸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게 중요하다니까.”
“네?”
“저 녀석… 은근히 재능은 있는데 열정이 없는 타입이랄까. 좀 그런 느낌이었거든. 책임질 사람이 하나 생기니까. 이제야 드디어 제대로 할 마음이 든 거지. 덕분에 조금 바빠지기는 했지만….”
“그럼 내일도 나가시나요? 형?”
“그래. 인마.”
“아….”
“쯧. 일하러 가는 거니까. 어쩔 수 없다고.”
“그, 그래도… 매일매일 너무 힘드신 거 아닌가요… 그리고….”
“네가 좀 이해해 줘라. 꼬맹아.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 빅보이가 어떻게든 네 낙인을 지워주려고 그러는 거니까.”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유진! 내가 돈 벌어서 저런 꼬맹이 낙인 지워주는 데 쓸 것 같아? 다 따로 쓸데가 있어서 그렇지.”
“…….”
“…….”
“저… 저는 안 지워도… 그다지 상관없는데… 괜찮아요. 빅보이 형. 이거 돈도 많이 든다고 했었고… 쉽게 지워질지 아닐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너무 폐가 되는 것 같고….”
“뭐?!”
“저는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일, 일단 잠이나 자! 어린놈이 어디 건방지게….”
‘이 새끼는 민망하기만 하면 바로 화부터 내더라.’
이후로는 곧바로 떠들썩해지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왜 갑자기 화를 내냐는 둥, 꼬맹이 놀랐겠다는 둥, 같은 소리들 말이다.
그다음 벌어질 일도 뻔하다, 지들끼리 싸우더니 꼬맹이 동정여론이 만들어지고, 두서도 없이 역겨운 햄비어 고기를 입으로 쑤셔 넣겠지.
도대체 불쌍한 놈 입에 햄비어를 물리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의심스럽다.
“아무튼 간에 내일은 새벽부터 나가야 하니까.”
“새… 새벽부터요?”
“그래. 늦은 저녁 즈음이나 되어야 헤르엔으로 도착할 것 같은데… 좀 강행군이기는 해.”
“그런… 혹시 저도 따라가면 안 되나요?”
“쓰읍.”
“죄, 죄송해요.”
“아니, 네가 죄송할 건 없다. 방 안에 있는 게 조금 답답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이 생활이 계속 지속되지는 않으니까. 조금만 버티면 괜찮을 거다.”
“위험한 일은 아닌 거죠?”
“위험한 일이었으면 우리가 수락했겠냐고. 흐흐… 위험성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겠지만 평소 해오던 일에 비하면 안전한 편이니까 안심하라고… 별거 아니야. 그냥… 이번에 린델에서 했던 거랑 마찬가지로… 장물 몇 개 배달해 주면 되는 일이니까.”
“…….”
“그쪽에서 우리를 좋게 봐줬는지 잠깐 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더라고… 아. 이건 이야기해 줬었나.”
“…….”
“아무튼 간에 위험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린델까지 다녀오는 것도 아니고… 중간에 물건을 받아오는 것뿐이니까.”
“빅보이. 조용히 좀 해. 꼬맹이 자잖아.”
“흐흐… 이 꼬맹이 새끼 늦게까지 우리 기다리느라 피곤했나 봐, 칼턴.”
“얼굴만 봐도 피곤해 보이더만… 눈꺼풀이 떨어지는 거 안 보였어? 너도 빨리 자. 빅보이.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니까.”
“어엉.”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진 이후에는, 이윽고 사방팔방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바 잠들었어도 깼겠다.’
도대체 이 새끼들은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잠들 수 있을까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일이 고되다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장물을 배달하는 것 외에는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았지만 일단 도시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신경 쓰일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갑작스레 일어날 수 있는 전투에도 대비해야 하고 장물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그래도 명색이 모험가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육체적으로는 버틸 만하겠지만 그 물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 문제, 오죽했으면 분업을 해서 일을 하고 있을까.
마치 전문적인 택배회사에서 배달을 하는 것마냥, 녀석들의 이 장물 배달에 연루되어 있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다.
헤르엔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커다란 마차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놈들이 장물이라고 부르는 그 물건들은 헤르엔과 헤르엔 근처에 어딘가로 쉴 새 없이 여기저기로 배달되어 있었다.
‘지들이 뭔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뻔하지 않은가.
‘누가 봐도 수상하자너.’
100미터 뒤에서 봐도 수상한 그림이자너.
헤르엔 내부에 블랙마켓이 존재하고, 여러 가지 불법적인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맨 처음 린델에서 헤르엔까지 장물을 배달한 이래로 보여지고 있는 광경은 확실히 이질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마 이 일에 연루되어 있는 이들은 지금 헤르엔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이상하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을 확률도 크고 말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처음 물건을 공수하는 놈들, 중간에 배달하는 놈들, 또 중간에 받아 드는 놈들, 그걸 또 중간에 받아서 헤르엔에 전달하는 놈들, 또 그걸 경비를 뚫고 전달하는 놈들, 혼선을 주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가짜 장물을 배달하는 놈들도 정해져 있다.
모든 놈들이 이유도 모른 채로 톱니바퀴의 부품들처럼 움직이고 있었으니, 정확히 뭘 배달하는 건지, 어디서 어디로 오는 건지, 정확히 몇 명이나 이 일을 함께하는 건지, 어째서 헤르엔으로 가는 것인지 모르는 놈들이 대다수였다.
처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나 역시 가까이에서는 크게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완벽한 시스템 체계 아래에서 일반 모험가들을 골드로 부리고 있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정리하자면,
놈들이 배달하는 장물은 평범한 장물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확실하다고 확정 지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하필 김현성이 헤르엔으로 처박힌 타이밍에 헤르엔에서 이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이상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가면의 영웅밖에 없자너.’
물론 가면의 영웅의 목적이 단순히 김현성을 괴롭히는 것인지, 놈의 각성을 촉진시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뭐든지 도가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그냥 이 악물고 괴롭히면 그게 각성이 되겠냐고. 그냥 괴롭히는 거지. 시바.’
결국에는 헤르엔이 개판 나는 것 역시 예정되어 있다는 거다. 내가 스스로 개판을 낼 필요도 없이 알아서 개판이 날 테니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현성이를 케어하는 것이 맞는 선택이었다.
정체불명의 병든 소년이 준 빵은 그냥 빵이 아니라….
“맛있네….”
녀석의 정신을 부여잡아주는 포션 같은 개념이었으니 말이다.
빅보이 녀석들이 나를 내버려 두고 장물 배달을 나간 지 한 시간 후, 김현성과 만난 지는 고작 4일이 지난 시점,
고작 4일, 4일 만에 처음 말문을 여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눈빛이 죽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꼬맹이 앞에서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고무적이었다.
“…….”
“고맙다.”
양심이 남아 있기는 했는지 김현성이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정신없이 헤르엔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금화 주머니를 놓지 않았는지 금화 한 개를 내게 건네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이 새끼 진짜 멍청하네. 병든 소년 같은 최하층 계급에 있는 놈이 금화를 들고 다니면 어떻게 되겠어? 쓸 수는 있다고 생각함? 진심으로?’
당연히 고개를 도리도리 돌릴 수밖에 없었다. 병든 소년이 원하는 것은 금화가 아니었으니까.
“받아도 된단다. 고마움의 표시니까. 그리고 다음부터는 오지 않아도 돼.”
‘어딜 시바 금화 하나 주고 손절을 치려고.’
다시 한번 고개를 젓는다.
“말을 할 수 없는 거니?”
“…….”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글을 쓸 수는 있니?”
그 말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땅바닥에 글자를 새겨 넣는다.
[조금은요.]
“이름은?”
[업어요.]
본래 이름은 없는 게 국룰이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병든 소년의 이름은 이 새끼가 지어주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