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95화
마법사의 탑(8)
불현듯 톱니바퀴가 틀어졌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뭔가 문제 생긴 거 아니야? 제길! 칼턴! 뭐 아는 거 없어?!”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유난이야. 잠깐 멍 때린 거 가지고.’
“그걸 알면 내가 마법사를 하고 있지 활 질이나 하고 있겠어? 정확히 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였는데?”
“몰라. 갑자기 멍 때리더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어. 아직까지 노예 인장이 활성화되어 있는 건 아니지? 어? 그렇지? 어?”
“나도 모른다고 이 새끼야! 내가 어떻게 알겠어? 일단 확인 좀 해보자고.”
잘 가던 마차를 세운 이후 이야기를 나누던 칼턴과 유진, 빅보이 녀석이 마차 안으로 들이닥친다.
일언반구도 없이 상의를 들추고 한참이나 배를 들여다보기를 수십 분,
“형… 형?”
하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심각한 얼굴로 배를 확인한 이후에 다시 마차 밖으로 나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 상처는 뭐야…. 빅보이?”
“나도 몰라. 제길. 저 멍청한 꼬맹이가 노예 인장 뜯어내 보겠다고 자해라도 했나 보지. 아무튼 간에 뭐 아는 거 없냐고 이 새끼들아.”
“처음 보는 문양인 것 같은데….”
“당연히 다르겠지. 마도왕국에 뭔 마법사 새끼 노예였다잖아. 당연히 고급노예 아니겠어? 우리가 노예 인장을 전부 다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길… 색깔이 변하지 않은 건 확실해?”
“어. 색깔은 안 변했던 것 같은데.”
“온도는? 어땠는데? 평소보다 뜨거웠어?”
“그건 몰라. 확인 못 해봤어. 나도 갑자기 정신이 없어가지고….”
“그걸 확인해 봤어야지. 이 멍청한 새끼야.”
“빅보이….”
“왜 유진?”
“혹시 후유증 같은 거 아니야?”
“어?”
“주인이 죽어서 도망친 노예들이 인장 때문에 후유증을 가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는 것 같거든…. 그래서 다시 제 발로 노예시장으로 굴러 들어오는 놈들도 있다고….”
“뭐?”
“확실하게는 몰라…. 그냥 들어본 적이 있다는 거지. 노예 인장마다 성격이랑 용도가 다르다는 건 전부 알고 있을 테고…. 일단 꼬맹이가 전투 노예는 아닌 것처럼 보이니까. 처음 봤을 때도 노예치고는 엄청나게 말끔하게 관리도 되어 있었고… 아마 그 마법사 자식이 제법 아끼던 노예였던 거지. 단순히 멍 때리는 게 증상이라면 후유증이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기도 해.”
“그래서 결론이 뭐야.”
“아무래도… 저 인장은… 최면마법이나 세뇌마법이 들어가 있는 종류가 아닌가 싶다.”
“뭐?”
“갑자기 동공이 풀리고 멍하니 있는 증상이라면 그것밖에는 없겠지. 특히 마법사의 노예였다면 이런저런 실험에도 참가했을 테니까. 기억을 잃게 하거나… 성격을 바꾸거나, 아니면 인지능력이나 잘못된 관념 같은 걸 받아들이게 하는 편이 더 다루기 편했을 테니까. 그것도 아니라면…최면마법 자체를 실험하는 용도일 수도 있다고 봐.”
“그, 그딴 짓을 왜 하는 건데? 제길.”
“이유가 필요해? 이를테면 네가 도저히 견디기 힘든 실험을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도저히 제정신으로 하고 힘든 행위나 실험에 참가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최면을 거는 거야. 싫은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고, 하면 안 되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인 거고, 비인간적인 실험이 아니라 너무나 행복한 실험이라고… 사고를 뒤틀어 버리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하다고?”
“마법사 새끼들 몰라? 정하얀 만 해도 육지를 바다로 바꿔 버렸는데… 말이 더 필요해?”
“…….”
“아무튼 사람의 뇌를 건드리는 마법은 그만큼 예민하고… 어려운 작업이기는 할 거야. 일반적으로 그런 주문을 잘 못 걸면 폐인이 되어버릴 가능성도 높으니까. 실제로 그런 사례도 적지 않고… 일단 네가 의문을 느끼는 것처럼 일반적인 각인과도 많이 틀려… 아마 각인 자체를 새기는 것에도 어마어마한 시간을 들였을걸? 그만큼 그 개자식이 공을 들였다는 거 아니겠어?”
“씨… 씨X 그렇게 공을 들인 거면… 마도왕국에서 저 꼬맹이 새끼 찾으러 오는 거 아니야? 우리 지금 X나게 위험한 거 아니냐고.”
“입 닥쳐. 칼턴. 그럴 일 없으니까.”
“아니….”
“닥치라고! 이 새끼야.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유진?”
“글쎄… 각인을 지우면 해결되는 거 아닐까?”
“제기랄… 평범한 각인이 아니라며? 지울 수 있는 마법사는 찾을 수 있고?”
“돈으로 안되는 게 어디 있겠어? 마법사야 찾아보면 언젠가는 나올 거고… 그걸 우리가 감당할 수 있냐가 가장 큰 문제야. 일단은 다시 출발하자고… 지금 여기서 멈춰서 이렇게 우리끼리 이야기 해봤자 크게 달라지는 게 없을 테니까. 일단 돈이 필요한 건 맞잖아? 이번 일부터 마무리해야 되지 않겠어?”
‘아주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났자너.’
하지만 분위기는 그만큼 심각하다. 도대체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면마법에 의해 정신마저 온전치 않은 꼬맹이로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있는 모양.
물론 이쪽에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걱정 받는 포지션으로 점점 변모하고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고, 현재 내 보호자로 있는 얘네들한테 동정심을 유발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 안으로 들어온 빅보이 녀석과 유진이 침울해하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차마 뭐라고 말을 걸기 애매했는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할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마차 밖만 바라보고 있는 중, 누가 보면 얘네들이 최면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당연히 순진무구한 얼굴로 물어오는 것이 좋다.
“형… 무,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애써 밝은 미소를 보이며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는 녀석, 누가 봐도 사람을 위로하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보인다.
“뭐… 그… 그러니까….”
“네?”
“아니….”
“네… 네?”
“그, 그러니까! 누가 마차 안에서 멍 때리라고 그랬어?! 제기랄!”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출발하기 전에 말했잖아! 이건 장난이 아니라 원정이라고! 창밖을 잘 살펴보고 혹시 누가 오는 건 아닌지, 뭐 별다른 특이사항은 생기지 않았는지! 그걸 확인하라고 너를 데려온 거 아니야!”
“아! 죄… 죄송해요. 형.”
“제길! 이 도움이 안 되는 꼬맹이 새끼.”
“앞으로 열심히 할게요.”
오바하듯이 더욱더 열심히 마차 밖을 살펴보는 시늉을 하자 갑작스레 놈이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울적한 기분을 숨기기는 어려웠나 보다.
“제길… 햄비어 육포나 좀 가져와. 유진. 꼬맹이 좀 먹여야 될 것 같으니까.”
‘아니 주지 말라고.’
“햄…햄비어….”
“열심히 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주는 거야. 알아들어? 이 새끼. 이거 햄비어 이야기 나오자마자 눈 동그래지는 것 좀 보라고. 앞으로도 한눈 안 팔고 열심히 할 수 있지?”
“네… 네!”
다른 건 둘째 치고 시바 어째서 햄비어 고기에 환장한 꼬맹이 포지션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초파리가 날아다니는 소스가 부어져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일단은 그걸 받아들고 허겁지겁 목구멍에 집어넣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잠기는 동안 계속해서 이 지랄이 날 걸 생각하면 적어도 햄비어 고기에 집중하는 척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시바. 이 새끼들 때문에 생각도 제대로 못 하겠네.’
“유진! 햄비어 육포 좀 더 챙겨와. 이 꼬맹이 아주 환장하고 먹는다 야.”
“…….”
“숨 좀 쉬고 먹어라. 숨 좀 쉬고. 이놈아… 흐흐흐.”
‘냄새가 역해서 숨 참고 있는 거야. 이 새끼야.’
거기에….
‘시바…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냐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머릿속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
‘달라졌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1회 차가 달라졌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려오는 소문과 내가 직접 보았던 사건의 유사성이나… 김현성이 헤르엔 은거시기를 생각해보면 조혜진의 죽음이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꽤 신빙성 있는 이야기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흐름처럼 느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톱니바퀴가 틀어지고 있었다.
‘정하얀이 먼저 아니었나?’
김현성에게 대략적으로 들은 타임라인에서도 분명 정하얀이 먼저 죽었다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방금도 정하얀을 살펴보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망원경으로 마탑을 살펴보자 여전히 홀로 린델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분명히 살아 있어.’
틀림없이 정하얀은 살아 있다.
아니, 살아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직 그녀가 죽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다. 1회 차의 정하얀 그녀는 데우스엑스마키나 같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가면 쓰레기들의 입장에서도 그녀를 쉽게 쳐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린델이 무너지기 전까지 살아남는다. 지금과는 다르게 복구된 린델의 한가운데에서 마력폭탄과 함께 폭발한다.
김현성은 정하얀의 죽음을 빠르게 넘기기는 했지만 1회 차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의 초월적인 마법을 몇 번이나 입에 담았었고, 외신전에서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다.
이 막장에 치달은 1회 차를 외신과 공멸할 수 있을 정도로 버티려면 그녀의 존재를 필수불가결하다.
막말로 그녀가 없었다면 인류가 곧바로 무너져도 할 말이 없을 테니 말이다.
틀어진 톱니바퀴는….
‘정하얀보다 조혜진이 먼저 죽었다는 거?’
사건만 같을 뿐, 시기도 다르고 타임라인도 다르다. 중요한 사건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단순히 과정이 조금 틀어진 정진호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지금 내가 있는 1회 차는 엄밀히 말하면 김현성이 겪었던 1회 차가 아닐 수도 있다.
희생과 부활이 신이 서사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사에 편승하고 있는 것인지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역사가 같아진다는 것 역시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
애초 1회 차로 이동하는 이벤트는 내가 이 대륙을 독립시킬 생각이 없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같지만 다르고, 다르지만 같다.
평범한 사람의 시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한 차원 높은 시점으로 이해한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다.
이 세계는 현재 그렇게 조립되고, 재정비를 거치고 있었으니까.
그게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아니었던가.
일단 김현성이 정말로 헤르엔에서 은거를 하고 있는지 확인을 한 이후에,
정말로 조혜진이 죽었는지 확인하는 것이지 않을까.
‘직접 확인해 봐야 해.’
적어도 내 눈으로 직접 조혜진이 정말로 죽었는지 알아야 했다.
“흐… 흐흐흐. 좀 천천히 먹어라. 이놈아.”
“…….”
“볼에 가득 넣어 놓은 거 보라고. 햄비어가 그렇게 좋냐? 응?”
“…….”
“이 녀석 정신 놓을 거 보라고… 박스째로 챙겨왔으니까. 천천히 먹으라니까.”
‘중간에 빠져나가는 게 조금 어려울 것 같기는 한데….’
녀석들이 스스로 개연성을 갖춰주고 있었으니 별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헤… 헤헤헤….”
세뇌마법과 최면마법 각인이 계속해서 애새끼영을 괴롭히고 있다는 훌륭한 설정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