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93화
마법사의 탑(6)
물론 1회 차 서민들의 일상을 현장감 있게 엿 볼 수 있다는 면에서는 의미가 있는 외출이었겠지만 그건 방구석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별 관심도 없고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빅보이와 함께 외출하는 것이 아닌 정하얀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었지만 이 마음 따뜻한 녀석은 나와 떨어질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낮에는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밤에 혼자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는 거다.
현시점에 2회 차에서는 꼬맹이가 주점에 들어가는 건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법도 뭣도 없는 이곳에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모양.
심지어 빅보이 녀석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았다.
아마 그것보다는 칼턴과 유진의 반응을 더 신경 쓰고 있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고서는 빅보이를 바라보고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온다.
“푸…흐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핫!”
“뭐야? 푸…푸흐… 꼬맹이는 왜 데리고 왔어? 빅보이.”
“꺄하하하흐흐하하하! 내가 말했지? 저 새끼 분명히 데리고 올 거라고 했잖아. 빨리 내놔.”
“제길….”
심지어 이걸 주제로 내기라도 한 모양인지, 칼턴이 울상이 된 얼굴로 유진에게 동전을 건네는 것이 보인다.
“빅보이 이 병신 새끼 저거! 밤에 혼자 있는 게 뭔 대수라고 애를 데리고 와? 일 이야기 하러 간다는 거 못 들었어?”
“우리 꼬맹이가 신경 쓰인다잖아! 칼턴. 꺄하하하하하하하! 그렇게 싸고도는데 안 데리고 오겠어? 내가 말했지? 넌 어떻게 아직도 빅보이를 모르냐?”
“저 호구 새끼 제기랄!”
“입 닥쳐! 칼턴! 유진! 젠장!”
‘떠들썩하자너.’
당연하지만 나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보여주는 것이 옳다. 빅보이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그냥 싱글벙글 웃으며 상황을 지켜보는 게 올바른 포지션이 아닐까.
“이… 이것 좀 놔! 꼬맹아! 제길.”
“꺄하하흐하하하하하하! 너랑 떨어지기 싫대잖냐. 빅보이! 손이라도 꼭 잡아주는 게 어때?”
“제, 제기랄… 일단 가자고! 계속 여기에 있을 거야?!”
“저 새끼 말 돌리는 거 봐. 칼턴!”
“아니, 일단 가자니까! 이 새끼들아! 제길! 늦었다며!”
소리를 버럭 지른 빅보이 녀석이 칼턴과 유진을 지나쳐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지사.
이윽고 무너진 린델의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 본적이 있기는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복구 진행 속도가 빠르다.
어두운 거리를 야광주와 죽은 이들을 추모하는 촛불들이 밝히고 있었고, 생각보다 사람들도 많이 싸돌아다니고 있었다.
타 도시에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광장에서는 밤늦게까지 장사를 하는 장사치들이 있었고, 거리에는 술이나 약에 취한 사람들이 즐비해 있었다. 심지어 여기저기에서 고성이 들려온다.
‘술 취한 놈들끼리 싸우기라도 하고 있는 모양인 것 같자너.’
중간중간에 어린아이가 보면 안 되는 장면들이라도 있었는지 빅보이 녀석이 내 눈을 가린 것도 몇 차례, 진흙 바닥 때문에 자꾸만 발이 푹푹 들어가 기분이 나쁘질 즈음에 놈들이 광장 구석에 있는 주점을 바라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다 쓰러진 건물, 아니, 애초에 건물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그냥 나무 막대기 네 개를 꽂아 놓은 이후에 천막으로 대충 덮어 놓은 것 같은 모양새였으니까.
하지만 왠지 모르게 장소가 익숙하다.
‘자주 가던 곳 아니었나.’
장소가 다소 협소하기는 했지만 힙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즐겨 찾았던 바가 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조용한 음악 소리 대신에 떠들썩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퍽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2회 차로 돌아가면 꼭 들러야겠네.’
들른 지도 오래됐으니 말이다. 아무튼 간에 빅보이가 조심스럽게 천막을 걷은 이후 주점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빅보이!”
“빅보이 이 새끼! 왜 이렇게 오랜만이야?! 뒈진 줄 알았잖아! 이 새끼야!”
‘이 새끼… 친구 많나 보네.’
그럴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당발이었던 모양, 주점 안에 있는 모든 놈들이 놈에게 다가와 주먹을 내밀거나 격한 포옹을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직도 안 뒈지고 살아 있었어? 명 하나는 질기네.”
“내가 할 말이다. 젠장. 몇 놈 안 보이는 거 보니까 그새 또 뒈진 놈들이 있는 모양이네.”
“뭐. 운이 나빴지. 안 그래도 그놈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이렇게 매일 모이는 거 아니겠냐.”
“지랄은… 그냥 모여서 놀 구실이 필요한 거 아니고?”
“흐하하하핫! 너야말로 요즘 뭐 하고 지내? 매일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던 새끼가 왜 요즘은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사정이 길다. 굳이 떠들 만한 이야기도 아니고.”
“빅보이 오빠! 살아 있었구나!”
우당탕탕 달려 들어와 녀석에게 격한 포옹을 한 것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전사였다.
“어? 어! 야! 오지 마!”
당황하는 듯한 빅보이에게 몸통박치기를 하듯 달려든 이후에는 녀석의 얼굴을 꼬집는 것을 보니 꽤 사이가 깊은 모양이다.
“제길! 그만하라고! 메이플!”
‘빅보이랑 썸이라도 타나?’
“근데… 오빠. 못 보던 사이에 혹이 하나 붙었네? 뭐야 이 꼬마는?”
“어? 그러니까.”
“오빠… 혹시 내가 생각하는 거 아니지?”
“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취향은 일단 존중하지만 얘는 너무 어리고.”
“뭔 개 잡소리야! 그냥 사정이 있어서 잠깐 맡은 거라고! 어이 칼턴! 유진! 너희들이 와서 설명 좀 해줘라.”
“푸하하하하하하하핫!”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젠장!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그런 것치고는 꽤 즐거워 보이네요. 빅보이 씨.’
왜 이 새끼가 이 장소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분위기도 좋고….
‘뭔가 환영받는 것 같은 느낌도 들자너.’
무척 떠들썩하다. 절망밖에 보이지 않아 보였던 1회 차에서 유일하게 녀석 같은 놈들이 숨 쉴 수 있는 장소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죽었다는 것도 그냥 웃음으로 넘겨 버리고, 모두가 허물없이 친구처럼 지낸다.
어떤 사정을 가지고 있든, 어떤 사연을 가지고 있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함께 어울리면서 힘든 삶을 잊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녀석과 함께 있다는 이유하나만으로 놈들에게 환영받는 듯한 느낌.
“근데 너 너무 귀엽다. 누나랑 친구 할래?”
“뭐야?! 빅보이가 웬 꼬마랑 같이 왔다고? 이 새끼. 어디서 주워왔어?”
“알 필요 없잖아! 이 새끼야!”
“얼굴 좀 구경해 보자.”
“당장 꺼져! 이 새끼들아!”
“한잔해!”
“얘한테 술 주지 말라고! 이 꼬맹이한테 아무것도 주지 마!”
“뭐 어때!? 원래 다 이러면서 크는 거지.”
“젠장!”
“뭐야 소문의 우렁각시가 저 꼬맹이였어?”
“우렁각시는 개뿔 제기랄….”
‘진짜 정신없자너.’
자리로 이동하는 것만 해도 한참이나 걸릴 정도로 정신이 사납다. 여기저기서 밀려들고 있는 인파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겨우 의자에 당도할 수 있었다.
“벌써 마시고 있었어?”
“어? 빅보이!”
“캐넌 이 새끼 벌써 취해가지고 무슨 일 이야기를 하겠다고….”
“일단 앉아. 앉아. 뭐야? 저 꼬맹이는?”
“자세한 건 알 필요 없고 일단 일 이야기부터 해봐.”
“뭐가 그렇게 바빠?! 일단 마시다가 슬슬 이야기하는 거지. 응? 한 잔 받으라고.”
이윽고 시야에 비친 것은 왠지 모르게 익숙해 보이는 인형 둘, 아마 삼류도박사 조지와 난봉꾼 캐넌이라는 녀석들일 것이다.
듣기로는 놈들에게 일을 받기로 했다고 했으니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셈.
회의를 이런 주점에서 하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일단 마시는 게 우선인지, 일 이야기는 하지도 않는 놈들의 모습이 보인다.
유진과 칼턴은 오랜만에 만난 좋은 럼주라는 걸 목구멍에 계속해서 털어놓고 있었지만 빅보이는 침만 꼴딱꼴딱 삼켜 넘길 뿐,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있다.
아마 본인이 술에 취하면 안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안 마실 거야? 빅보이.”
“뭐야. 저 술고래가 술을 다 마다하네. 내일 하늘이라도 무너진대?”
“냅둬. 보호자가 되니까 이래저래 신경 쓸 게… 풉, 많은가 보지. 어이 꼬맹이 좀 먹이게 여기 햄비어 꼬치 좀 가지고 와줘!”
‘시바. 먹기 싫다고.’
“전… 전 괜찮아요.”
미안함 때문에 사양한다고 생각했는지 빅보이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잇는다.
“사양하지 말고 받아. 여기 햄비어가 아주 일품이거든.”
“오죽했으면 전쟁 끝나고 빅보이가 여기 주방장 살아 있는지 먼저 확인했겠냐고.”
‘아니, 시바 먹기 싫다니까.’
슬쩍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리자 100년 정도는 닦지 않았을 것 같은 철판 위에 햄비어 꼬치라는 걸 올리고 있는 주인장의 모습이 보인다.
초파리들이 날아다니고 있는 소스 통에 있는 소스를 햄비어 고기에 처바르는 것으로 마무리, 설마 저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기어코 빅보이 새끼는 내 입에 햄비어 꼬치를 물리고 있었다.
“어떠냐?”
‘시이바….’
“맛… 맛있네요.”
“흐… 그렇지?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양껏 먹으라고.”
당장 입안에 든 걸 토해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더 먹기를 바라는 눈치라 이를 악물고 역겨운 것을 삼켜 넘길 수밖에 없었다.
햄비어 고기로 내 시선을 돌렸다고 생각하는지, 빅보이 녀석과 난봉꾼 캐넌은 슬슬 세상 사는 이야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지만 내가 듣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곧 병력을 꾸릴 거라고 하더라고.”
“뭐? 전쟁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냐 아냐. 우리는 신경 안 써도 돼. 파란에서 아무래도 이 기회에 살라딘을 뿌리까지 뽑아버릴 모양인지, 놈들을 추격하고 있다고 들었거든. 이번 전쟁으로 그놈들도 피해를 많이 입었으니까. 그 새끼들 얼마 안 남았잖아. 아마 곧 소식이 들리지 않을까?”
“뭐 나쁜 소식은 아니네. 지긋지긋한 흑마법사 새끼들 더 이상 보기도 싫다고….”
파란의 김현성이 도망친 살라딘을 추격하고 있는 이야기라든가.
“뭔 미친놈들이 마탑에 오물 던지는 건 봤어?”
“병신들이지.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게 누구 때문인데…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게 어떻게 대마법사 탓이야?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는 말은 없다지만… 이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고.”
“정하얀 때문에 우리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거야. 그건 확실하다고.”
몇몇 놈들이 마탑과 정하얀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든지.
“공화국이랑 왕국연합도 재건 사업 중이라며?”
“피해가 컸으니까.”
다른 지역들 역시 모두 전쟁 피해의 복구로 열을 올리고 있다든지, 하는 크고 작은 정세의 이야기였다.
물론 이놈들의 정보력을 마냥 믿을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이런 뒷골목 정보들도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그래서… 물고 왔다는 일감은 뭔데? 슬슬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위험도는? 돈은 얼마나 만질 수 있는데?”
“역시 그게 궁금한 거구나? 새끼… 생각보다 짭짤할 거야. 물건 하나만 헤르엔까지 운송해 주면 돼. 보상은 한… 요 정도 돼고.”
“뭐?”
“쉿. 조용히.”
‘헤르엔이라고 하면….’
김현성의 회귀자 고백 이벤트가 있었던 곳이었다.
1회 차 때 녀석이 은거했던 장소.
“어디서 온 의뢰인데?”
“캐슬락에 작은 바위라고 알아?”
‘알지. 조혜진을 쫓아냈던 적폐 새끼들. 그 새끼들 여기서는 잘나가나 보네.’
“뭐야. 씨발. 장물이야?”
“쉿.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이 새끼야. 여기저기서 광고할 일 있어?”
“작은바위면 이 새끼야. 블랙마켓 관련된 일 아니냐고.”
“그러니까. 골드를 많이 주지. 너 돈 필요한 거 아니었어? 그리고 우리가 언제 좋은 일 나쁜 일 따졌어? 돈 되면 그냥 하는 거지. 원래는 다른 파티에 맡기려고 했는데 칼턴이랑 유진이 네가 요즘 돈 쓸 데가 많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뭐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는 개뿔. 중개수수료 좀 많이 챙겨 달라는 거겠지.”
“아무튼 간에 할 거야 말 거야?”
“하… 시발 이제 위험한 일에서는 손 떼려고 하는데.”
“이게 뭐가 위험한 일이야? 그쪽 경비병들이랑은 이미 다 말되어 있어. 그냥 물건만 운송해 주면 된다고….”
“하….”
깊은 고민에 빠진 빅보이가 슬그머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히 찝찝할 것이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아무런 리스크 없이 저렇게 큰돈을 줄 리는 없을 테니까. 웬만해서는 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요즘 돈 들어갈 데가 많자너.’
입장상 거절할 수 없을 것이다. 원래 애를 키우다 보면 이것저것 들어갈 돈들이 많을 테니 말이다.
“딱 한 번만이다.”
“잘 생각했어. 빅보이.”
그렇게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얼떨결에 파티의 행선지가 헤르엔으로 결정됐다.
“…….”
“…….”
그리고,
정확히 출발을 앞둔 사흘 뒤,
조혜진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