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8화
마법사의 탑(1)
‘하얀이밖에 더 있어?’
물론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높다. 확실하게 하얀이의 이야기일 거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 현상이 1회 차의 주요 서사나 주요인물들을 위주로 돌아간다고 가정한다면 떠오르는 사람이 그녀 외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마탑의 상징적인 존재였고, 1회 차에 이어 2회 차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인물이었으니 말이다.
‘1회 차에서는 분명… 계속 마탑에 쳐 박혀 있었다고 했었나?’
튜토리얼에서 공략조가 아니라 생존조로 빠져나온 이후에는 쭉 마탑에서 생활해 왔던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황상 어떤 길드에게도 컨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마탑 영감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래도 눈이 옹이구멍은 아닌 할배가 몇몇은 있었을 테니까.’
아무튼 튜토리얼을 빠져나온 정하얀은 그 이후로도 대외적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다.
마탑에서 의도적으로 그녀를 숨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숨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정하얀은 여단과의 전쟁, 플레이어들과 원주민들과의 전쟁, 국가와 국가의 전쟁, 도시와 도시의 전쟁, 그 어떤 전투도 참가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륙의 발전을 위한 마법을 계속해서 연구할 뿐,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 그녀를 끌어들인 것은 김현성을 필두로 한 몇몇의 인원들, 이유야 어찌 됐건 간에 정하얀은 이후 이 선택을 후회하고 괴로워했다.
정진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야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녀의 일대기를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녀의 최후는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후우… 후우… 오빠도 알아줄 거야.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줄 거야. 내가 죽, 죽었다는 걸 알면 평생 기억해 주겠지? 어쩌면 후, 후, 후회할지도 몰라. 슬퍼할지도 몰라… 나는 사라지지만 평생 기억 속에 남을 수도 있을 거야. 잊혀지는 것보다는 그게 더 나아. 응. 그, 그게 더 나아… 다음 생에서도 우리는 만날 거니까. 오빠가 그렇게 이야기했으니까. 으응… 맞아.’
‘…….’
‘아니야. 어, 어쩌면 구해주러 나타날지도 몰라. 오, 오빠는 항상 내, 내가 괴로워할 때 와줬으니까. 갑자기 짠하고 나타나 줄지도 모르잖아.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히끅… 어쩌면 그럴 수도… 히끅… 흐으으으윽… 히끅….’
아직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기억이었다.
물론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고, 1회 차와 2회 차는 분리해야 한다는 걸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정하얀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이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광경을 보는 것은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심장 한 구석이 저리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
하얀이에게는 과거의 모습보다 저런 모습이 잘 어울린다.
“오, 오, 오빠!”
여전히 활짝 웃고 있는 모습 말이다. 그동안 밀린 업무를 하고 있었던 건지 여기저기에서 마력의 흔적들이 떠다니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무, 무슨 일이세요. 이, 이렇게 갑자기.”
당연히 게이트를 보러오기는 했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얘를 더 기분 좋게 만드는 말이 있자너.
“갑자기 하얀이가 보고 싶어서….”
“…….”
“…….”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꼬리를 실실 올리는 모습이 눈에 띈다.
당연하지만 내 한쪽 팔을 꽉 잡아 오기까지. 이미 근력 수치가 웬만한 하급 전사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에 한쪽 팔이 비명을 내지른다.
“히…히힛… 헤…헤헤….”
‘시바 하얀아 나… 너무 아파.’
“히… 히히히… 힛….”
‘부러질 것 같자너.’
처음 튜토리얼을 진행했을 때도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더욱더 강해졌다. 정하얀이야 모르고 있겠지만 아마 팔에 정하얀의 손바닥 자국의 멍이 들어 있을 것이다.
“미, 미리 말하셨으면… 여, 여러 가지로 준, 준비해 놨을 텐데….”
“그냥… 하얀이도 바쁘니까. 폐 끼치기 싫어서 그랬지. 그런데… 요즘 어때? 유소년 교육시설 일이랑 대륙 마력 관리까지 해야 되는데….”
“아! 그건 괜찮아요. 소, 소라가 많이 도와주니까요. 사, 사실 유소년 교육시설에 방위마법을 구축하는 건… 간, 간단한 일이라서… 최근에는 대륙 전체에 희미하게 마력 반응이 일어나고 있어서… 그걸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그, 그리고… 창렬 씨랑… 예, 예리 일도 도와주고 있구….”
“아아….”
“네. 감시 수정구에 있었던 그, 그 사람… 아, 아직도 소재가 파악되지 않아서….”
‘육망성 똘마니… 새끼… 그러고 보니까 그놈도 있었지.’
아직까지 꼬리가 밟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희미한 마력 반응은 아마… 게이트인 것 같고….’
“마력 반응 건은 좀 어때?”
“아, 아직은 지켜보고 있는 중이에요. 안정화시키면서… 걱,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희미한 반응일 뿐이라… 아직 동결시키거나 하지 않, 않아도 될 것 같거든요. 그래도 변화하는 수치는 계속 예의주시하고 있어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게이트에 대해 상담하고 싶기는 하지만….
‘일단 이 건이 끝나야 상담하든지 말든지 하겠지.’
정말로 1회 차의 정하얀과 만날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이곳의 정하얀을 데려가는 것은 이롭지 않을 테니 말이다.
도플갱어 둘이 만나면 죽는다는 시답지 않은 괴담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냥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고 싶을 뿐이니까.
기본적으로 하얀이의 상태가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위험한 범위 내에 있다. 어떤 이유로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만큼 마탑에 관련된 게이트까지는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새삼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좋아졌자너.’
김현성에게도 한소라를 분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정하얀의 사회성이 물이 올랐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마탑에 영감들과도 친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고… 작은 범위 내에서의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이전처럼 극단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물론 내게 추적마법을 필두로 한 창의적인 스토킹 마법들을 걸어두기는 했지만 본인 나름대로의 철칙이라도 생겼는지 힘을 크게 남용하지는 않았다.
물론 내가 눈치채지 못한 곳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지금의 정하얀은 정상과 꽤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한소라나 나 둘 모두가 없는 상황에서는 예전과 같이 행동하지만 말이다.
‘그래두 이게 어디야.’
여전히 재잘재잘 떠들기 여념이 없는 모습,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정하얀의 머리까지 가는 거리가 꽤 멀다.
슬쩍 팔을 뻗자 은근슬쩍 본인이 머리를 들이대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 그런데 오빠… 조, 조금 자란 것 같네요?”
“그래?”
“네. 분명히 자랐어요. 한 0.5㎝ 정도… 정확히… 0.6… 정도 자란 것 같아요. 손가락도 살짝 더 길어졌고….”
“나는 잘 모르겠는데.”
“분명 자라고 있어요! 신, 신기하다. 오빠의 성장 과정을 직접 옆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보고 싶네.”
“재, 재미없었을 거예요. 저는… 어, 어렸을 때는 별로….”
“왜? 그때도 귀여웠을 것 같고 지금은 이렇게 예쁜데.”
‘하얀아. 시바 팔 아파.’
남은 한쪽 팔에도 멍이 들게 생겼다.
아무튼 간에 잡담은 여기에서 마무리, 본래는 곧바로 게이트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많이 지나 버렸다.
타이밍 좋게 한소라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정, 정하얀 님… 저 탑주님들이 잠깐 뵙자고 하시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아! 소라야! 안 그래도….”
“급한 일인가 봐요.”
“지, 지금은 오빠랑 같이 있어서….”
“아. 그러면 그렇게 전해드릴까요?”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것 같았지만… 답은 의외로 쉽게 나온다.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매력을 어필한 이유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갑작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어, 어쩔 수 없네. 오, 오빠 잠깐….”
“응.”
“다, 다녀올게요. 아…무튼… 내, 내, 내가 없으면 마, 마탑이 돌아가지를 않는다니까.”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면서 말이다. 정하얀이 나간 직후 한소라가 허겁지겁 말을 이어왔다.
“빨리 확인해 봐요. 부길드마스터.”
“어디에 있어요?”
“10층이요. 정하얀 님한테는 제 실험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둘러댔거든요. 빨리 확인해 보세요.”
“어때요? 소라 씨가 보기에는.”
“글쎄요. 나름대로 연구를 해보려고 했는데… 아직 제 수준으로는… 참고로 마탑 연구진들도 별 소득이 없어요. 어째서 조잡한 육망성 마법진이 다른 차원을 잇는 게이트화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러워하고 있고요.”
“…….”
“부길드마스터도 예상하시겠지만 제 짧은 소견으로는 대륙의 마법이 아니라고 봐요. 아니, 이걸 마법이라고 봐도 되는 건지 의심스럽고요. 그것보다는 자연현상 같은 것에 더 가까워요.”
“자연현상?”
“네. 자연현상이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걸 그린 게 아니에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이를테면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는 것처럼 갑자기 생겨난 거예요. 그렇게밖에 설명이 되지 않아요. 기왕이면 정하얀 님께서 연구를 도와주신다면 조금 더 좋은 결론을 얻을 수 있겠지만….”
“…….”
“…….”
‘그건 얘도 별로 안 땡기는 것 같자너.’
하지만 자연현상이라고 하니 뭔가 납득이 간다. 이 게이트는 시스템이 가뭄이 온 차원에 비를 내리는 것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 어떤 난제로도 정하얀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지, 다소 급해 보이는 한소라의 모습을 뒤로하고 마탑의 10층으로 향하자 아니나 다를까 전에 본 적 있는 커다란 육망성이 시야에 비쳐왔다.
마법진을 연구하고 있는 마탑의 마법사들 몇몇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육망성에 실험 아닌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다가서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해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게 부길드마스터께서 찾고 계신 게 맞나요?”
“맞는 것 같네요.”
한소라의 깜짝 놀란 얼굴이 눈에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어? 부길드마스터.”
“네? 왜요? 소라 씨.”
“가, 가방이 빛나고 있는데요?”
‘어? 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잠깐 멍하니 서 있었던 것도 잠시, 가방에 극소량의 촉매를 담아둔 것이 떠오른다.
주문을 외우지도 않았고,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지도 않았지만 이 자연현상은 제멋대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 시바!”
“무슨 일이에요? 부길드마스터? 도대체….”
“일단! 소라 씨 이리로 와요!”
“네? 아… 아니 안 갈래요!”
“이리 와요! 빨리!”
“싫… 싫어요!”
“아무것도 아니니까 빨리 오라고요!”
“아무것도 아닌 표정이 아니잖아요!”
“아니, 빨리 오라고!”
“싫… 싫어!”
“아니, 소라 씨! 빨리!”
“싫다고 이 새끼야!”
허겁지겁 달려가 봤지만 한소라의 뒷걸음질이 무척 빠르다.
이대로 혼자 끌려가면 엿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방을 벗은 것은 당연지사. 저도 모르게 폭탄 던지기를 하듯이 가방을 한소라에게 던지려고 했을 때였다.
“그거 이리로 던지지 말라고! 이 나쁜 새끼야! 던지지 마! 던지지 마!”
“아!”
“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던지지 말라고! 이 나쁜 새끼!”
시야가 변한 것이다.
“씨… 씨발….”
저도 모르게 마탑의 아래를 내려다보자,
“…….”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뭐야, 이거….’
악마들과 전투를 하고 있는 린델의 인원들이 시야에 비쳐왔다.
“…….”
“…….”
“X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