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6화
외로운 베니고어(3)
벨리알이 긴 손가락으로 안경 고쳐 잡는다.
조금이지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
“…….”
‘묘한 표정이네.’
이 새끼… 설마 기억하고 있는 건가.
이미 벨리알과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태생이 악마이다 보니 쉽게 믿을 수만은 없다. 그게 거짓과 선동의 군주라면 더욱더 말이다.
물론 벨리알이 딱히 그 사실을 숨긴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었지만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안 가는 점도 분명히 있고….’
베니고어, 로렌, 바리안, 엘룬 같이 이 차원에 예속되어 있는 이들 같은 경우에는 회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 한 차원에 구속받지 않은 벨리알이 회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좀처럼 설명하기 힘들다.
놈이 1기영과 계약했다는 것은 이미 내 눈으로 확인해 알고 있었지만….
‘벨 이사 얘는 다른 차원도 들쑤시고 다녔을 거 아니야.’
의심의 눈길을 보내기는 싫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찜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내 눈빛을 읽었는지 어깨를 살짝 으쓱거리는 벨리알이 보였다.
“의심하고 있는 건가? 이거 가슴 아프군.”
“벨 이사가 이상한 표정 지었잖아요.”
“그저 이제 사라진 시간 선에서도 너와 연이 있었다는 게 재미있다고 느꼈을 뿐이다. 다른 의미는 없어. 아무래도…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질문에 대답해 주는 게 좋겠지.”
“그럼 가감 없이 물어볼게요. 벨 이사님은 1회 차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어째서요? 벨 이사님은 이 대륙에 예속되어 있는 것도 아닌데… 따지고 보면 로렌이나 베니고어 님과는 상황이 다르지 않아요?”
“그건 내가 사라진 시간 선에 있는 인물과 계약했기 때문이겠지. 이를테면… 내가 열 수 없는 도서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이해가 되나?”
“글쎄요.”
“베니고어를 비롯한 이 차원의 신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다. 그래. 내가 사라진 시간 선에서 계약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 네가 의문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나는 어느 대륙에도 예속되어 있지 않았다. 회귀라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되돌릴 수 있는 건 이 차원의 역사뿐일 테니… 타 차원에도 간섭이 가능한 내가 그 영향을 피할 수 있다고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정확하시네요.”
“하지만 너는 악마의, 특히… 나 정도 되는 대군주의 계약을 너무 쉽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 우리 같은 악마들은 쉽게 계약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나? 그리고 그 영향력은 고작 대륙의 예속된다는 것 정도로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 말인즉슨….”
“이 차원의 시간이 되돌려진다면… 그곳의 개체와 계약한 나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거다. 기억을 수많은 기록을 가지고 있는 도서관으로 비유하자면… 회귀라는 사건은 열 수 없는 책장을 만들어버리는 것과 같아. 오히려 베니고어나 다른 신들보다 더 예민하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지.”
“뭐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기영 후배! 얘 말하는 것 좀 봐. 웃긴다. 왜 우리를 걸고넘어져?”
“말 정도는 끝마치게 해주면 안 되겠나, 베니고어? 아무튼 요지는 베니고어는 그 의지만 이해하고 있을 뿐, 책장을 아예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지. 이해가 되나? 너 역시 비슷한 걸 겪었던 것으로 아는데 말이야.”
“답답하시겠네요.”
“그게 계약의 대가라는 거지.”
“근데… 저는 1회 차의 제가 벨리알 님과 계약했다고 말한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그것 외에 이 차원에 올 필요가 있었을까. 함정을 파고 싶다면 조금 더 똑똑하게 파는 게 좋을 거다. 의심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만… 나는 우리가 꽤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
“…….”
‘잘못 건드렸나. 얘 진짜 섭섭해하는 거 같은데….’
괜히 벌집을 들쑤시기 전에 곧바로 납작 엎드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활짝 웃으며 녀석을 바라본 것은 당연지사. 표정 변화가 없는 것 같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만큼 비벼보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
“에이 농담이죠. 농담. 너무 섭섭해하지 마세요. 제가 벨 이사님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보니 확인 작업을 거쳤다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것 외에 다른 의미는 없어요. 우리가 어떤 사인데… 이런 것 가지고… 참… 미안해요. 벨 이사님. 화 푸세요. 네?”
“…….”
“제가 좀 예민했네요. 요즘 스트레스도 좀 많았고… 진짜 섭섭한 거 아니시죠? 네?”
“글쎄….”
“누가 우리 벨 이사님을 섭섭하게 했는지 몰라… 혹시 베니고어 님이에요?”
“어?! 아, 아니! 나… 나 아니야! 나 안 그랬어.”
“…….”
“…….”
“네가 내 부탁을 몇 가지 정도… 들어준다면… 짜증이 조금 풀릴 것 같은데 말이야.”
“당연하죠. 당연히 그렇게 해드려야죠. 누구 부탁인데! 우리가 남이에요? 네? 그렇죠? 베니고어 님?”
“어? 어… 당연히 아니지. 우리가 남이야? 한배를 탔으니까! 누가 우리가 남이래? 아이. 벨리알도 뭐 이런 것 가지고 삐지고 그래? 이기영 후배가 잘 모르니까 궁금해할 수도 있는 거지. 의심한 게 아니라 확인 작업이라잖아. 확인 작업! 중요하니까 짚고 넘어간 거지!”
“…….”
“나, 나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벨리알. 표정 좀 풀어. 응? 내가 컵케이크 줄게. 아, 아무튼 그, 그러니까아… 일, 일단 하던 이야기부터 마저 하자고! 1회 차에 다녀왔다는 건 무슨 이야기야?”
슬그머니 벨리알의 표정을 살피자 녀석 역시 1회 차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대화의 주제를 돌려준 베니고어에게 감사를 표할 수밖에 없는 시점,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 있었던 일을 설명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육망성부터, 문어 촉수 괴물, 그리고 1회 차에서 정진호의 죽음을 보고 왔다는 것, 그리고 미래의 내가 계속해서 1회 차를 방문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까지.
물론 그 모든 사건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너무나 비이상적으로 맞춰지는 퍼즐에 관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정사였고 마치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이상현상에 대해서 말이다.
이야기는 꽤 길었지만 둘은 군말 없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었다. 베니고어는 때때로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응응 하며 끄덕였고, 벨 이사는 손가락으로 안경을 위로 올리며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뭘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베니고어와 벨리알 둘이 서로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으니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는 게 있었던 것 같았다.
벨리알이 조용히 잔에 와인을 채워주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아, 감사히 마실게요.”
‘논알콜인가 보네. 화 풀려서 다행이자너.’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에요. 얼떨결에 돼지도 데리고 왔고요. 아니. 애초에 1회 차의 인물이 이곳으로 올 수 있다는 게 말이 돼요?”
“그건 녀석이 이미 네 권속이 되었다는 뜻이었으니… 그다지 이상한 상황은 아니야. 그 필멸자… 아니, 이제는 필멸자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 만약 네 권속이 해당 시간 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말이었다면 시스템이 제재를 할 수도 있었겠지만… 보아하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시바. 그 돼지는 싫은데….’
“전혀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벌써 내 권속이란다. 어느새인가 베니고어가 컵케이크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았기 때문에 한입 베어 물며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대충 끝인데…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요?”
“글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사실 우리도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건 아니거든… 이기영 후배.”
“흐음….”
“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게 맞아. 이 차원이 어떻게 생겨난 건지, 어째서 다중차원이나 회귀에 대한 법칙이 존재하는 건지, 이걸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누군지, 전부 알지는 못해.”
“…….”
“모든 차원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이해하기에 우리는 조금 부족하거든.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을 거야. 이기영 후배. 우리도 결코 완전하지 않다고.”
“그건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서 알고 있어요.”
“응. 이기영 후배가 말하는 그 괴물은 일단 우리 차원의 존재가 아닌 건 확실해. 균열을 통해 나온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그 건은 내가 조사해 보도록 하지.”
“응. 벨리알이 맡아주는 게 좋을 것 같네. 하지만… 이기영 후배가 느낀 위화감이라면… 대충 예상이 가는 게 있어.”
“뭔데요?”
베니고어 역시 컵케이크를 우물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기영 후배의 예상대로, 이기영 후배가 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엄연히 말하면 이기영 후배는 지구에서 뱉어진 쓰… 아니, 피해자일 뿐이니까.”
“…….”
“내 생각이 맞다면… 아마도… 시스템이 이기영 후배를 이 차원의 관리자로 완전히 받아들였다는 이야기로 해석해도 될 거야.”
‘아예 예상을 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여느 차원에서도 가끔 일어나는 이야기야. 갑작스럽게 차원의 관리자가 바뀌었을 때 말이야. 로헨을 생각해 보면 어때? 이기영 후배가 로헨을 흡수하면서 그곳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잖아. 마력폭풍에, 이상현상에, 계시자들은 살아남은 인간들을 이끌고 낙원으로 향했지. 아름다운 이야기였잖아.”
“그것과 이건 이야기가 달라요. 그 쪽은 엄연히 저랑 지혜 누나가 의도적으로….”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이기영 후배는 모든 것을 재정립했어. 계시자가 이끄는 것 외에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신화를 부여한 거야. 로헨이 정당성을 가지게 하는 절차를 밟은 거지. 1회 차니 2회 차니, 거리낄 것도 없지. 리셋 버튼을 누른 셈이었으니까. 그에 비해 이 대륙은 어때? 의도적으로라도 그런 것들을 부여한 적이 있었나?”
“…….”
“희생과 부활의 성자가 만들어진 서사를 부여하기는 했지만 이 대륙의 시작과 끝이 어떤 것인지는 부여하지 않았지.”
“…….”
“…….”
“혹시…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도 그걸 염두에 둔 거였어요?”
“어? 어? 아… 아! 당, 당연하지!”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알, 알타누스의 이야기에 이기영 후배가 개입했다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시스템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고 판단한 모양이네.”
하지만 의외로 베니고어가 본능적으로 이 문제를 깨닫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얘는 의외로 이상한 부분에서 날카로웠으니까.
의식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를 꺼내 든 시점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이성보다는 어떤 이끌림에 의해 움직였다고 여겨도 납득이 간다.
벨리알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알타누스의 이야기를 해결해야 하기는 했어. 나, 나도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봐. 시스템 역시 1회 차의 이기영 후배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판단한 거겠지.”
벨리알도 말을 이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1회 차 없이는 2회 차가 성립될 수 없으니 말이다. 사실 그것보다는….”
심지어 서로 눈치를 보면서 말을 이어온다.
“그 녀석 때문이겠군.”
“응. 노을빛의 검신 때문일 거야.”
“…….”
“…….”
“갑자기 여기서 현성이 이야기가 왜 나와요? 걔는 여기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올라오지 않았을 뿐, 이미 노을빛의 검신은 신격을 얻었어. 시스템이 바보인 줄 알아? 그냥 현세에 처박혀 있다고 노을빛의 검신을 무시할 수 있겠냐구.”
“…….”
“이 대륙과 차원의 관리자는 엄연히 말하면 이기영 후배이기는 하지만 노을빛의 검신이기도 해. 아무래도 시스템이 둘을 묶어버렸을 가능성도 존재할 것 같고. 무리도 아니지 아마.”
“…….”
“외신이 대륙에 왔을 때, 대륙 던전화가 진행되었을 때,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 이미 그 과거의 이야기가 신화가 돼서 음유시인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판국에 시스템이 그걸 무시할 수 있었겠어?”
“…….”
“이기영 후배의 격을 얻었을 때는 항상 노을빛의 검신이 옆에 있었다고! 노을빛의 검신이 먹는 신성은 이미 이기영 후배한테 전부 돌아가고 있잖아… 만약 노을빛의 검신이 없었다면… 두더지 성녀 이야기로… 마무리됐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몰라. 둘의 이야기가 처음으로 시작된 장소는 1회 차였으니… 그 이야기에 현재의 이기영 후배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말인즉슨….”
“어?”
“현성이도 1회 차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요?”
“글… 글쎄….”
베니고어가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