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85화
외로운 베니고어(2)
‘시바 말도 안 하고 왔는데 어떻게 알았냐고.’
반가움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격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돌적인 모습이었다. 퍽! 하는 충격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갈 정도, 마치 오랜만에 만난 강아지가 주인을 덮치듯 달려든 베니고어 덕분에 등에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그것보다는 베니고어가 내뱉는 시끄러운 말들이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후배에… 끄윽… 이기영 후배에!”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동안 나를 본 사람들처럼 그녀 역시 나를 꽉 안고 있었으니까. 마치 구렁이 한 마리가 몸을 죄고 있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진다.
“…….”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기영 후배… 끄윽… 흐으윽…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아? 왜 이렇게 얼굴 보기도 힘들어… 온다며… 금방 또 보러 온다며!”
“아니… 일단….”
“왜 메시지에는 답장도 없고!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구…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동안… 흐으으윽… 그동안….”
‘이래서 오기 싫었던 거자너.’
“이기영 후배에… 이기영 후배….”
앞으로 몇 시간을 더 이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 때, 천천히 다가온 벨리알이 베니고어의 뒷목을 잡고 들어 올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아악! 이 더러운 악마가! 그 손 못 놔!?”
“체통을 좀 지키는 게 어떤가. 혼자만 쓰는 장소도 아닌데 말이야.”
“이이이익! 오랜만에 이기영 후배와 만났는데 남들 눈이 무슨 대수라고! 일단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이 더러운 악마!”
벨리알에게 붙잡힌 채로 공중에서 발버둥 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어째서 진 군사가 그렇게 고통을 호소했는지 알 것 같다. 벨리알도 그런 베니고어와 상종하기 싫다는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보는 눈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를 말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야….
‘사람이 엄청… 늘어났네?’
27군단을 통째로 들고 합류한 벨리알의 심복들이야 이해가 가기는 했지만, 하얀색 날개를 달고 있는 천사들이 눈에 띄었다.
악마 천사 가리지 않고 대부분이 인텔리한 회사원 복식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빤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마치 유명인이라도 본 것처럼 서로가 앞다투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새로 만들었나?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빼 오기라도 했나?’
이전에 비해 덩치가 커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커진 것 같았다. 그것도 무척 단기간에 달라졌다.
대륙 던전화 당시에 베니고어와 함께 짱박혀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대신전, 아니, 대기업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은가.
커다랗고 화려한 기둥들과 석상들,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상황판과 대륙의 모형…. 세분화된 부서가 너무 많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
지혜 누나가 힘 좀 써봤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벨 이사님. 잘 지내셨어요?”
“솔직히 잘 지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군. 그동안 제법 바빴으니 말이야.”
“베니고어 님도 잘 지내셨죠?”
“이기영… 후배에… 흐윽… 보고 싶었어.”
“아니, 근데 여기는 왜 이렇게 달라졌어요? 신전 내부에 있는 게이트 입구 보고 좀 달라졌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아니, 이 누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아… 역시 놀랐구나?”
“…….”
“…….”
어째서 베니고어가 우쭐해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콧대가 무척 올라가 있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이거 벨리알이랑 누나가 한 거라며.’
“뭐… 이기영 후배가 그동안 안 오는 동안… 새 단장 좀 했지. 우리끼리 열심히 으쌰으쌰 했을 때도 물론 좋기는 했지만… 이제 좀 덩치가 커졌잖아. 겔라도 들어왔고, 사하가도 들어왔고… 사실 이제 로헨도 우리 건데… 그 골방에서 일하는 게 효율이 나오겠어?”
“새 단장 한 수준이 아닌데요? 아니, 이럴 거면 집무실은 왜 붙여놨어요? 그냥 개인 사무실 하나 따로 떼서 각 구역마다 설치하면 되겠구만….”
“우, 우리끼리는 어느 정도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되잖아. 아무튼 그런 이유로… 도우미 천사들도 조금 불러왔어. 이제 슬슬 저쪽이 저무는 해라는 걸 쟤네들도 알고 있는 거지. 이기영 후배의 유명세도 유명세인데… 로헨을 구한 게 결정적이었다고 봐. 그쪽 적폐들 싹 다 쳐낸 거에 감명을 받았다는 거지. 공채공고 띄울 때 얼마나 많은 도우미들이 지원한 줄 알면 깜짝 놀랄걸.”
“…….”
“그, 그럴 게 아니라 로헨 말고 다른 차원도 하나 작업 해보는 게 어때? 옆 동네에 좀 짜증 나는 놈들이 있었거든… 거기도 확 밀어버리자. 그 동네는 맨날 그렇지만 천마니 뭐니 하는 놈이 나와서 좀 문제가 생긴 모양인 것 같더라고… 우화등선했다고 신선놀음하던 놈들도 전부 숨어버렸지 뭐야. 지금이 기회야. 이기영 후배.”
‘아니, 얘는 뭔 소리야.’
“원래 성장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지금이 기회야. 우리가 덩치를 키울 수 있는 타이밍이라구! 이런 기세로 하나둘 늘려가다 보면 아무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될 거라니까!”
로헨에서 떨어지는 단물이 그리 달달했을까. 마치 정복 전쟁을 나가기 전의 폭군과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벨리알도 인상을 찡그리며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 누가 악마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시바 거기를 어떻게 가.’
“더 늘릴 생각 없어요. 안 그래도 이미 충분히 크구만… 그리고 우리 쪽도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차원 전쟁이라도 하고 싶어요?”
“뭐?! 아, 아니, 당연히 아니지!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이기영 후배! 차원 전쟁이라는 말은 그렇게 쉽게 내뱉어도 되는 말이 아니야.”
“…….”
“내가 평화를 사랑하는 거 알잖아. 이기영 후배. 다 알면서 왜 그래? 그… 그냥 전쟁 말고도 시스템이 인정한 합법적인 방법 있잖아… 이기영 후배가 잘하는 거… 그거 사기… 아니, 사기가 아니라 재치 있는….”
“아니, 방금 제가 한 말 못 들었어요? 지금 여기도 난리 났는데 타 차원까지 신경 쓸 여유 없다니까. 애초에 덩치가 너무 커지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다고요. 안 그래도 우리는 독립하겠다고 생쇼를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서 눈 밖에 난 지 오래됐는데… 대놓고 때려달라고 표적 될 일 있어요?”
“그, 그렇지만….”
“지금 가지고 있는 걸 유지하는 것도 벅차요. 도우미 천사들만 많으면 뭐해요? 정작 쓸 수 있는 인력이 없는데.”
“대, 대기자들 있잖아! 정…하얀 그 여자도 그렇고, 붉, 붉은 전신도. 노을빛의 검신도!”
옆쪽에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빠는 그 사람들 데리고 오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베니고어 님.”
“어? 어?”
“아무래도 현세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싶은 마음이 큰 것 같더라고요. 정하얀 같은 경우는 대륙 안팎의 마력 관리를 맡기는 했잖아요. 마탑에 그거 설치하는 것도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데요. 사실 그거 맡기는 것도 어찌나 그렇게 신경을 많이 쓰던지….”
“어? 왜… 왜? 여기 올라오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그야 괴리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 그렇죠. 평범한 사람들이면 대부분 그럴 거예요. 현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세에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고 느끼는 게 오빠 생각인 거고… 모두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일부는 공감이 되거든요.”
“…….”
“여기에서의 삶이 진짜인지, 저곳에서의 진짜인 건지 헷갈릴 수도 있고요. 인간은 베니고어 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불완전하거든요. 최악의 경우에는 현세에서의 삶이 별 의미가 없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이 장소가 상위에 있다고 받아들일 가능성이 크니까요.”
“하, 하지만 대충 우리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아? 정하얀도 그렇고….”
“대충 눈치챘을 뿐이죠. 설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랄까… 참고로 저랑 진 군사, 그리고 오빠 같은 경우에는 그런 괴리감을 느끼고 있지는 않으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이 누나 또 쓸데없는 소리 하네.’
할 말이야 많았지만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기로 결정했다. 또 저걸 주제로 입씨름하는 게 굳이 반갑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벨리알 녀석이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얹으며 길을 안내하려고 하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벨 이사 속 보이자너.’
“슬슬 움직이는 게 좋겠군. 내가 안내하도록 하지.”
아마 이곳에 있는 갤러리들에게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벨리알과 베니고어가 은근슬쩍 파워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건 안 봐도 뻔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진보와 보수처럼 당을 나누고 있었고, 안건이 나올 때마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으니 이 회사의 CEO와 친분이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이다.
베니고어는 이런 벨리알의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단 무작정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끌고 가는 중, 이지혜만 그들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쓸데없는 힘 싸움에 끼는 게 그다지 반갑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인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인사를 한 뒤에는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 밑에서 봐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로헨 지구는 반대쪽이다. 어떤가. 한번 둘러보는 게.”
“아니요. 지금은 로헨보다 중요한 일 때문에 올라온 거라서… 일단 회의실로 가시죠.”
“어? 진 군사한테 실적 발표 준비해 놓으라고 할까? 이기영 후배만 오면 하겠다고 벼르고 있던데….”
“걸러요.”
“아? 그… 그래? 진 군사 많이 섭섭하겠다. 그, 그래도 한번 보지… 진군사가 진짜 준비 열심히 한 것 같던데….”
‘지금은 진 군사 놀릴 시간도 없자너.’
“그럴 시간 없어요.”
“그, 그래도… 진 군사가….”
“…….”
“진, 진짜 기대 많이 한 것 같았단 말이야… 한 번 정도는 들어보는 것도….”
“…….”
“…….”
“아니, 베니고어 님. 요즘 진 군사랑 친하게 지내요?”
“어?”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진 군사 실적 발표 자꾸 보라고?”
“그렇지 않아도 베니고어가 요즘 녀석과 자주 붙어 다니는 것 같더군.”
“그래요. 벨 이사님?”
“어… 어? 아니?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벨리알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니야! 이기영 후배! 친, 친하게 지내기는 무슨… 그런 재수 없는 놈이랑 내가? 참 웃기지도 않아. 그, 그냥… 알잖아. 이기영 후배. 나는 이기영 후배랑 같이 진군사 비웃어줄 생각에 기대가 돼서 그렇지… 히… 히힛.”
“…….”
“알잖아. 그 녀석… 한껏 오만한 척, 잘난 척은 혼자 다 하고… 이번에도 흑자 전환 겨우 해서 바둥바둥대는 꼴이 웃기잖아. 푸… 푸힛. 그 재수 없는 녀석한테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지. 어떻게 내가 그 녀석이랑 친하다고 생각해? 참… 이기영 후배도… 아직 너무 날 모른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꽤 붙어 다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사, 사실 그, 그런 적이 몇 번 있기는 했었지? 그 녀석… 친구도 없이 혼자 집무실에 처박혀 있잖아. 그냥… 장난친 거였어. 내가 진심으로 자기를 대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자꾸 달라붙더라고. 참 그 자식도 눈치가 없어서 탈이야. 히…히힛….”
‘얘 진짜 악마 아니야?’
아무리 베니고어라고 해도 이렇게 곧바로 진 군사를 손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을 돌봐준 그 진청을 말이다.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죄책감은 없다. 오히려 계속해서 진 군사에 대한 악담을 내뱉는 모습에는 그 벨리알마저 질렸는지 한 발자국 멀어졌을 정도였다.
아무리 녀석이라고 하더라도 베니고어의 필터링 없는 욕설을 면전에서 듣는다면 상처 받지 않을까.
“이, 이건 어때? 실적 평가 한다고 미리 사전에 공지를 한 다음에… 당일날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히… 푸히히힛… 그 재수 없는 녀석. 완전히 당황하겠지? 정기 회의 시간도 몰래 옮겨 버리자.”
‘그건… 좀 심하잖아….’
“아, 아무튼 저기가 진 군사 집무실이야. 아쉽게도 없네. 테러라도 하려고 했는데. 진 군사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가끔 저기에 컵케이크 같은 걸 집어 던지거든. 히히히…힛.”
“…….”
“아, 여기 밑에는 식당. 이기영 후배 겨울 연어 좋아하지. 어때? 먹고 갈까? 아니면 컵 케이크 가지고 다시 올라올래?”
“…….”
“저, 저기는 도우미 천사들 휴식 공간. 악마들이랑은 웬만하면 마주치게 하지 않으려고 설계했어. 아직도 좀 보수적인 친구들이 있거든.”
“시설은 좋네요.”
“그렇지?!”
“뭐 완전히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은근히 쓸 만해. 아, 근데 뭐 물어보려고? 엘룬이랑, 로렌, 겔라, 전부 부를까?”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고요. 벨리알 님과 베니고어 님만 따로 회의실로 가시죠.”
“아. 그래? 뭐 중요한 이야기야?”
‘당연히 중요한 이야기지.’
“그냥 별건 아니고….”
“응? 응? 응?”
“제가 1회 차에 다녀온 것 같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순간적으로 침묵에 휩싸인 녀석들이 시야에 비쳤다.
“아니, 확실히 다녀왔어요. 그리고… 그곳에서의 정사도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요. 심지어 개입하기도 했는데… 뭐… 이 상황에 대해서… 아시는 거라도 있으세요?”
“자세히 한번 들어봐야 할 것 같군.”
“그, 그게 정말이야? 이기영 후배?”
“네.”
“…….”
“그리고… 벨 이사님도 뵙고 왔고요.”
벨리알이 긴 손가락으로 안경 고쳐 잡는다.
조금이지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