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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84화 (1,28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84화

외로운 베니고어(1)

‘어지러워.’

다시 한번 풍경이 뒤바뀐다. 이미 한 번 겪었던 현상이기는 했지만 모두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전 정말로 평행세계로 다녀왔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귀환한 라파엘의 표정이 살짝 그늘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파티원들을 엄한 곳에 놔두고 왔으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겠지.

안기모 녀석은 이곳에 온 게 기뻐 보이기는 했지만 라파엘과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정 길드원 역시 분위기를 읽었는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중, 어수선한 분위기를 어느 정도는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 역시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행세계의 미아가 된 라파엘 파티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가면을 쓴 남녀 때문이었다.

‘당연히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했었어야 했는데….’

1기영과 1지혜의 입장에서도 정진호의 죽음은 꽤 중요한 이벤트였다. 쓰임새가 다한 녀석을 쳐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이기도 했을 테고, 심지어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라 정진호였으니 심혈을 기울였다고 보는 것이 맞다.

망원경은 없을 테니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쪽의 존재를 들키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마 1기영 역시 마음의 눈을 가지고 있을 테니 만약 나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면 여러 가지 의문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벨리알이랑 계약까지 한 상태였으니까.’

정확한 계약 시점을 알 수 없었지만 수긍은 간다. 사용할 수 있는 벨리알의 힘이 한정적이겠지만 아무 힘도 없는 녀석이 1회 차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는 것에서는 의문을 느끼고 있었으니 말이다.

망토와 가면에 가려져 정확한 외관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살짝 드러난 앙상한 팔이 기억이 남는다.

적당히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나와는 이쪽과는 다르다. 계약의 대가인지, 아니면 그럴 여유가 없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놈의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들키지는 않았겠지?’

그래도 잡히기 전에 빠져나간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혹시나 또 모를 일이다. 일단은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부터, 혹시나 1회차에 의해 2회 차가 영향을 받았을지 확인해 봐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충 보기에는 문제가 없다.

문제라고 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면….

‘지금… 얼마나 지난 거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의문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우정 길드의 이철우가 입을 열어왔다.

“두 시간… 지나 있군요. 시간 선이 다른 모양입니다.”

‘거기에서 얼마나 있었지? 한 이틀 정도 있지 않았나?’

“그곳에서의 하루가 이곳에서의 한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육망성도 사라져 있군요.”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게이트는 소멸되는 모양이에요. 특이하네요.”

“라파엘 님은 어떠셨습니까? 그러니까… 이전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셨을 때….”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정확한 시간을 기록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이 정도의 비율은 느끼고 있지 않았다 이거지?’

모두들 정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아쉽게도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시간 비율이라는 게 딱딱 정해져 있는지도 모르겠고… 라파엘도 말했듯이 녀석 역시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체크할 시간도 없었겠지. 격렬한 전투가 끝나고 파티원들을 찾으러 정신없이 돌아다녔을 테니, 본인이 갔다 온 시간이 찰나였는지, 정확히 1:1의 비율이었는지 확인할 여유나 있었을까.

모두가 정답을 알려달라는 표정을 보내고 있었던 만큼 일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라파엘은 그중에서도 표정이 제일 좋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신의 파티원들이 나이를 먹고 있다는 것처럼 들릴 테니 파티원들을 놔두고 온 것이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쳐 발리기만 하고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한 회색 비둘기는 어느새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아직 성급하게 결정하기에는 일러요. 표본은 겨우 두 건이었어요. 정확히 어떤 종류의 주문진인지도 파악되지 않았으니… 꼭 저쪽에서의 하루가 여기서의 한 시간이라고 결정짓기에는….”

“역시 그, 그럴까요.”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파엘 님. 아마 라파엘 님이 생각하시는 최악의 상황은 오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마지막 제 선택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 아니요. 형… 괜찮아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저도 그… 존재를 느꼈으니까요. 제가 파티의 리더였더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게 분명해요. 그것보다 형… 마지막에 그건… 도대체….”

“저도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만… 적어도 저희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정황만 본다면 그쪽 차원을 관리하는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겠죠.”

“아… 그렇군요. 그럼 혹시 다음 원정은 언제가 되는 건가요?”

“일단은 이 상황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파란 길드에 육망성의 소재를 파악해 달라고 요청을 드릴 테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기다리는 것 외엔 없나요?”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라파엘 님, 그리고 우정 길드 여러분들은 전에 발견한 문어 촉… 아니, 개체들을 발견해 샘플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 주세요.”

“네.”

“네.”

“물론… 그전에 휴식부터 취하는 게 좋겠네요. 모두 린델로 향한 이후에 잠깐 숨을 좀 돌리도록 하죠. 다른 차원을 방문한 만큼, 신체에 문제가 없는지 검사도 받아보는 게 좋겠어요.”

“네.”

“알… 알겠…다.”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좌중을 둘러봤을 때였다.

‘어?’

멍하니 나만 바라보고 있는 놈들 사이에서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돼지 한 마리가 시야에 비친다.

“…….”

“…….”

“…….”

‘뭐야… 이 새끼. 어떻게 들어왔어.’

너무 자연스럽게 합류해 있었던 터라 의식하기도 힘들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이 파티의 일원인 양 끼어 있는 모습, 심지어 당당하다. 내 말에 우정 길드원들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이 새끼… 진짜 뭔데… 아니,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이상함을 깨달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모두가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녀석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중, 내 몸이 억지로 들어 올려지는 게 느껴진다.

안기모가 빠르게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놈에게 거리를 벌린 것이다.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우고 방금까지만 해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라파엘은 이를 악문 채로 놈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 돼지가 양팔을 위로 벌리지 않았더라면 금방이라도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나… 싸, 싸우기 싫어. 아파….”

“…….”

“…….”

“항복… 항… 항복할래.”

‘아니, 시바 어떻게 넘어온 거야. 1회 차의 인물은 못 넘어오는 거 아니었어? 아니면… 템플러가 된 영향 때문이야?’

“그거… 안 먹을래. 그러니까… 죽이지 마.”

이미 한계에 다다른 돼지에게 저항할 여력은 없어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실시간으로 몸이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 건가?’

궁금한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너무 많다. 다들 돼지를 견제한 채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 돼지를 여기서 처리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압해 주세요.”

“네.”

“저항하면….”

“저항… 안 한다.”

심지어 손을 들고 무릎을 꿇으며 저항할 의지를 표시하는 녀석 덕분에 우정 길드원들이 조심스레 놈에게 다가가 구속구를 끼우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얌전히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이 새끼 은근 영악한 새끼라서 방심은 금물이자너….’

“파란 길드로 호송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성자님.”

“네.”

“조용히… 있을 거야. 문제… 일으키지 않아.”

중얼중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와중에도 힐끔힐끔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왠지 모르게 촉촉한 눈망울, 정말로 이대로 자신을 버릴 거냐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치가 있는지 다른 말은 해오지 않고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내가 자신을 돌봐줄 거라고 믿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시바. 아무리 그래도 첫 템플러가 이런 돼지가 될 수는 없자너.’

“배… 배고파.”

“…….”

“배… 배고파! 배고파! 배… 배고파!”

“저… 부길드마스터… 저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적당히 먹을 거라도 던져 줘요.”

“부, 부길드마스터. 저… 저 새끼 사, 사람 먹는 거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 누가 사람을 주래요? 그냥 아무거나 주세요. 몬스터 고기 같은 것도 그냥 주면 맛있게 먹을 것 같으니까. 햄비어 고기 같은 거 대량으로 매입해서 시끄러워질 때마다 조금씩 던져 주라고 하세요. 배만 부르면 크게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지는 않으니까.”

“믿어도 되겠습니까?”

“본인도 별로 문제 일으키고 싶지 않아 보이기도 하고… 또 그런 것에 관계 없이 소중한 샘플이 제 발로 굴러들어 온 셈이니… 살펴보기는 해야죠.”

“아아아… 이해했습니다.”

“아마 저항하거나 난리 칠 힘도 없을 거예요.”

“네. 네. 그럼 지하에 가져다 놓으면 되겠습니까?”

“네.”

안기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귀환하는 와중에도 할 일을 멈추지는 않았다. 오스칼에게 귀환했다는 연락을 남겨야 했고, 김현성의 상태가 어떤지 대충 살펴야 했다.

1회 차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끊어지지 않았던 모양인지,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기사 신화 급의 특성이었으니 로헨 때처럼 자의적으로 혼란을 주지 않는 한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 하얀이도 잘 있는 것 같고….’

밀린 메시지에 곧바로 답장을 해주자 깜짝 놀라며 여신의 거울을 붙잡고 있는 하얀이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사진도 한 장 보내줘야지.’

화들짝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정하얀의 모습, 이후 여신의 거울을 향해 입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서는 곧바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것 같네.’

순간적으로 내게 걸어 놓은 추적마법 같은 것들이 사라져 걱정하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마 단순한 마법 말고도 무언가 장치를 해놓지 않았을까.

“이번에 들어가면 진짜 푹 쉴 생각입니다.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에 어떻습니까. 밖에 나가서 한잔….”

“저는 바로 신전으로 향할 거예요.”

“네? 곧바로 말입니까?”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아니요. 그런 거 없으니까… 아니… 기모 씨는 우정 길드와 라파엘 파티와 합류하는 게 좋겠네요.”

“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는 휴식이니까.”

“하… 하하… 그건… 다행이로군요.”

“…….”

“…….”

“그런데 부길드마스터 신전에는 도대체 무슨 볼일로….”

‘당연히 이거 해결해야 되니까 그렇지.’

여러 가지 물어볼 게 많았으니까.

‘오랜만에 가게 되겠네….’

향해야 하는 곳은 위쪽과 아래쪽의 중간지점이었다. 아무래도 베니고어나 벨리알, 로렌 같은 위쪽 놈들이 아래쪽과 계속해서 소통하느라 신성을 소모하느니 차라리 중간지점에 아예 업무지구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지혜 누나와 벨리알이 함께 추진한 역작이었다.

업무 효율이야 올라간 것 같기는 했지만… 막상 나는 이용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 로헨에서의 일이 있기도 했었고, 내 업무는 주로 마지막에 도장을 찍거나 지혜 누나와 서면을 통해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

“…….”

‘내가 너무 무신경하기는 했나 봐.’

눈물이 가득 차 있는 베니고어의 얼굴을 보고서는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기영 후배! 흐윽… 끄으윽… 이기영 후배에!!”

몸통박치기를 하듯 달려 들어오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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