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69화
1회 차 희라(3)
정확히 말하면 미래의 내가, 지금 보다 더 과거의 시점을 방문한 것이다.
‘만난 적이 있다고?’
시간여행자는 또 뭔데? 것도 이미 사기를 쳐놨다고?
‘희라 누나의 죽음에 대해서 이미 이빨을 털어놨다고?’
차희라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하나같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물론 표정에 그걸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이미 내가 이전에 온 적이 있었고, 저번처럼 스스로 기억을 지웠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전자의 추측에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기억에 오류가 없었고, 무엇보다 이곳을 드나들 만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육망성에 대해 알게 된 것도 겨우 최근이다. 1회 차의 시간 축과 2회 차의 시간 축의 비율이 달라 이곳에서의 1년이 저곳에서의 찰나라면 설명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힌트는 차희라가 내게 말한 발언에 있었다.
차희라가 나를 보고 더 어려졌다고 말했다는 것.
확실하게 과거의 그녀는 미래의 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
“…….”
육체가 점점 성장하고 있었으니 그녀가 지금의 나를 어려졌다고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었다.
‘발동되는 마법진이 저것 하나만 있는 게 아닌 거야.’
혹시나 돌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해 1회 차에 계속 체류하게 되는 상황을 걱정했었지만 아마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 파티는 확실하게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은 이후에 2회 차로 복귀한다. 그리고 다른 마법진을 통해서 다른 시간 선으로 이동할 확률이 높다. 지금보다 더 과거의 시점으로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상황인 거야.’
이 마법진은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고… 누가 무슨 이유로 육망성을 대륙 곳곳에 숨겨놓은 거지?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모든 일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예상하고 있었지만 애초 생각했던 범위 내에서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1회 차에서 회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나? 아니면… 애초부터 완전한 회귀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일까.
이 육망성이 그 부작용이라고 생각한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 육망성을 숭배하는 놈들도 있고, 문어 괴물도 있었으니 말이다.
생각해야 할 건 또 있다.
여기서 2회 차로 돌아가는 게 가능하다면… 1회 차의 인물들이 2회 차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한 것인지. 만약 1회 차의 누군가가 육망성을 발견하고 그 마법진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은 상태라면….
‘아니…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 거야….’
그런 게 가능하다면 벌써 2회 차가 망가졌을 테니 말이다.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가설에는 손을 들어주고 싶지 않다.
1회 차의 주요 인물들, 이를테면 가면쓰레기들과 김현성 같은 녀석들이 2회 차로 넘어오게 된다면 그 순간 2회 차는 사라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너무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아. 희라 누나.’
차희라가 빤히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이쪽의 희라 누나는 저쪽보다 참을성이 더 없어 보였기 때문에 일단은 다시 한번 술잔을 가득 채우면서 환한 미소를 지어줄 수밖에 없었다.
‘나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니까.’
애초에 적의가 보이지 않는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꼬맹이 하나 때려죽여서 뭔가 달라질 것도 없을 테고, 기분만 찝찝해지겠지.
무엇보다 본인의 궁금증을 확인할 수도 없을 테고 말이다.
일단은 최대한 의문스럽게 표현하자. 1회 차 희라의 사인은 실종이었고, 나도 그녀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아까처럼 순진한 꼬마의 눈빛은 곧바로 거두는 것이 맞다. 대신 최대한 요사스럽고 신비로운 느낌을 유지해야 한다.
‘나는 타임트레블러자너.’
순간적으로 삑사리가 날 것 같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은 이후 요사스러운 목소리를 내뱉는다.
“죽음이 두려우신 건가요?”
“…….”
‘시작 좋았다.’
잔에 있는 술을 한순간에 들이켠 희라 누나가 내 질문에 말을 이어왔다.
당연하지만 다시 한번 공손하게 술을 따르도록 하자.
“멍청한 질문이네. 네가 보기에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것 같아? 나는 뒈지는 걸 무서워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꼬마야. 그걸 무서워했다면 이 짓거리 하면서 살지도 않았을 거다. 전쟁터를 더 굴러다니지도 않았을 거고… 애써 위험한 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겠지.”
‘이 누나 살짝 취기 올라온 거 맞네. 말 많아지는 거 보니까.’
“그냥 내 마지막이 될 장소가 어딘지 궁금할 뿐이야. 그게 의미 있는 죽음이었는지, 지금의 내게 걸맞은 죽음이었는지도….”
‘근데 나 누나 어떻게 죽는지 몰라. 누나 실종사야….’
최소한 그녀가 원하는 명예로운 죽음 같은 것이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2회 차와는 다르게 지금의 그녀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을 테니 말이다.
원래부터 그런 낌새를 보이고 있었던 그녀가 초반부터 계속해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을 테니 아마 그 증강이 더욱더 가속화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마 차희라가 걱정하는 부분도 그런 부분일 것이다.
‘미쳐가는 거.’
전투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고 있었으니, 일상생활에서도 그 영향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까 급발진한 것만 봐도 답이 딱 나오자너.’
그녀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자꾸만 본능에 먹혀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게 불안했을 것이다.
“이성을 잃어가고 계시는 게 걱정이 되는 건가요.”
“그래. 난 너무 많이 달라졌거든.”
“…….”
“너무 전쟁과 가깝게 지냈어. 네게 하나하나 설명한다고 해도 못 알아듣겠지만… 오히려 평소에 죽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나는 전쟁터에서 살아 있는 걸 느껴. 이곳에서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아니, 오히려 필요한 일이었지.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네 경고가 맞았을지도 모르지. 아니, 확실하게 맞아.”
“그… 증상이…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를 드리지는 못하겠네요.”
“나도 되돌리기에는 늦었다고 생각하고 있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굳이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최소한….”
“최소한 당신이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 안심하셔도 돼요.”
아마 그녀가 듣고 싶은 건 이런 말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저라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고요. 그나마 확실하게 정해진 미래는… 현재 걱정하고 계시는 문제가 곧 해결될 거라는 것 정도뿐이겠네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그 개자식이 드디어 뒈진다는 건가?”
“네. 그건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에요.”
‘1기영이 걔를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까.’
“너무 오랫동안 골칫거리였거든. 그 개자식들은… 그런가. 결국에는 그 개자식들도 죽는구나… 최소한 여기가 내 마지막은 아니란 소리겠고… 그래서… 이번에 네가 여기에 온 이유는 뭐지?”
‘시바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슬슬 빌드업을 해놓는 것이 좋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어요. 시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몇몇이 빨려 들어왔거든요. 저는 그들을 해당 차원으로 돌려보내야 해서….”
“그거 귀찮게 됐네. 너도 고생이 많구나?”
‘누나랑 나랑 좀 잘 지냈었나 보자너….’
꽤 호의적이다.
“네. 물론 누나만큼은 아니겠지만… 저도 나름대로 할 일들이 있어서. 대륙 외적으로 신경 쓸 일들이 많거든요. 아시다시피 여기에서는 워낙 많은 일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래? 뭐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한 잔 더 따라 드리고.
“누나가 알 필요는 없지만 균열이라든지… 시간선의 흐름이라든지… 차원의 바다라든지…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요.”
“그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안주도 집어 드리고.
“네네. 솔직히 너무 힘들어요. 가끔은 다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로… 일이 끝나면 완전히 녹초가 돼서 쓰러진다니까요.”
“그래?”
살짝 푸념도 해주고.
“물론 누나보다 힘들지는 않겠죠.”
그리고 우리 누나 띄워 줘야지.
“누나 같은 협력자분들 때문에 저 같은 사람들이 더 힘내서 일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희라 누나가 좋아하는 귀여운 표정도 장착해 주자.
“사실 대륙에 있는 주민들과 접촉하는 건 저희로서도 필연적인 일이거든요. 어떤 협력자와 만나느냐에 따라 업무의 난이도가 달라져요. 저는 협력자를 잘 둔 편이죠.”
“글쎄… 난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말이야. 내가 널 도와준 적이 있었나?”
“지금부터 도와주시면 되죠.”
“…….”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보도록 하자.
“만약 괜찮으시다면 동료들의 신분을 보장해 주셨으면 해요. 그리고….”
“내가 왜.”
아닌가?
‘우리 별로 안 친한가?’
“…….”
“…….”
‘우리… 깐부자너… 누나… 왜 그래. 그 표정 뭐야.’
시야에 비친 것은 희라 누나의 손바닥이었다. 순식간에 목을 부여잡는 손이 느껴진다.
“내가… 왜. 내 뒤통수를 친 애새끼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까?”
‘시바… 우리 안 친했었나 봐. 깐부 아니었나 봐.’
“염치가 있으면 이렇게 찾아올 수 있나? 나 같으면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했을 텐데 말이야. 이렇게 스스로 굴러들어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할까? 응?”
“켁… 켁….”
“이거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야. 시공간균열이든, 대륙이든 간에 내 알 바 아니고… 네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도… 솔직히 나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 안 그래? 애초에 네 협력자였던 적이 있었나 싶은데… 만약 날 협력자로 선택한 게 맞다면 넌 운이 나쁜 편이겠네.”
“그러니….”
“입 닫아. 이 요사스러운 꼬맹아.”
‘시바. 시바.’
“참 배짱도 좋지. 나도 참 우습게 보였나 보네. 이렇게 찾아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면 지난 일이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야. 시바. 난 몰라. 난 모르는 일이야. 시바. 내가 한 거 아니에요. 누나.’
“여단에 우리를 팔아넘길 때는 언제고… 뭐? 정진호가 뒈져? 그렇게 말하면… 모든 게 끝나나?”
‘난 시바 팔아넘긴 적 없어요. 나는 항상 희라 누나한테 충성충성 하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힘을 최대한 뺀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내 목이 꺾일 것 같다. 아마 희라 누나가 조금만 실수해도 목이 바로 부러지지 않을까. 분명히 그냥 잡고만 있는 것 같은데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정말로 라파엘이라도 불러야 하나 고민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마 허튼짓을 하는 순간 곧바로 얇은 목이 으스러져 버릴 것이다.
심지어 이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무섭다. 1회 차 희라 누나는 사람 죽이는 맛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훼까닥 하면 곧바로 목을 꺾어 올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에는 있는 힘을 다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필… 필요한 일… 이었….”
“필요한 일이라는 건 없어. 요사스러운 꼬맹아.”
“도… 도움이… 될… 될 만한 정보를… 알고 있….”
“이번에도 배신하겠다? 불쌍한 표정 짓지 마. 울지도 말고. 다 연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겉모습만 귀여운 꼬맹이지… 속에는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나 들어가 있으면서….”
“진… 진짜… 아파서… 그래요… 누나….”
알고도 속을 수밖에 없는 필사의 연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아프단… 말이에요….”
지금은 꼬맹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