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67화
1회 차 희라(1)
1회 차에 와 있는 동안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주요인물과 마주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게 2회 차에서도 얼굴 본 지 오래된 희라 누나라는 사실이 조금 당황스럽다.
‘분위기 오지기는 하자너….’
확실히 2회 차보다는 1회 차와 더 어울린다고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2회 차의 차희라는 왠지 모르게 우리에서 뛰쳐나온 짐승 같은 느낌이었지만 1회 차의 차희라는 우리 안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느낌이었다.
살기나 기운 같은 것을 갈무리할 생각도 없는 것 같은 모습에 저절로 몸이 위축되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도 다르지는 않았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붉은용병들 역시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넘고 넘은 역전의 전사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차희라와 자신들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
언뜻 보면 이 새끼들이 여단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고 본인들이 위협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광고하고 있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그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조금 재미있었던 것은….
‘능력치가 높네.’
평균 능력치가 무척 높았다는 것. 2회 차에서는 볼 수 없었던 특성들도 보였고, 여러 가지 호칭들도 눈에 띄었다.
어디어디의 학살자, 어디어디의 미친 짐승, 같이 안 좋은 호칭들이 대부분.
물론 붉은전신이 되어버린 지금의 차희라와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현재 1회 차의 시기는 외신이 튀어나오기도 전이다.
당시 희라 누나의 스펙을 생각해 보면, 1회 차 쪽의 스펙이 조금 더 높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내실을 버리고,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정립하지 못했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주요인물들의 평균 스펙이 올라간 것이리라. 붉은용병의 단원들 역시 그랬으니….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가 라파엘과 싸울 수 있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애매하고 형편없는 놈들은….
‘이미 뒈져서 보이지도 않는 거였자너. 아니면 곧 뒈질 예정이든가.’
외신들을 상대로도 어느 정도 버텼다는 게 납득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간에 희라 누나와 붉은용병은 여전히 대화를 나누며 빠른 발걸음으로 장소를 옮기고 있는 중이다.
무언가가 긁히는 소리 같은 목소리들이 계속해서 들려온다.
“어디에 있다고 했었지?”
“현재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씨발… 이번에도 헛수고하러 가는 거면… 후우… 이게 몇 번째인지, 여단 하나 잡겠다고 여기저기에서 개지랄하고 있는데… 차라리 우리끼리 오는 게 나을 뻔하지 않았나? 그렇지 않냐고….”
“…….”
“머릿수만 채웠지. 쓸모없는 놈들이 태반이잖아. 안 그래? 그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는 개소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들어야 하는 거냐고. 제기랄.”
“시정하겠습니다.”
“막상 가면 놓쳤다고 개 같은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을 거야. 이 새끼들은.”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슬쩍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왠지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싶어진다. 보통 희라 누나와 눈을 마주치면 그렇지만 오늘따라 더더욱 눈을 피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센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본능이 그것보다 우선시된다.
저도 모르게 활짝 미소를 보내는 것도 당연했다.
세상 순수한 아이의 표정으로 말이다.
‘어차피 연줄은 만들어놔야 되자너.’
여기에서 활동할 동안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사람인데. 나중에 잘못 걸리면 신원확인을 하라고 염병을 떨 텐데… 희라 누나가 모든 걸 보증해 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잘 보여서 나쁠 건 없다.
열심히 하라고 주먹을 꽉 쥐고 박수도 보내주고.
‘희라 누나 파이팅!’
달려가서 응원하는 건 암만 생각해도 오바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원래 아부를 떨 거면 확실하게 떨어줘야 된다.
상대방이 너무 아부 떠는 거 아니야, 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어린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위화감도 없다. 곧바로 우다다 발걸음을 옮기자 붉은용병의 단원들이 나를 경계하지만….
“힘… 힘내세요! 힘내세요! 누나!”
라는 진심을 담은 목소리를 전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은 쓰레기 같은 여단 놈들에게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아이.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잠깐 멈춰.”
“괜찮아. 놔둬. 그냥 꼬맹이처럼 보이니까.”
“네.”
“힘내세요! 누나! 꼭… 복수해 주세요!”
어린애 입에서 복수해 달라는 말이 나오는 게 조금 크리피하기는 하지만 시대상을 고려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시바 근데 어린애라서 안 통하는 거 아니냐구….’
잠깐 시선을 둔 이후에는 그대로 사라지는 모습에 섭섭함이 밀려들어 온다.
‘시바 10년만 늙었어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파엘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아! 라파엘 님.”
“저건… 붉은용병이네요.”
“보셨습니까?”
“네. 정말로 사실이었군요. 평행세계라는 게 진짜로 존재할 줄은… 물론 형 말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반신반의하기는 했거든요. 제가 봤던 붉은용병 길드마스터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이었어요. 손가락도 두 개가 없었고….”
“…….”
“아니, 같은 사람이었지만 달랐죠. 심상치 않은 곳이에요. 물론 지금의 붉은용병 길드마스터와 비교할 수 없기는 하지만….”
이미 내가 한차례 해설한 것을 다시 되짚어보려고 하는 라파엘의 말을 막는다.
“아영 씨와 기모 씨는….”
“아직 안에 있어요. 지금 거기는 조금 시끄럽고… 이상해서… 그리고 지금은… 조금 심란해서….”
“아….”
‘이 새끼… 얘들 찾고 있었구나.’
잠깐 여기에 온 목적을 잊을 뻔했다.
‘라파엘 파티 찾으러 왔었지?’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인 만큼, 만약 캠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면 저기에 있을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환자들이 모여 있는 천막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기웃거린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는 당연히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 옳다.
“박리안 님이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너무 초조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네.”
“제가 전해 듣기로는 이런 캠프들이 곳곳에 있다고 하니… 주혁 님이시라면 분명히 캠프 중 한 곳에 체류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 겁니다.”
“아아아아… 그렇군요.”
“또 저희도 추적 임무에 포함될 수도 있으니 그때 본격적으로 흔적을 찾으면 될 것 같고요.”
“…….”
“…….”
“무사하겠죠?”
‘그럼 무사하지.’
“네. 당연히요.”
이미 시체가 돼서 저기 보이는 캠프파이어에서 소각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우울한 이야기는 듣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사냥개 이주혁과 기적의 사제 마리엔이라면 그렇게 쉽게 당할 정도로 멍청한 놈들도 아니다.
라파엘이 사라진 순간 이상현상을 깨닫고 곧바로 도주했거나, 운이 나쁘다면 이쪽 원정대들에게 붙잡혀 있을 수도 있겠지.
최소한 정진호에게 죽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쪽도 대놓고 도망치는 사냥개를 쫓을 정도로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위로가 도움이 됐는지 라파엘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그럼 그동안은….”
“일단은 캠프에 계속 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알아봐야 할 정보들도 있으니까요. 이쪽 녀석들이 여단의 꼬리를 잡으면 그때 함께 이동하는 것으로 하죠. 그때까지는 흩어져서 정보를 모으는 게 가장 현실적인 대응방법일 것 같네요.”
“아… 네, 형. 그렇게 할게요.”
‘아예 가이드라인을 잡아줘야 하나.’
안기모와 국민지야 전에 보여준 걸 생각해 보면 믿음직스럽기는 했지만 라파엘과 나머지는 이런 종류의 첩보 활동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버버거리다가 대화가 꼬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인원에 제한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렇게 천천히 라파엘에게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형… 붉은용병 단원들이에요.”
녀석의 말에 살짝 고개를 돌리자 3명에서 4명 정도 되는 인원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설마설마 하기는 했지만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걸 보고서는 내게 볼 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희라 누나가 날 버릴 리가 없자너….’
라파엘은 좀 긴장한 것 같은 표정, 혹시나 우리가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들켰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자너.’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목소리가 들려오는 중.
“거기 너.”
당연하지만 무척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
“너. 이름이 뭐지?”
“이…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옆 마을의 생존자인가?”
“네… 네.”
“오늘 저녁 8시에 저쪽 천막으로 찾아오도록.”
“네?”
“잘못 들었나? 오늘 저녁 8시에 중앙에 있는 천막으로 찾아오라고 이야기했다.”
‘누나 내가 마음에 든 거지? 그렇지?’
“용병여왕님의 명령이다. 단 1초도 늦지 마라.”
암요. 당연히 늦지 말아야지요.
근데 이 새끼들은 무슨 설명도 없다. 그냥 다짜고짜 찾아오라고 하면 끝인가 보다.
폭군도 이런 폭군이 없었지만 원래 강한 사람의 말에는 고분고분 따르는 게 정답이었다. 그게 희라 누나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는 녀석들의 행동이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 불과 몇 분 전에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해놓지만 표정을 보고 있자니 당장에라도 경거망동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특유의 정의로운 표정을 장착하며 주먹을 꽉 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가족을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갑자기 이런 식으로….”
‘하지 마. 시바. 하지 마.’
“넌 뭐지?”
“이 아이를 발견한 보호자입니다. 지금은 함께 움직이고 있고요. 늦은 시간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설명을 해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이 새끼가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그냥 간단히 이야기하고 외로움 좀 달래자고 부르려던 것 같은데… 희라 누나를 무슨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듯한 뉘앙스였다.
“죽고 싶나?”
‘근데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과민반응을 해?’
그냥 몇 마디 했을 뿐인데… 갑자기 왜 무기를 꺼내냐고. 다시 한번 이 새끼들한테 지성인의 자세 따위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냥 힘의 논리로 지배되는 야생 그 자체인 모양인지, 붉은용병 단원들은 당장에라도 라파엘의 목을 날릴 것마냥 포위하며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시바 법도 인정도 도덕이고 뭣도 없자너.’
우리 회색 비둘기도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인지 벙찐 얼굴을 하는 중.
나름 야생의 시대를 풍미했었던 라파엘이 저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면 이 새끼들은 진짜였다.
“한 마디만 더 지껄여봐라. 당장 그 목을 날려주지.”
라는 말을 듣고는 손이 점점 허리춤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개자식이 감히….”
‘파엘아… 그러지 마.’
녀석의 손을 꽉 잡은 것은 당연지사.
“괜찮아요. 형. 그러지 마세요.”
그냥 덕담이나 주고받고 오는 거야. 옆에서 재롱도 좀 부려주구.
희라 누나 재롱부리는 거 좋아해. 아무리 법 도덕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한들, 우리 희라 누나가 무슨 해코지를 하겠어? 원래 옛날에 큰일 하는 사람들은 어린 시동들 재롱잔치 하는 거 구경하고 그랬어.
우리 누나는 큰일 하는 사람이고….
혹시나 약속을 취소할까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