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65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5)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일방적인 특성이었다. 파트너는 사용자가 허락하는 정보들만 받아들일 수 있고, 사용자는 파트너의 모든 것들을 보고 주무를 수 있었다.
머릿속 이곳저곳을 드나들 수 있고… 마음만 먹는다면 파트너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끊고 이어붙이는 것 또한 녀석이 아니라 사용자에게 달려 있었다는 것은 구태여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예를 들자면 공동으로 사용하는 프로그램에 컨트롤 권한을 모두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것도 한계가 없는 컨트롤 권한을 말이다.
같은 프로그램을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도권은 회귀자 사용설명서 특성을 가지고 있는 사용자에게 있다는 것.
김현성이 저항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그것과 이건 본질적으로 다르다.
얼마나 꽁꽁 싸매고 있는지 열리지가 않은 금고를 보는 것 같은 느낌, 김현성의 무의식이 1회 차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 새끼는 지금 내가 지 머릿속을 뒤져보는지도 모르는데….’
슬쩍 망원경으로 김현성을 살펴보면 전혀 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선생님과 무슨 그림 그리기를 하고 있는 모습, 뭔 어린애가 낙서해 놓은 것마냥 거지 같은 그림을 그려놓고 웃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저 좋다자너.’
그때처럼, 본인의 의지로 스스로 저항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 들어가는 걸 거부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번 시도해 볼까 싶었지만 무언가 악영향이 있을지도 모르는 만큼 조금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만능에 가깝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 정도로 방벽을 두껍게 쌓아 놨다면 확실히 김현성에게도 1회 차는 잊고 싶은 기억 속으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
“부길드마스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요. 별일 없어요. 기모 씨.”
“거의 다 와가는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군요.”
“…….”
“…….”
“주변에 다른 특이사항은 없었나요?”
“네. 목적지까지는 쭉 조용한 것 같습니다. 우정 길드의 국민지님께서 레인저들과 함께 정찰을 다녀왔다고 하더군요. 제가 보기에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안기모의 말을 듣고 있던 유아영이 중얼거렸다.
“그, 그나저나 정말… 기분 나쁜 장소네요.”
“동감합니다.”
“바닥도 끈적거리고… 저는 이런 장소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아직도 대륙에 미개발 지역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근처에 이런 폐허가 숨어 있을 줄은….”
심심했는지 안기모가 다시 말을 이어왔다.
“그런데. 부길드마스터… 그래서 결국 이 원정은 뭡니까? 이제 설명해 주실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나도 잘 몰라. 시바.’
하지만….
“라파엘 파티가 실종됐어요. 이 원정은 구조대고요. 지금까지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네요.”
“끄응… 그 라파엘 파티가 실종될 정도라면…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길드에 지원 요청이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얘 진짜 은근히 몸 사려.’
“제가 몸을 사린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게 아닙니다. 부길드마스터. 혹시 사고라도 터지면 제 입장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냥 간단한 업무라고 알고 왔는데… 이거 또 무슨 대륙 멸망의 시발점 같은 에피소드가 숨어 있는 거라면… 장담하건대 길드마스터한테 목이 날아갈 겁니다.”
“…….”
“조혜진님은 뭐 두말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다른 길드원들에게 원망받기 싫습니다. 싫어요.”
“유아영님도 같은 생각이에요?”
“아니요. 저는… 부길드마스터께서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
“…….”
“하핫…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그냥 노파심에 한 번 지껄여 본 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이동 중에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목이 타실 것 같은데 물 한잔 따라 올리겠습니다.”
“…….”
“…….”
‘원래 이런 놈이었지.’
유아영도 기가 찬다는 눈으로 안기모를 바라보고 있는 중, 그래도 안기모가 선배라고 알고 있었는데 뭔가 선배로서의 위엄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본인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말이다.
여전히 웃고 있는 낯짝으로 슬쩍 슬쩍 농담을 던져오는 바람에 심심하지 않은 것은 좋았지만 조금 시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저 앞에서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형.”
“드디어 도착한 모양입니다. 부길드마스터.”
“내려주세요.”
“네.”
영상에서 본적이 있었던 폐허가 시야에 들어온다. 한쪽 벽면을 커다랗게 차지하고 있는 육망성, 그리고 전투의 흔적들이었다.
이미 사안을 전달받은 우정길드의 마법사들과 조사관들도 여러 가지 장비를 꺼내며 조사에 착수하고 있었다.
무척 값비싸 보이는 마도구들로 마력의 이상반응 같은 것들을 측정하거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마법사들이 육망성이 그려져 있는 벽면을 향해 뭔지 모를 주문을 외우고 있다.
물론 눈에 띄는 성과를 얻을 수 없는 게 뻔했지만 그래도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낫다. 기본적인 검사는 해야 했으니 말이다.
“조금… 어떤 것 같으세요? 형?”
“글쎄요. 조금 더 살펴봐야겠지만….”
‘진짜 흔적도 없네.’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올라갔는지….
“혹시 지하로 향하는 통로 같은 곳은… 없는 게….”
“네. 이미 전부 확인했지만 폐허에 다른 기관은 없어요. 마력반응도 전혀 없고요.”
‘누가 봐도… 촉매로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 외에는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단서라고는 문어촉수 괴물들과 앞에 보이는 저 육망성 외에는 없었고, 문어촉수 괴물과의 전투에서 튄 놈들의 혈액이 육망성에 튀어 우연히 마법진이 발동되었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었다.
실험해 봐서 나쁠 건 없겠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쉽사리 손을 댈 수가 없다.
물론 부딪쳐 보기야 할 것이다. 힌트가 없을 때는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여기가 1회 차로 이어진 통로가 맞다면…’
돌아올 수 있는 양도 충분하다. 라파엘도 한번 흘러 들어간 후에 돌아왔으니 무조건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한 건 아쉽지만 나 역시 대략적인 흐름에 대해 깨닫고 있는 만큼 금방 눈치챌 수 있지 않을까.
“형… 형?”
“…….”
“그건 뭐예요?”
“촉매입니다. 아마 저 육망성을 발동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건 언제….”
“라파엘 님께서 주신 샘플로 만들었습니다.”
“그거 괜, 괜찮은 건가요?”
‘나야 모르지. 시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개 같은 일이 생길지, 근데 너무 퍼즐이 딱딱 들어맞는데 어떻게 해?
가끔은 실험용 쥐가 되기를 자처하기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욱더 말이다.
라파엘의 말을 무시한 직후에 파티원들을 물린 것은 당연지사. 우정길드원들 역시 조금은 당황한 얼굴로 내가 하는 짓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 오래간만에 주문을 외우자 자그마한 포션병에 든 액체형 촉매가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내 추측이 맞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신할 수 있었다. 라파엘만 이동하지 못한 것은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포션병의 뚜껑을 넣고 땅바닥에 흘리자 주문에 맞춰 액체가 육망성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마법진과 호응하여 가득 채운 이후에는….
휘이이이이이이잉….
갑작스레 강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형… 형?”
“부길드마스터… 이거… 괜찮은 겁니까? 부길드마스터?”
‘조용히 좀 해. 안기모 이 새끼야. 시바 집중 안 되니까.’
“다들 손 잡아요.”
“네?”
“다들 가운데로 모여서 손 붙잡으라고요!”
“네… 네!”
그리고….
“어….”
바람이 멎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손을 잡고 난리 부르스를 추고 있었던 파티원들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어떤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던 아까 전과는 반대로 지금 우리가 위치한 곳에서는 여러 가지 흔적들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 레인저나 도적 직군이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평범한 사람이 보더라도 차이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보인다.
폐허 곳곳에 말라붙은 혈액들. 여기저기에 나뒹구는 무기들과 폐허를 감싸고 있는 나무.
심지어….
‘이건 따뜻해.’
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
언뜻 보면 변함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폐허 역시 조금씩 다르다. 당황하고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둘 이상한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부… 부길드마스터… 여기는 대체…”
“형?”
“…….”
“분명히 같은 장소인데… 달라… 아까 그건 환상이었나? 마력반응은 분명히 없었는데….”
“일단 주변 조사에 착수하는 게 좋을까요? 전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라파엘 님의 파티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멘탈 나가는 것도 당연해….
‘우리가 1회 차로 들어온 걸 모를 테니까.’
물론 나도 우리가 정말 1회 차에 도착한 건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아예 정보가 없는 파티원들 사이에서는 별 이상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본인들이 환상에 갇혔다고 주장하는 녀석들부터, 끝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은 전투에 흔적을 보고 불안해하는 놈들도 있다. 갑자기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심지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제길!”
“여기에 있었던 거 맞아?”
“죽여! 죽여!! 여단이다! 여기에 숨어있었구나. 이 개자식들!”
‘시바.’
“으아아아아아악!”
“당장 지원 요청해!! 여단이다! 놈들이 도망친다!”
심지어 점점 목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이렇게 곧바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전투준비를 해야 할지, 아니면 숨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아예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빠르게 옷을 벗은 이후에 흙구덩이에 한바탕 나뒹군다.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에 유아영이….
“부… 부길드마스터?”
라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폐허 안으로 수십 명의 인간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뭣들 하고 있어?! 여단 새끼들 떴다는 거 보고 못 받았어?! 당장 움직여! 이 새끼들아!”
“…….”
다소신경질적인 말투….
그리고….
“뭐야… 너희 어디 소속이야?”
의문이 담겨 있는 눈초리.
곧바로 안기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
“…….”
내 기대에 부응하듯… 안기모가 머리를 긁으며 입을 여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여전히 내 손을 꽉 잡은 채였다.
“죄송합니다. 근처에서… 아이를 발견해서….”
“뭐라고…?”
유아영도 나를 꽉 안아주고 있다. 누가 봐도 어른들이 아이 한 명을 둘러싸고 보호하고 있는 듯 한 모양새에 갑작스레 폐허를 찾은 일련의 무리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근처 마을의 생존자인 것 같습니다. 분대장님.”
“제기랄… 이 악마 같은 새끼들… 저렇게 어린 아이들까지….”
“분대장님. 일단 이동하셔야….”
“알겠다.”
같은 이야기를 중얼거린 이후에는….
“꼬마를 데리고 캠프로 돌아가라. 중간에 습격이 있을 수도 있으니 특별히 주의하도록. 그 정도 인원이면… 지원 병력은 필요 없겠지.”
안기모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네. 분대장님!”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애드립. 그리고 그걸 뒷받침해 주는 연기력.
‘키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이 새끼를 데리고 온 게 정답이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