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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230화 (1,22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30화

대륙에서(4)

박기리가 어떻게든 식사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해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길드원들 모두 직접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 외에는 평소랑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대화는 끊이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옛날에 형님이 나한테 뭐라고 했냐면 말이요.”

“스미스 님 근데 그 콧수염은 매일 정리하시는 건가요? 정리는 샵에서 하시나요? 아니면 스스로….”

“…….”

“아니. 그러니까. 그때 기모 아저씨가… 진짜 짜증 나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거, 그러고 보니까 엘프왕국은 요즘 좀 어떻소? 그러고 보니까 혜진이 누님이랑 엘리오스 님이랑 좀 친했던 거 아니었소?”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무슨 그렇게 정색을… 거 엘리오스 그놈이 누님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소?”

“소, 소라야.”

“정하얀 님. 이것 좀 드세요.”

“오, 오빠. 오늘 세라 보셨어요?”

정신없는 분위기도 그대로였다.

박덕구, 안기모, 김예리가 쓸데없는 말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주도하고, 선희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식사하고, 엘레나는 입을 가리며 웃어주고.

워낙 테이블이 크다 보니 모두가 함께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했지만 이상하게도 잘 어우러지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박기리 녀석들이 워낙 오지랖이 넓다 보니 이 자리 저 자리 참견하고 있는 효과인 것 같았다.

심지어 김현성에게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정말로 그걸로 문제가 끝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로 감정이 상하지는 않은 것 같은 모양이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건 하나로 뚱해질 사이는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 것 같은 느낌.

서로 앙금은 없어 보인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태가 개선될 여지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냥 견제하는 것뿐이자너.’

이를테면 김현성이 갑자기 미쳐 버려 이쪽을 습격할 때의 시뮬레이션을 한 채로 자리 배치를 한 것 같았다.

박덕구는 곧바로 김현성을 가로막을 수 있게, 조혜진과 유아영은 옆으로 김현성이 박덕구를 피해 빠져나갈 것을 대비해 길을 막아내는 역할.

암살자인 김창렬과 박리안은 당연히 김현성의 뒤로 배치되어 있었고 김예리는 프리롤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하얀을 비롯한 후위들은 비교적 나와 가깝게 배치되어 있었다.

알프스와 벨리에는 김현성을 상대하기에는 전력 외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고….

중장거리가 전부 가능한 스미스 대령은 가운데. 대충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배치 자체가 너무 노골적이다.

김현성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음이 분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 것이 살짝은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말을 거는 것 정도는 허락된 모양인지 녀석이 조심스레 말을 이어왔다. 솔직히 이것도 준비된 대사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도 그렇고.’

뭔가 목적이 있기는 한 거 같자너.

“그래서 기영 씨는… 언제부터 활동하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몸도 이렇게 됐고 아마 당분간은 사람들 만나면서 조금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오스칼 님께도 인사드려야 하고, 카트린 의원님이나 바젤 교황님 같은 분들 말이에요.”

“다행이군요. 혹시 곧바로 복귀하시지는 않을까 걱정됐는데….”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되지. 형님이 복귀하고 싶다고 해도 거 우리가 반대할 거라니까. 모처럼 생긴 휴가도 안 좋은 일 때문에 모두 취소됐으니까…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은퇴했으면 좋겠소.”

“무슨 벌써 은퇴를 해?”

‘얘네 나 은퇴시키려고 하는 것 봐.’

“거, 은퇴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요. 상희 누님도 일찍이 은퇴해서 조용하고 즐겁게 잘 보내시는구만. 솔직히 형님이 대륙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야 다 이해하고… 뭐… 그런 심정이기는 한데… 이제 그 무거운 짐을 그냥 내려놔도 될 시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니까. 파란 길드도 형님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교국도… 이제 어느 정도 체계가 잡혔으니까.”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다른 건 몰라도 이놈의 방구석은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파란뿐만이 아니다. 대륙이 안정화 된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내 외부적으로 완전히 불안함이 가신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게 정상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대륙의 상징이 자리해 있기 때문이다.

조금은 눈을 돌려도 눈에 거슬리는 놈들이 속속 튀어나오는 판국에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은퇴한다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감히 교국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려고 하는 빌런 놈들이 대놓고 고개를 들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몇몇 국가에서는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원래 지금 같은 시기가 제일 중요한 시기야. 아직까지는 은퇴할 생각 없으니까. 이 이야기는 다시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우리도 바보는 아니야. 기영이 아저씨. 당장 아저씨 은퇴한다고 하면 문제 생길 것도 알고 있고… 교국에서는 아니더라도 연방이나 연합, 아니면 공화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아저씨가 모든 걸 다 책임질 필요는 없잖아.”

“예리 말이 맞습니다. 이기영 님. 오히려 적절한 시기 같아요.”

“아니요. 아직 적절한 시기가 아니에요. 장담하건대 은퇴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걱정하시는 마음들은 이해가 가는데 아직 그러고 싶지 않으니까 이야기하지 않을 겁니다.”

더 설득하는 게 의미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인지 입맛을 다시고 있는 박덕구.

“쩝.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언젠가는 쉴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야.”

“뭐, 우리가 기분 나쁘라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살짝 의향만 물어본 거요.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아니야. 조금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나도 인지하고 있으니까. 걱정해 줘서 고맙다.”

“형… 형님….”

“그래서 너는 뭐 할 건데 지금부터.”

“뭐… 나는 형님이랑 똑같지 조금만 쉰 다음부터… 몸 좀 만들고… 던전도 간 지 오래된 것 같으니까 한번 들러야 될 것 같기도 하고….”

“파란 길드에 쌓여 있는 의뢰가 있어서 아마….”

“아! 그게 있었지. 예리 말이 맞소, 형님. 아마 그렇게 될 것 같은데.”

혜진이야 쭉 길드 업무를 볼 거고….

하얀이도 쉬다가 마탑에서 신형 워프게이트 연구에 착수할 것이다.

내가 약속한 건 아니지만 한소라는 따로 자리를 만들어주기로 했었지.

사실 박덕구 녀석이야 여유로운 편이다. 녀석에게 할당된 임무 같은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시바 쉬라 마라 하는 거지.’

심지어 김예리와 안기모도 직책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다른 길드원들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선희영은 아마….’

조혜진의 일을 도와 길드를 운영하지 않을까. 주로 외부 인사들과 접촉할 것이 분명했다.

언론담당관인 스미스 대령은 벌써부터 일에 치인 것 같은 얼굴로 묵묵히 자신의 슬픈 미래를 그리고 있었고… 이종족들을 상대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엘레나도 마찬가지.

내가 어려진 만큼 길드를 떠나지는 않겠지만 분명히 엘프왕국 쪽과 계속해서 연락을 취할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모두가 곧바로 하드한 업무에 투입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시간을 내서라도 밀린 일을 처리하려고 할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지금 당장 할 일이 넘치는 스미스 대령은 제외. 당분간은 모두들 잃은 시간을 보상하기 위해서 일상을 보내겠지만 결국에는 다가오는 일을 피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란의 길드 직원들이 워낙에 유능하기 때문에 걱정할 만한 일들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많은 시간을 허비한 만큼 다시 밸런스를 잡아줘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와중에 궁금했던 건… 역시나 김현성.

‘쟤야말로 조금 쉬어야 할 것 같은데.’

파란에서 길드마스터의 업무라는 게 사실상 최종 결재 같은 것 이외에는 없는 편이다.

그것마저도 내가 거의 전부 도맡아 처리하다 보니 김현성은 딱히 할 일이 없다.

보통 라베하 도시계획이나 린델 상업구역확장과 같은 일들을 불도저마냥 밀어붙이기는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그런 걸 맡을 여력이 없어 보인다.

은근슬쩍 운은 띄운 것은 당연지사.

김현성이 조금 쭈뼛거리며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현성 씨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아… 저는.”

“네.”

“그러니까….”

한숨을 크게 내 쉰 이후에 녀석이 다시 말을 내뱉었다.

“본래는 조금 나중에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만….”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일단은 치료를 받아보는 게 어떨까 생각합니다.”

“혹시 어디 다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이런 말씀 드리기 조금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지금 제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드원들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로헨에서 일어난 일들을 일일이 말씀드리기는 힘들지만… 스스로 느끼기에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는 것 같아서….”

“…….”

“정신적인 문제들을 치료받을 수 있게 외부에서 도움을 좀 받을 생각입니다.”

“…….”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말인즉슨….

‘입소한다고?’

슬그머니 김현성을 바라보자 왠지 모르게 말을 꺼내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처럼 보이기야 했다.

현대인이야 누구나 한두 가지 정도는 정신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이 대륙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걸 직접 본인의 입 밖으로 내뱉고 스스로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단언하건대 저렇게 문제를 모두에게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은 웬만한 결단으로는 하기 힘든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새끼도 그동안 살짝 힘들기는 했을 거야.’

아니, 살짝 정도가 아니다.

멀쩡한 현대인이 대륙에 떨어져 미친놈과 엮어 땅바닥까지 처박히는 과정에서 김현성이 얼마나 많은 문제와 직면했겠는가.

이미 현대인의 사상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나 되어야 하는 이야기다.

본래부터 김현성은 정신병의 총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학대받고 있었다.

사회공포증, 폐소공포증, 광장공포증을 포함한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고, 심각한 수준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있었다.

조울증은 물론이거니와 강박장애, 분노조절 장애와 같은 인격장애까지 겪고 있다.

물론 이기영과 같이 있을 때는 마음이 꽤 편해지기야 했겠지만 오히려 그게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 것이리라.

김현성 스스로 느끼기에 일종의 조현병 같은 것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의심하지 않는 것은 의심하고, 믿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믿고 재확인하고….

‘얘 같은 경우에는 아마 이런 증상이 심각해지지 않았을까.’

어디 사는 누군지도 모를 누군가가 이기영을 위협하고 있다고, 누군가 이기영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 누군가 진짜 이기영을 숨겨놓고 가짜 이기영을 데려다 놨다고….

불안장애 같은 것들이야 스스로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직접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수준으로 문제가 커지자 녀석과 길드원들이 같이 의견을 섞어 이런 결론을 내놓은 것 같았다.

‘시바 이거 나 때문은 아니지?’

“아마 내일 곧바로 떠날 것 같습니다.”

“네?”

“연합 쪽에서 지구에서 유명한 박사님께서 소환되셨다고 하더군요.”

“아니요. 구태여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현성 씨가 실수할 만하다고 제가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었나요.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로헨에서 있었던 일들은….”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니….”

“다른 곳에는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심하겠습니다. 안 좋은 소식이 들리면 길드에 피해가 갈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차례 상담을 하고… 이후는 박사님과 이야기해 보기로 했으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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