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25화
로헨에서(3)
“이기영 님께서 맡기신 편지를 전달해 드리러 왔습니다.”
“나중에 읽어보지. 거기에 놓고 가라.”
뭔가를 남기고 갔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게 편지라니.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웃는 호위병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편지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어차피 쓸데없는 말들이 적혀 있을 것이다. 유언이나… 뭐 하고 싶었던 말들 같은 것 말이다.
딱 녀석다웠다. 이미 본인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놈이었으니 나름의 준비는 해놓았겠지.
괜스레 다시 한번 낙원을 바라보니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읽어보는 게 어떻겠는가?”
“흥.”
“정말로 읽지 않을 겐가?”
“그다지… 지금은 읽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어차피 의미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전부겠지.”
“그래도 기영이가 남긴 편지가 아닌가?”
“지금은 읽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다.”
“자네라면 정말로 읽지 않을 것 같아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그 아이를 너무 미워하지는 말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아. 그것뿐이다.”
“해야 할 일? 그러고 보니 뭐… 영웅이 된다고 했던가? 위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효열. 자네는 이미 영웅일세.”
“…….”
“…….”
“내가 한 게 아니야. 영감.”
낙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레이먼 볼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었다.
그 많은 전투도, 노을빛의 군주와의 싸움도, 로헨을 낙원으로 인도한 것도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었다.
상투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말로 이기영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게 노을빛에 휩싸여 절망감에 빠져 있었던 그 날, 그때 있었던 그 마지막 전투에서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요행이었고 우연이었다.
노을빛의 군주를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 녀석이 제멋대로 역소환된 것이 전부였다.
아마 이기영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마지막까지 힘을 낼 수 없었겠지. 전부 다 포기하려던 찰나, 더 이상 힘이 달려 움직이지 못했을 때 녀석이 마지막에 등을 떠밀어 준 것이다.
아마 다시 해보라고 해도 절대로 다시 해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싸움은… 그 싸움은 틀림없이 우효열의 싸움이 아니라 이기영의 싸움이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녀석은 사라졌다.
할 수 있다고 등을 밀어주고는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인사 같은 것들을 했다면 조금 더 실감이 났을까.
게다가 이런 것까지 맡겨 버렸다.
‘낙원… 쓸데없는 짓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던져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녀석은 도대체 나에게서 뭘 봤던 걸까.’
고민에 빠진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녀석은 우효열이라는 인간에게서 뭘 봤었던 걸까. 성격이 꼬인 멍청이가 뭐가 필요하다고 다가왔을까.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주제에 그 눈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왜 굳이 우효열이라는 인간을 영웅으로 만들려고 했을까.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녀석은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니… 어째서 자신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고 있다니… 이름과 나이 말고는 아는 것이 없다니….
충동적으로 레이먼 볼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영감.”
“…….”
“놈은 어떤 사람이었지?”
“왜 이제 와서 더 알고 싶어진 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그냥 놈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아마 내가 본 것과 우효열 자네가 본 게 다르지 않을 게야. 그러니까 기영이는….”
“…….”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고, 자신보다 타인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지. 늘 용기 있고, 순수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에 투철하며, 악의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구만.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그런 아이였어. 그래. 딱 이 낙원 같은 사람이었다 이 말이야.”
“낙원?”
“뭐가 보이나?”
레이먼 볼트 영감이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다시 한번 낙원을 바라본다.
“낙원이 보인다.”
“답답한 놈….”
하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계가 분열되고 조립되고, 파괴되고, 망가지고 있는 와중에도 낙원은 꿋꿋하게 자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품에 안고 지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녀석 역시 이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자들을 위해서, 소외받은 이들에게 계속해서 손을 내밀었고, 그 어떤 어둠과 고통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는 적이 없었다.
쓰러져도 언제나 꿋꿋하게 다시 몸을 일으켰고 절망에 매몰되거나 좌절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여린 아이이기도 했었네….”
“…….”
“자네는 지금 낙원에 떠도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군.”
“꽃과 풍요의 성자가 선지자라는 소문 말이야.”
“대답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다. 놈은 선지자니 천사니, 신 같은 게 아니야.”
“그래?”
“겁이 많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인간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 한 것에는 질투심이나 호승심을 곧장 드러내기도 했었고 두려움에 먹혀 불안해하기도 했었다. 놈은 항상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병신처럼 질질 짜기도 했었지. 짜증이 난다며 대화를 하지 않고 가버리기도 했고 그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하기도 했었지.”
“…….”
“겉으로는 매번… 괜찮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난 이기영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녀석은 그 모든 걸 이겨낼 정도로 강했던 것뿐이야. 어째서 어떤 것에서 책임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녀석은 바보 같은 놈이었다. 그런 초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런가?”
“그놈처럼 병신 같은 놈은 또 없을 거다.”
“그리고?”
“난 녀석이 삶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태어나길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태어난 놈이었어. 놈이랑은 태생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놈은… 분명히…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었어. 녀석을 따라가게 만들고 싶었던 뭔가가 있었단 말이다.”
“…….”
“개자식. 그 개자식이….”
“…….”
“그 녀석은 개자식이었다. 그래. 제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고 제멋대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또라이 같은 놈이었다. 악의가 아니라 선의와 호의로 사람을 병신처럼 만들고 가스라이팅하는 개자식이었단 말이다. 그 녀석처럼 또 악마 같은 놈이 없을 거다. 그 자식은 선지자 같은 게 아니야.”
흥분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머리에 열이 뻗친다.
“녀석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속 편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 거다. 노을빛의 군주 그 개자식은 마음에 들지 않으니 머리통을 날려줬겠지만 로헨의 사람들을 구한다느니 대륙을 구한다느니 하는 건 절대 내 취향이 아니야. 녀석의 이정표가 없었다면 여기 모여 있는 버러지들을 인도하지도 않았을 거고, 녀석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제길! 나는 지금 내가 한심해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
“그놈은 책임을 강요하는 개자식이야.”
“그런가?”
“나는 양아치 같은 놈이었다. 근데 그 개자식이 나를 개똥 같은 영웅 같은 게 하고 싶어지게 만들었어. 그 개자식이 말이다. 내가 평소에 비웃고 싶어지던 것들을 하고 싶게 만들게 했다 이 말이다. 내가 가장 혐오하던 것들을 원하게 만들었다 이 말이다. 이게 얼마나 거지 같은 일인지 알고 있나 영감?”
“…….”
“이기영… 그 개자식이… 이기영… 그 개자식이! 나를 바꿔놨어.”
눈이 흐려지는 것은 결코 눈물을 쏟을 것 같아서가 아니다. 코끝이 찡해지는 것도 그 병신같은 놈이 생각나서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를… 이렇게 만들어놨다 이 말이다.”
“의미 없는 질문이었군.”
“뭐라고?”
“이미 기영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나? 몇몇 말들은 인정할 수 없지만 자네는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이기영을 잘 알고 있어.”
“헛소리.”
“이 늙은이보다는 자네가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만.”
“나는….”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
“…….”
“글쎄.”
자신은 뭘 하고 싶은 걸까.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 목적이 있었다.
“대충 이 거지 같은 공황이 끝나기를 기다려야겠지. 그다음에 낙원이고 나발이고는 내 알 바가 아니다. 윌리엄도 정신을 차린 것 같으니 그 녀석이 알아서 하겠지. 적어도 나보다는 녀석이 그 자리에 더욱 알맞을 거다.”
“그럼 자네는?”
“녀석을 살릴 방법을 찾아낸다.”
“그래?”
“윌리엄도 살아났고, 영감도 살아나지 않았나?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풍경도 비현실적인 마당이다. 놈을 되살리는 건 오히려 쉬운 과업처럼 느껴질 정도야. 영감은… 영감은 어땠지?”
“글쎄. 전에도 말했다시피 기억은 없네. 그저 눈을 뜨니까 낙원이었다는 것밖에는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어째서 살아 있는 건지, 왜 이 늙은 목숨을 거두지 않고 그리 밝게 빛나는 꽃 같은 아이의 목숨을 거두어 갔는지 하늘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라네.”
실제로 레이먼 볼트의 눈에는 회한이 가득해 보인다.
“말년에 커다란 숙제를 떠맡은 기분이야.”
“내게 준 숙제보다는 덜 하겠군.”
“뭐 그렇겠지. 확실히 자네에게는 조금 더 중요한 걸 맡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녀석은 자네를 믿고 있는 모양이야.”
조금 씁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감의 모습이 보인다. 시선은 한쪽 눈에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레이먼 볼트에 계속해서 비치고 있었던 빛이 조금씩 사그라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눈으로 가져간다.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반짝이든 금안의 빛이 천천히 꺼지고 있었다.
왜일까.
왜 자꾸 공허해지는 것 같은 기분일까.
자신은 항상 혼자였다. 그것이 더 익숙하고 편리하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허무할까.
이제 정말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왜 이렇게 몸에 힘이 빠질까.
“괜찮은 건가.”
“말… 걸지 마라. 영감.”
“이제는 마음 편하게 떠나고 싶은 게야.”
“절대로 내가 떠나지 못하게 할 거다. 다시 데리고 와서 로헨에 녀석을 처박아 놓을 거다.”
“우효열 자네… 지금… 울고 있는 겐가?”
“죽여 버리기 전에 꺼져… 영감….”
울고 있나.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지. 확인할 수 없다.
그냥 계속해서 고개를 푹 숙인다. 어깨와 턱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앉아 있는 땅바닥에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비라도 내리는 건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싶었지만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 뒤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도 분명 말했지만… 내가 볼 때는 자네는 충분히 기영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으이.”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분명 더 알고 싶기 때문일 게야.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긴 시간도 아니었으니.”
“…….”
“조금 더 녀석을 이해하고 싶거들랑 편지를 읽게.”
“…….”
“기영이도 그걸 바라고 있을 게야.”
그리고… 영감이 떠나고 한참 뒤에 편지를 들어 올렸다.
[안녕하세요. 효열 씨.]
진부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