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20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13)
“도대체… 왜!! 지금 와서 개지랄을 떠는 거냐고! 이 개자식!!!”
-하… 하하하하하하!!
“미친… 미친!”
최악의 3페이즈였다.
-하… 하핫! 하하하하하!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누워 있던 몸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는 모습은 대충 보기에도 압도적인 광경 그 자체였다.
광소를 터뜨리는 김현성의 웃음소리가 긴장감을 더해준다. 내 일이 아니었다면 마지막 페이즈로 이동하는 간지 나는 연출에 환호했겠지만 저걸 보고 드는 생각은 절망 외에는 없었다.
다소 탁하게 보였던 노을빛이 더욱더 환해진다. 잿빛이 걷히고 진짜 노을이 눈앞에 펼쳐졌다.
우효열조차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노을빛의 군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변신 중에 때리거나 각성 중에 때리는 걸 금지시킨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놈은 조용히 노을빛의 군주를 살피고 있었다.
압도적인 존재감에 몸이 굳어버린 것이 첫 번째 이유.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빛나고 있는 한쪽 눈도 신경 쓰일 것이 당연할 터.
-저건 뭐지. 어째서 녀석이….
‘나도 몰라 시바!’
도대체 왜 지금 와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것인지 당황스러울 지경, 애초부터 로헨을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이기영 이 쓰레기 새끼가 남의 대륙 사정에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지 않은가.
최선의 방법이 있는데 구태여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걸까. 아니면 중간에 마음을 바꾼 것일까.
전자 후자 어느 것 하나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기영은 변덕스러운 개자식이다.
막말로 김현성이 처맞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도 쥐어 패다 보니 갑자기 누가 지 물건을 건드리는 것 같았을 수도 있다.
그 결과 기분이 나빠져 그냥 뒤집어 버리자고 마음먹은 것이라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뭐 어쩌라는 거야… 제길… 도대체 뭘 어떻게 더 해야지 만족하는 건데.’
김현성을 잡긴 잡는데, 상처 없이 잡아주라는 게 말이야?
아니면 뭐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라도 있었어? 아직도 부족해 보여?
우효열이 성장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정답을 알려주지 않은 클라이언트 보다 답답한 것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수정하라고 무지성으로 외친다고 한들, 이쪽이 뭘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거래를 끊는다고 하면 속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겠지만 이 거지같은 클라이언트는 거래가 끝났다고도 이야기해 주지 않는다.
그냥 시위할 뿐이다. 너는 틀린 길로 가고 있다고… 나는 그냥 네가 마음에 안 들고, 네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쩌면….’
계약. 특약사항에 뭔가 묶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기영 본인이 먼저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는 특약이라도 묶여 있는 건가? 정말로 배째고 것이 아닐까.
로헨을 밀어버리는 게 가장 편한데 구태여 내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없다고 여긴 건가?
가능성은 후자에 열려있는 것 같았지만 정답이 어떻든 간에 놈이 개자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발버둥 치는 것밖에는 정답이 없다고 느껴진다.
“이 개새끼….”
-…….
“이 개 쓰레기 사기꾼 새끼.”
김현성이 천천히 땅바닥에 내려앉는 것이 보인다. 전과는 다르게 웃음기가 보이는 얼굴이었다.
‘우리 싸울 이유 없잖아. 지금부터 화해하는 건 어때.’
너 이기영 찾았잖아. 그래서 지금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하자너.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고 있는 녀석이 눈에 보였다.
‘너 그냥 이제 집에 가면 되잖아. 기분 좋게 그냥 가면 되잖아….’
하지만 녀석은 싸우겠다는 듯이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이미 옷가지는 넝마가 되어 있고 얼굴도 성하지 않았지만 이죽거리는 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 모양이다.
“효열아.”
-뭐?
“올 거야.”
투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튕긴 녀석이 돌진해 왔다.
예상하기는 했지만.
‘못 읽겠어.’
습관, 버릇, 검술, 전부다 초기화된 것 같은 백지 상태로 보인다. 아마 이기영 쪽에서 그런 주문이 있었을 것이다.
떠올리지 말라고. 그냥 생각하지 말고 일단 냅다 돌진하라고.
‘이건 말도 안 돼.’
콰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괴물이 부딪치는 중에도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다.
불리한 싸움이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녀석의 눈에는 보인다.
내가 파악할 수 없는 걸 녀석은 파악하고 있다. 내가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보다, 녀석이 받아들이는 정보의 양이 더 많다.
서로 주먹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김현성은 유효타를 모조리 막아내고 있다.
‘그것만 문제가 아니야.’
싱크로율의 차이 역시 불리한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이쪽의 전달 속도가 결코 느린 것은 아니다. 정확히 시간으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어찌 됐건 간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모조리 우효열에게 전달된다.
찰나라고 할 정도로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지만 저쪽의 싱크로율은 꽃기영과 우효열의 시간을 아득히 넘어섰다.
소프트웨어도 하드웨어도 기기도 모두 밀린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 심지어 버전도 다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밀리고 있는 것은 우효열이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계속해서 주먹을 뻗고 발을 뻗어보지만 닿지 않는다.
녀석에게도 이기영이 있다. 공격을. 루트를,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주먹을 뻗어 공기가 스치는 바람도 이기영 개자식은 모조리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길… 제길!”
-죽어! 이 개자식!
“이 죽일 놈의 새끼! 이 쓰레기 사기꾼 새끼!”
우효열의 꼬리를 쳐낸 김현성이 검을 휘두른다.
‘시발.’
피할 수 있는 루트가 보이지 않는다.
선택한 것은 막아서는 것. 우효열 역시 두 팔을 방패로 변형시켜 김현성의 검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앙!
으직 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밟고 있는 바닥이 부서지고 있을 정도의 충격.
우효열은 그 대미지를 고스란히 육체로 받고 있었다. 두 팔로는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세 개의 꼬리로 검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그 힘에 너무 의지하는 게 좋지만은 않을 겁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길 잃은 애새끼마냥 초조해하고 있었던 김현성이 갑자기 잘난 척을 시전하는 게 짜증 난다.
-당신을 좀먹을 뿐입니다.
말투도, 호흡도, 모두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이기영의 힘뿐만이 아니다. 놈이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도 이 전투에 분명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개소리.
-저는….
-개소리하지 마라. 꼴사나운 놈이. 이게 어떤 건지도,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놈이 함부로 지껄이는 게 아니야. 이건 말이다… 후욱….
‘효… 효열아.’
-내 동료가 마지막으로 두고 떠난 선물이다. 그렇게 간단하게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를 위해, 맡아주고 있었던 선물이란 말이다. 그게 어찌 됐건 간에. 무슨 힘이든 간에 그걸 쉽게 버릴 수 있을 것 같나? 개소리… 개소리하지 마라.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오… 오그라들어.’
조금 기쁘기는 한데… 살짝 오그라 들어.
-쉽게 얻은 힘은 그만큼 쉽게… 사라지는 법입니다.
-쉽게? 이게 쉽게 얻은 힘인 것 같나? 너 같은 개자식이 입을 놀릴 정도로 하찮은 것 같나? 넌 아무것도 몰라 이 악당 새끼야.
우효열의 말이 맞다. 결코 쉽게 얻은 힘이 아니다. 막말로 시간이 많았으면 나도 정상적인 진화 루트를 타고 올바른 진화를 위해 힘썼겠지만 이쪽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많은 희생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공을 기울여야 했다.
우효열이라는 폐급을 여기까지 조립한 게 기적이었다.
이기영이 우효열의 진화 루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타났다고 해도 이건 어쩔 수가 없다.
녀석과 김현성은 그런 서사를 쌓았는지 몰라도 나와 우효열을 이런 서사를 쌓았다.
바꿀 생각도 없고, 바꿔서도 안 된다. 시간은 짧았지만 결코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효율이 구리다거나, 부작용이 있다거나 하는 것들은 어차피 우효열이 감내해야 될 이야기였기 때문에 나와는 상관없기는 했지만… 만약 상관이 있다고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해야 돼.’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해야 돼. 효열아.”
‘네가 뭔 말인지 알아듣겠냐마는….’
이 새끼랑 나는 의외로 닮은 점이 있을 수도.
“끌어내리자.”
밑바닥으로….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우효열이 김현성을 튕겨낸다.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끌어내리기.
개싸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계속해서 손을 뻗고 땅바닥을 구르는 녀석이 눈에 보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서 토할 것 같아도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게 언더독과 탑독의 차이다.
저놈들이 강하다고는 해도 자이언트 킬링이 일어나지 않는 스포츠는 없다.
이야기는 언제나 약자의 편이다. 기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도 약자의 편이다.
게니우스 같은 놈들 말고, 진짜로 신이 있다면 이번에는 우리의 손을 들어줄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알고 있다.
“이길 수 있어. 효열아.”
-그래. 이길 거다. 이겨서 네놈을 꼭 되살려내지.
‘나 아직 안 죽었어.’
-네놈뿐만이 아니다. 저 멍청이도 살려야지… 후욱… 후욱… 레이먼 볼트 그 할배도… 살려내고… 저 마왕을 때려눕힌 다음에… 그래… 후욱….
‘그 할배도 아직 안 죽었어.’
-영웅이라는 게 해보고 싶어졌다.
‘감성 수치 맥스야? 너는 어떻게 이런 대사를 제정신으로 쳐…?’
-그게… 네놈이 원하는 것일 테지. 귀찮지만… 한번…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처음 돌아왔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다만… 그래… 이번에는 영웅 행세를 해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후욱… 후욱….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네놈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게 아니다.
‘아니, 난 그냥….’
-그냥 내가 해보고 싶을 뿐이야.
‘우효열 이 새끼야. 너… 어느새 이렇게 장성했구나.’
-로헨을 구한 영웅이라는 거.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분위기로 보면 슬슬 이기는 타이밍이면 좋겠다.
이 정도 타이밍에서 짜릿한 역전이 나왔으면 좋겠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할 수 있는 건 기도하고, 녀석을 응원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뿐이다.
“한번 해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걸로 마지막이다! 죽어라! 이 모자란 개자식!
‘악당 같은 대사는 치지 말고.’
김현성이 검을 들어 올린다. 거대한 노을빛이 검 안팎에 감돈다.
이쪽은 준비할 만한 스킬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우효열도 최대한 마력을 끌어모으는 것이 보인다.
뭔가를 깨닫거나 새로운 스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마구잡이 식이였으며 형도 없다.
언제나 그렇듯 놈은 커다란 기합 소리를 내는 것이 전부였다.
이를 악물고, 떨리는 근육을 부여잡고, 한 발자국을 앞으로 더 내디디며….
‘신이시여. 신이시여.’
그리고 모든 것이 새하얗게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직후.
“…….”
-…….
“…….”
[야. 우리 이야기 좀 하는 게 좋겠네. 그렇지?]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