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17화
노을빛의 마왕성, 마지막 이야기(10)
딱 의도한 그대로였다. 변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간에 이 청개구리를 원하는 흐름으로 끌어들이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었으니까.
이기영의 안에 있는 무언가에 대한 떡밥 회수용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본래는 이기영이 모두 정화한 채로 우효열에게 넘겨줘야 했던 힘이었지만 그 어떤 것을 정화할 시간이 없었다는 이야기.
자연스럽게 그런 흐름을 타고 있었다.
“안… 안 돼요! 효열 씨!”
다급하게 외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힘은….”
비주얼적으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사실상 별거 아니다.
코인으로 구매한 각성 촉진제 같은 느낌, 굳이 예를 들자면 옛날에 박덕구를 캡틴 박덕구로 만들려고 했을 때 킵해놨었던 혈청과 같은 레벨의 영구 강화 포션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고위 악마의 심장에 코인으로 구매한 여러 가지 촉매로 연금 처리를 했고 검은 피가 스스로 날뛰도록 효과를 넣어놨다.
사실 저레벨 플레이어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은 아이템이겠지만 우효열이나 윌리엄 정도의 수준에 이른 플레이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저걸 꺼내든 이유는 우효열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얘는 가능성이 있지.’
무작정 각성시키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나 화났다를 시전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 될 수도 있었지만 녀석에게는 의미 없는 행동이 아니었다.
‘넌 벽을 넘을 수 있어.’
“안 돼! 안 돼!!”
‘제발… 제발 잘 나와라. 많은 거 안 바랄게. 딱 둠현성보다 조금만 더 잘 나와 주면 돼.’
“안 돼요! 그 힘을 받아들이면….”
‘너랑은 상성도 좋아.’
둠둠현성이 꽤 임팩트가 크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김현성에게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빠른 속도는 김현성의 장점 중 하나였지만 김현성에게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검술을 못 쓰자너.’
김현성은 명백하게 검술의 천재였으니까.
신체 능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할 정도로 녀석은 자신의 검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녀석의 이명은 노을빛의 달리기신이 아니라 노을빛의 검신이라는 것만 봐도 대충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반면 우효열은….
‘얘한테 검술이라는 개념이 있기는 했음?’
신체 능력.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반사신경과 육감, 전투에서의 천부적인 센스.
천재성이 있지만 방향성이 다르다.
이게 녀석에게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는 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제발! 안 돼!”
‘돼!’
“효열 씨! 우효열!”
‘힘내라, 힘!’
“뿌리칠 수 있어요. 당신이라면 분명….”
‘뿌리치지 마. 받아들여. 그게 네 운명이야. 괴물로 살아!’
끈적거리는 검은색 피들이 녀석의 몸을 뒤덮는 것은 순식간, 당연하지만 우효열은 거부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피로 코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몸을 뒤틀고 있었다.
검은색 혈액들이 자신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우효열은 바보가 아니다.
이미 충분할 정도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녀석은 안내받은 길을 따라 잠재력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어둠진화의 정석 테크 트리였다.
‘비주얼은 잘 나오나?’
애초에 볼 게 없는 놈이었지만 그래도 비주얼은 중요하니까. 바하무트 같은 역겨운 괴물 꼴만 나지 않으면 나름대로 성공적인 진화라 자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효… 효열 씨.”
-크륵… 크르르르….
짐승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소 옹졸한 뿔을 달고 있는 괴물이 한 마리. 두더지 성녀 때처럼 완벽한 괴물로 변태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검붉은 색의 피로 코팅된 듯한 몸을 가지고 있는 녀석의 신체가 돋보인다.
‘꼬리가… 세 개?’
이건 호재였다. 김현성처럼 전투에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꼬리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손톱과 발톱은 그리 길지 않은 게 아쉽기는 했지만 대신 흉악한 이빨이 보인다.
얼굴까지 검붉은 색으로 코팅이 되어 있는 상태.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랗게 벌린 입에는 혓바닥 두 개가 날름거리고 있었다.
‘저건 전투에서도 못 써먹을 것 같은데 왜 두 개야?’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 둠둠현성처럼 뿔이 길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단단해 보인다.
길게 빠졌다기보다는 굵다. 녀석의 것보다 더 들이받기 위한 용도에 적합해 보인다.
눈은 조금 커다랗게 변한 것 같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찢어진 동공이 시야에 보였다.
다행히 한쪽 눈은 아직도 빛나고 있는 중, 대충 전체적인 평을 해보자면….
‘미관상으로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이 새끼 강해 보이자너.
마치 살인 기계가 되기 위해 태어난 괴물 같은 비주얼이었다.
본능 말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괴물.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던 녀석은 이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크우에에에에에에어아아아악!
같은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마왕성이 한 차례 떠나갈 것 같은 비명.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경고처럼 들렸다.
“효열 씨… 효열 씨!”
발을 구르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솟구친다.
단 한 번의 발 구르기로 벽을 몇 개나 뚫어버린 녀석의 종착지는 당연히 노을빛의 군주가 있었던 장소.
오직 복수밖에 모르는 괴물이 되어버린 녀석은 곧바로 김현성에게 달려들어 몸을 부딪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의의 기습을 허용한 노을빛의 군주가 벽에 부딪히지만 대미지는 적다.
오히려 녀석보다 깜짝 놀란 것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던 윌리엄이었다.
-어….
“효… 효열 씨예요.”
-어째서….
“일단 몸을 피하세요.”
-네?
“상처를 회복한 이후에….”
-어째서 효열 씨가 저런 모습이… 되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모두… 모두 제 잘못이에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설명할 수 없어요.”
-어째서… 입니까?
이 새끼는 은근히 눈치가 빠르다. 어째서 우효열이 폭주한 것인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했다.
-어째서입니까! 이기영 님!
“지금은… 지금은 설명드릴 수 없어요. 그것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타이밍 좋게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갑작스레 울리는 폭음과 함께 마왕성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이거 시체는 숨겨야겠다.’
확률은 낮았지만 혹시라도 윌리엄이 발견하게 된다면 상황이 귀찮아질 것 같았으니까.
김현성이 발견한다면 더욱더 귀찮아질 것이다.
“패밀리아 분들과 파티원들과 함께 이동하세요. 빨리!”
-저… 저건 뭔가요. 윌리엄 님. 저건….
-효열 씨인 것 같습니다.
-네? 저게… 효열 오빠라고요?
-정확히는 저도 모릅니다. 일단은 이동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작전이….
-도대체 효열 오빠가 어째서… 이기영 님이 따로 말씀을 해주시지는 않았나요? 지금 움직일 수는 없어요. 저대로라면 효열 오빠가….
-후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재정비를… 하는 것뿐이니. 일단… 위험합니다!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당연히 전투는 격렬해지고 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쓸 만한데?’
그 말 그대로였다.
세 개나 되는 꼬리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일품, 안 그래도 흙바닭을 뒹굴며 개싸움을 하는 녀석에게는 알맞은 진화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팔이 다섯 개가 있는 것보다 더욱더 낫다.
쉴 새 없이 두 개의 팔을 김현성에게 휘두르고 빈틈이 생기는 공간은 세 개의 꼬리 역시 계속해서 휘두른다.
어마어마한 치악력을 가지고 있는 이빨 역시 거슬리게 느껴질 터, 녀석은 폭주했다고 해서 결코 마구잡이로 들이대지 않았다.
검에 닿는다면 본인의 신체가 허망하리만큼 쉽게 망가질 것이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코팅된 신체로도 노을빛의 군주의 검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큰 공격보다는 견제, 닿는 것보다는 회피, 막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끊임없이 구분하며 전투를 길게 이끌어 간다.
둠둠현성이 제어할 수 없는 맹수였다면 둠효열은 계산적이고 영악한 사냥꾼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노을빛의 군주가 약해지고 있다는 것도, 그가 지금 모종의 이유로 이성을 잃었다는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크에아에에에에엑!
-…….
피슉!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팔에서 코팅된 피부에서 무언가가 뻗어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
‘저거 혹시 조종할 수 있는 거였나?’
팔에 뾰족한 형태의 가시가 김현성을 향해 뻗어져 나간다. 코팅된 피부가 부풀어 오르며 도끼와 비슷하게 변하자 녀석은 그대로 그걸 휘두른다.
그 와중에서 고슴도치가 가시를 쏘아대는 것마냥 꼬리와 팔에서 삐죽삐죽한 형태가 쏘아진다.
검 하나로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공격에 김현성이 몇 발자국을 뒤로 물러섰다.
날개로 막아도 제대로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위로 올라가는 게 낫겠다는 듯이 날개를 펄럭이며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지만 둠효열의 등 뒤에서도 검붉은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녀석 역시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고 그렇게 금방 둘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퍼억! 콰득! 콰앙! 하는 소리는 저 위에서 얼마나 커다란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노을빛의 군주는 검을 휘두르고, 녀석은 검을 피하며 꼬리를 휘두른다.
김현성은 한 손으로 꼬리를 잡고 녀석을 그대로 던져 버린다. 벽에 처박힌 녀석이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튕기고 몸을 급정지시킨다.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 있는 급정거의 정체는 바닥에 박혀 있는 꼬리 하나.
김현성이 카운터를 준비하고 휘두른 검이 그대로 녀석을 빗겨나간다.
몸을 바짝 엎드린 녀석은 계속해서 꼬리를 휘두르고 다리를 향해 팔을 휘두른다.
땅바닥을 기고 꼬리를 이용해 벽을 타고 이빨을 들이민다. 이미 인간의 싸움이라 보기 힘든 전투방식이었지만 녀석에게 잘 어울리는 옷을 입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기는 거 아니야?’
쟤 왜 저렇게 잘 싸워.
물론 김현성의 많이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지만 상상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녀석에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짜 이길 수 있겠는데?’
스스로 페널티를 받고 바깥으로 나온 것이 김현성의 실책, 거기에 파란 길드원들과도 한바탕 전쟁을 벌여야 했고, 그 이후에는 정하얀과 한소라를 상대하느라 체력을 많이 소비했다.
언제나 그렇듯 멘탈도 좋지 않아 보인다. 냉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냉정해질 수가 없는 상황일 것이다.
공격을 막기에 급급한 것은 아니었지만 표정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자원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큰 공격은 사용할 수가 없다.
필살기라도 냅다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곧바로 역소환이 될 확률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리라.
가장 최악인 것은 둠효열이 그런 녀석의 상태에 파악하고 있다는 것.
‘진짜 할 수 있겠는데?’
최대 역소환까지 노릴 수 있는 베팅에 주먹을 꽉 쥐었을 때였다.
“믿고 있었다고! 젠장!”
철퍼덕.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꼬리가 검에 잘린 채로 나뒹구는 것이 눈에 보였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괴성이나 위협이 아니라 고통에 찬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시바.
‘너무 쉽게 봤구나.’
저 김현성을 너무 쉽게 봤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차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거리가 벌어지지만 김현성이 녀석을 놓칠 리 만무.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둠효열에 배에 김현성의 주먹이 틀어박혔고, 몸이 기역 자로 꺾인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혈액들이 튀어나왔다.
‘시바. 시바. 시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빨을 들이밀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휘두른 주먹에 이빨이 부서진다.
‘이 새끼… 이거… 때려죽일 생각이구나.’
둠효열이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는 것은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 김현성이 놈의 몸을 두들기는 것이 더 빠르다.
어느덧 회복된 꼬리 하나가 김현성을 다시 노리지만 다시 한번 잘리고, 다시 돋아난 이빨도 콰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손을 뻗은 김현성이 녀석의 눈을 노리지만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꼬리 세 개와 팔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둠효열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얘 이거… 아직 이성 있구나.’
“정신 차리세요! 효열 씨…! 효열 씨!”
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컨트롤이 가능하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질 수 있었으니까.
“윌리엄 님! 효열 씨를!”
-…….
“효열 씨!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요? 어둠에 지지 마세요. 제발.”
‘반만 져. 반만 질 수 있어.’
“제발 돌아오세요.”
‘이성만 찾아! 그럼 돼. 그럼 돼! 몸은 그대로 둬. 정신만 말짱해져.’
“정신 차려! 우효열!”
-키에에아에에에에아아아아악!
“어둠에 굴복하지 말란 말이야!”
눈물을 담은 혼신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