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05화
노을빛의 마왕성 (25)
아마 녀석은 로헨을 놀잇감처럼 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구태여 우효열을 폐기하기 위해 이 악물고 달려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틀리면 처리하는 데 주저함이 없을 거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이야기였다.
‘더미월드나 로헨이나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 같자너.’
로헨 쪽에 비중을 더 두고 있기야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로헨에 얻을 수 있는 기대자원이지 거기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아니다.
눈 밖에 나면 언제든지 폐기할 수도 있는 만큼, 우효열의 성장은 이쪽에게도 중요했다.
당연하지만 지나치게 스펙업 하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이기영이 녀석을 위협적이라고 느낀다면 그 자리에서 아웃. 녀석은 우효열이 김현성보다 강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한 패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녀석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김현성은 현존하는 모든 것들 중에 가장 강해야 하고.
그 어떠한 것도 녀석의 권위를 넘볼 수 없어야 했으며.
언제나 고결하고 완전해야 했다.
‘전투 외적인 부분은 당연히 제외하고.’
자신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분석하는 것도 조금은 어색한 일, 최소한 내게 입력된 이기영은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들을 가슴 한편에 품고 있었다.
‘사실 걱정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우효 놈이 아무리 강해져 봤자 김현성보다 강해질 리는 없었으니까.
바짓자락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만 성장해 줘도 내게는 큰 수확인 셈.
함부로 건드리기는 불편하면서 지나치게 위협이 되지는 않는 선에서….
‘딱 그 정도가 좋아.’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쪽으로서는 사용할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생기는 셈이다.
물론 정확한 목적을 알 수가 없어 방향성을 잡기가 어렵다는 문제를 겪고 있기는 하다.
어떤 시험을 치를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해서 준비만 하고 있자니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
가시밭길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상황이 참을 수 없이 불편한 상황이었다.
“이기영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아마 중요한 건 로헨이겠지?’
“기분이 좀 어떠십니까.”
“더할 나위 없이 좋아요. 눈도 많이 좋아진 것 같고… 팔은 여전히 안 움직이기는 하지만….”
큰 관점에서 보면 목적은 당연히 로헨, 문제는 그 방식에 있었다.
유피테르, 샤넬리아 에르메스와 맺은 계약을 따라 얻어내느냐. 아니면 노을빛의 군주를 이용해 탈취하느냐.
꽃기영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첫 번째.
‘그게 꽃기영의 존재 의의니까. 기대하는 것도 그거일 거고….’
후자가 더 간단할 수는 있지만 앞으로를 생각하면 전자에 무게를 두는 것이 맞다.
안 그래도 망해가는 기업을 들쑤시고 폭파시킨 이후에 인수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
어느 정도 수습이 된 이후에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 당연한 심리였다.
꽃기영이 이걸 어떻게 수습하느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로헨의 명운이 결정될 확률이 높다.
적은 노을빛의 마왕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은 악마 군주가 둘, 균열, 그리고 일부 게니우스들까지.
김현성이 이쪽에 강림한 것이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노을빛의 마왕성은 시험대인 셈이었다.
앞으로의 로헨을 이끌어 나갈 주역들에게 로헨을 이끌어 나갈 자격이 있는지.
꽃기영이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이 땅에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작업장으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제대로 할 수 있는지.
불가능하다면 이곳은 악마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아마 이기영이 직접 로헨에 남은 군주들을 이끌고 로헨을 분해하고 갈아 실적으로 주물러 한입에 삼켜 버리지 않을까.
‘무력만 중요한 게 아니야.’
그게 윌리엄이 이른 아침부터 이쪽을 찾아온 이유였다.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게 된다.
“저… 이기영 님?”
“아. 죄송해요. 잠깐 다른 생각을 할 게 있어서. 일단 이것 좀….”
“네? 이건….”
“앞으로의 로헨에 관한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 제가 사라진 이후에 로헨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정리한 매뉴얼이에요.”
“…….”
“여기 이건 제 예상이 틀렸을 경우를 대비한 2안이고요. 노을빛의 마왕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면 2안은 즉시 파기해 주세요.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절대적으로 2안을 따라주셔야 돼요. 이해가 안 되실 수도 있지만 이건 최우선 사항입니다.”
“이건….”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는 것 같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릴게요. 이번 원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아직까지 로헨에 당도한 문제가 무척 많다는 건 윌리엄 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요. 작게는 플레이어와 원주민의 대립, 국가 간의 갈등, 크게는 남은 두 군주가 점거한 지역의 탈환과… 균열… 문제… 그리고 게니우스에 대한 것까지.”
“이기영 님. 이건…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아니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윌리엄 님밖에 없어요.”
사실 얘 말고 줄 사람이 몇 더 있기는 했다.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저번에 편지를 쓰면서 적어놓은 것들도 있었으니까.
“이기영 님께서 직접….”
“네. 저도 그렇게 될 수 있기를 희망해요. 하지만 언제나 백업플랜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요.”
“…….”
“그리고… 다른 말이지만 효열 씨를 잘 부탁드려요.”
“네?”
“그 사람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고 가끔은 짜증 나고, 유치하고… 타인과 대화하는 방법도 모르는 주제에 쓸데없이 고집만 부리고… 아니, 아직까지는 고쳐야 할 점이 많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
“단지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자기방어를 하려는 심리가 강해지다 보니 조금 꼬인 사람이… 됐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잃는 데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익숙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을 것처럼 구는 주제에 쉽게 상처받고… 윌리엄 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그 사람 친구라고는 자기 자신밖에 없는 사람이잖아요.”
“…….”
“윌리엄 님께서 효열 씨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면 해요. 더 나아가 두 분이 로헨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기영 님의 부탁은….”
말 길어지기 전에 끊고.
“마지막 부탁이에요.”
황급하게 마무리하기.
녀석은 마무리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 더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자. 어차피 나올 말이야 뻔했으니 말이다.
이건 받을 수 없다. 이래서 안 된다. 저래서 안 된다.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한다. 앞으로의 로헨 어쩌구저쩌구. 듣기만 해도 지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움직일 수 있는 병력들이 얼마나 있나요? 사제들은 전부 성력을 회복시켰는지도 궁금한데….”
“일부 인원들은 지금 당장에라도 움직일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이번 전투에 후유증이 컸던 터라… 사제들의 평균 신성력의 약 삼 분의 일 정도를 회복한 것 같습니다.”
“나쁜 지표는 아니네요. 곧 출발할 수 있겠군요. 피로를 호소하는 병사들은 있나요?”
“그것보다는….”
“네.”
“많이 불안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래도… 이기영 님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탓에.”
그건 분명이 이 새끼 때문이다. 묘한 소문이야 예전부터 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거기에 장작과 기름을 뿌린 놈이 바로 이 새끼.
“각 연대를 방문할 필요가 있겠네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저 지금 어떻게 보이나요?”
“네?”
“조금은 정상 같아 보이나요?”
팔 한쪽을 살짝 숨기고 애써 눈에 힘을 준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이상에야 위화감을 느끼기 힘들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이 슬퍼 보이는지 녀석의 안구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윌리엄 님께서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챌 거예요.”
“죄송… 죄송합니다. 하지만….”
“일단 가요. 그렇지 않아도 병사들이 궁금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내가 나타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별 이상한 괴소문들도 나돌고 있을 테니 그걸 한 번 더 휘어잡아 주기 위해서는 성자의 등장이 필수불가결하다.
병사들을 돌보며 그들과 소통하는 것은 꽃기영의 업무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으로 내가 직접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줘야 하는 자리.
아니나 다를까, 직접 모습을 드러내자 눈에 띄게 밝아지는 병사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상 이 원정을 홀로 책임지고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거봐. 내가 무사하실 거라고 이야기 했잖아.”
“다행이다. 정말로….”
같은 소리들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꽃기영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진다. 단순히 막사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상황.
다리가 점점 떨려오고 있었고 눈 앞도 점점 흐려진다. 자꾸만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차올라 참을 수가 없다.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명은 덤.
이상현상을 눈치챈 윌리엄이 “이기영 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라는 말로 이쪽을 피신시켜 주지 않았다면 필시 추한 꼴을 보이고 말았겠지.
“형편없네요. 저….”
라는 말을 내뱉는 것은 필수 아닌 필수, 꽃기영 같은 캐릭터라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 캐릭터라면 꼭 한 번쯤은 내뱉어 볼 만한 대사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밝아 보이더군요.”
“네?”
“병사들의 표정이 말입니다. 그만큼 잘 해내셨다는 증거이니 낙심하실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네….”
뭔가 위로의 말을 내뱉으려고 하는 녀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기영의 기분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는다.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자 초조해지는 녀석. 심지어 어색한 침묵까지 감돌자 얼굴이 꽤 급해지고 있었다.
“저 그럼 이만 들어가서 쉴게요. 윌리엄 님도….”
“아… 이기영 님….”
당연히….
당연히 나는 녀석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고 있었다.
“…….”
“…….”
“…….”
“…….”
“대련?”
“그렇습니다.”
“터무니없군… 아니, 조금 갑작스러워. 화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셔도 상관없습니다만… 그냥 한 번 더 검을 나눠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
“대화도 조금 나누어 보고 말입니다.”
“너와 내가?”
“이상합니까?”
“뭐 이야기라면 모르겠지만… 싸움이라면… 바라던 바다. 따라와라. 박살을 내줄 테니.”
‘친해지라고 했더니 바로 친해지는 것 봐. 말 참 잘 들어.’
이쪽의 거처에서 보일 만한 거리에서 큰 소리로 기합을 내지르며 자기 들 좀 봐주라는 듯 대련하는 꼬라지가 아주 볼만하다.
“이야아아아아!”
“흡!”
속에 있는 울분을 풀기라도 하는 것처럼 커다란 고성과 고함을 내지르며 두 녀석을 검을 부딪친다.
‘젠 군 보여? 여기 너를 능가하는 천재들이 있자너. 그것도… 둘씩이나.’
둘의 수준은 거의 호각, 누가 우세하다고 하기 힘들 정도로 검을 주고 받는 모습들이 눈에 보였다.
명백하게 로헨 최정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놈들의 격돌은 괴수 대격돌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래도 김현성과 녀석들 사이에는 여전히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
내가 보조해 준다고 해도 고깃덩어리가 될 녀석들의 미래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정말로 노을빛의 군주를 목도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
답을 찾는 것은 빠르다. 아니, 굳이 답을 찾는다는 표현 자체가 무의미하다.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조금 도박일지도 모르겠지만….
‘둘 다 키워보자.’
둘 모두와 동시에 연결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 * *
“후우….”
“길드… 마스터.”
“…….”
“저… 길드마스터!”
[노을빛의 군주가 왕좌에서 몸을 일으킵니다.]
[노을빛의 군주가 희생과 부활의 신을 애타게 찾으며 그의 적들을 멸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