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204화
노을빛의 마왕성 (24)
너희만 울고 싶은 거 아니야. 나도 울고 싶어.
나도 슬퍼. 이 새끼들아.
“…….”
“…….”
‘분위기 한번 암울하자너.’
당연하지만 승리했다고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그나마 지휘본부에서 감정을 숨기려고 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럴 수도 없는 모양, 꽃기영의 모습을 보고 있는 이들의 표정은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찍이 시한부 선고를 미리 갈겨놓은 게 있어 어색하지는 않았었지만 정도가 조금 심해진다고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너무 감정 과잉 상태에 접어든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덜컥 일기는 했지만 내 모습을 내려다보니 녀석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봐도 좀 심하기는 하네.’
전임자가 일을 잘하기는 한 모양이다.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실행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번 꽃기영이 등장하기 전의 일이었다.
저주받은 엘프 여왕 엘레나의 레이드와 진행 준비를 하면서도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설정을 차근차근히 풀어나간 모양이다.
아니나 다를까 합쳐지기 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조져놨네.’
어떻게 더 망가뜨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으로 만들어놨자너.
격렬한 전투 끝에 넝마가 된 상의 아래로 비치는 것은 칙칙하게 죽어버린 피부. 이미 썩어버린 것처럼 회색의 반점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그 위에 검은색 핏줄들은 더더욱 도드라진다.
내가 보기에도 비주얼적으로 훌륭한 모습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회색으로 물든 부위 외에도 멀쩡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다.
핏물과 진물이 흐르고 있는 팔과 다리. 뼈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형편없는 거죽,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 현 꽃기영의 신체였다.
남궁선의 방패에 살짝 비친 얼굴 역시 무척 창백해져 있었다.
다른 곳에 비하면 그나마 멀쩡한 것이 포인트.
‘암. 그래야지. 원래 머리 쪽은 제일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이 국룰이지.’
표정 연기로 전달도 해야 되니까. 사실 클리셰적으로도 이게 맞지.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 가슴까지 번지고 있는 회색 반점은 모두의 속을 썩게 만들고 있었다.
우효열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분명… 분명히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아마 힘을 사용한 반작용 때문일 거예요. 부파티장님께서 이번 원정에서 사용하신 신성력을 생각하면….”
“치료는… 치료는 가능한 겁니까?”
“…….”
‘불가능하자너.’
마법이나 신성력의 영역이라면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겠지만 이건 연금술의 영역이었다.
종목이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곳 연금술사들의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석기시대의 인류가 21세기의 문명을 목도한 것보다 더욱더 터무니없이 느껴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현재 로헨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꽃기영을 죽여가고 있다고밖에 해석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서둘러 몸을 가린 이후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몸을 일으킨다.
“너….”
“별것 아니에요.”
라고 한마디 던져주고.
“피해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요. 원정대 전체가 회복하는 데 얼마나 걸릴 건지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기영 님.”
“그게 가장 중요해요. 말씀드렸잖아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고. 이걸 보셨으면 더 이야기가 빠르겠네요.”
“일단 이기영 님을 안정화시킨 이후에.”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할 셈인가요? 이미 저번에 대화가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정화. 네. 좋죠. 하지만 불가능해요. 무엇보다 그런 사소한 일에 시간을 뺏길 수는 없어요.”
“사소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원정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요. 그런 죽음 중의 하나일 뿐이에요. 저는 결코 특별취급을 받을 생각 없어요. 그러니….”
“그 팔로 말이냐.”
“…….”
“네놈. 이게 몇 개로 보이지?”
‘우효 녀석 눈썰미 좋자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윌리엄 역시 혹시나 하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본다.
움직이지 않는 한쪽 팔.
그리고….
초점이 없는 동공.
“…….”
“…….”
“무슨….”
“네놈이 짊어진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만 적어도 피해를 끼치지 않을 정도로는 몸을 돌보는 것이 먼저 아닌가. 네놈은 이 원정대의 중심이다.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더 이상 원정을 진행하는 것이 원정대에 정말로 이로울 거라고 생각하나? 더 무리하다가는 정말로 시력을 잃어버리고 말 거다.”
“…….”
“이제 몇 걸음 남지 않았다. 초조해하지 않아도 돼. 이번 엘프 여왕의 공략이 진행되는 내내 네놈이 얼마나 급해 보였는지 모를 거다.”
‘급해 보인 건 연기가 아니었자너.’
실제로 전임자가 급한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었던 것 같았다.
이기영과 이지혜에 대해 이쪽이 리셋당했었던 그 순간은 기억이 나지 않았겠지만 뭔지 모를 위화감은 느끼고 있었을 터.
기억이 불안정하고, 무언가 만들어진 것 같은 느낌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겠지.
의식하고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의식 안에는 그 불안감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녀석 또한 불안해하고 있었고,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기현상에 두려워하고 있었다.
끝에 가면 갈수록 진실에 가까워진다 믿고 있었을 테니 원정을 급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무서웠겠지. 당연한 반응이었어.’
“그건….”
“우리들을 믿어보란 말이다.”
“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네놈은 꼭 옛날의 나처럼 보이는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있겠나?”
‘아니,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너는 그냥 성격이 모난 거고… 나는 진짜로 너희 새끼들을 믿을 수 없어서 그런 건데요. 그리고 시바 니가 달라지면 얼마나 달라졌다고. 아직도 개차반이세요.’
“네놈이 유능하다는 걸 부정하고 싶은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네놈이 무너진다면 이 머저리들도 여기서 끝이다. 네놈 말처럼 네놈이 정말로 로헨을 원한다면 적어도 원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관리를 철저히 했어야 했다.”
의외의 정론. 사실상 대화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반항한다면 억지를 부리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주변을 살핀 것은 당연지사. 물론 꽃기영의 의견에 손을 들어주는 녀석은 없었다.
원정이고 나발이고 전부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윌리엄부터.
계속해서 눈물만 흘리고 있는 남궁선 임채령까지.
움직이지 않고 여전히 축 늘어져 있는 팔과 동공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눈으로 꽃기영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괜찮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이다.
아직까지도 눈가에 눈물이 마르지 않은 윌근본은 애써 이쪽을 부축하는 중.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만들어진 캠프 안으로 이쪽을 부축한 이후에는….
“사제들을….”
“괜찮아요.”
“네?”
“신성력으로 소용이 없다는 거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제게 쓸데없는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차라리 사제들의 성력 회복에 집중해 주세요. 다음 원정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기영 님.”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통스럽지는 않아요.”
“시중을 들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몇 번이나 더 말씀드려야 되는 건가요? 저보다는 원정대원들을 돌봐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도 피해가 큰 전투였으니 심적으로 많이 힘들 거예요.”
“…….”
“어서요.”
내 말에 녀석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내지른 비명.
“아으으으윽.”
가슴을 붙잡으며 숨을 헐떡인 것은 당연지사.
‘얘 분명히 문 앞에 있자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으흐으윽… 아흑!”
“…….”
“으으윽… 으으윽…. 아으윽….”
아프다. 23살 꽃기영은 지금 고통과 맞서 싸우고 있다.
혹시라도 비명이 새어 나갈까 이를 악물고. 문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한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단골처럼 등장하는 대사를 내뱉고 있는 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효열과 윌리엄이었다.
“그만.”
“당신….”
“지금 네놈이 이 방 안으로 들어가서 뭘 할 수 있지?”
“제가….”
“동정하겠다는 것이 목적이라면 집어치우는 게 좋을 거다. 오히려 놈을 모욕하는 꼴이니까. 내가 장담하지. 정말로 녀석을 돕고 싶다면 시답지 않은 위로보다는 병력들을 안정화시키는 게 더 나을 거다.”
“우효열 당신이라는 사람은… 그럼 당신은… 이기영 님을 그냥 홀로 내버려 두자는 겁니까!”
‘목소리 커서 다 들리자너.’
“당신이야말로 정말 그를 위하고 있기는 한 겁니까? 죽어간단 말입니다. 제기랄! 죽어가고 있다고! 계속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고… 혼자서 고통을 삼키면서… 비명을 내지르고 있단 말입니다! 제기랄! 어떻게 저 목소리를 듣고도….”
‘싸울 거면 조금 떨어져서 싸워야 될 것 같은데.’
그만큼 흥분했다는 방증이리라. 마력으로 차단막을 만들 여유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파서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윌근본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는 중.
동네방네 아주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건지, 원정대의 사기를 제대로 꺾어놓는 것이 목적인지 녀석답지 않게 고성을 내지른다.
이쯤 되면 이 새끼 입을 막는 게 옳은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눈도… 팔도… 온몸이 망가지고 있다고! 당신도 분명히 똑똑히 봤을 거 아니냐고! 그 썩어버린 몸과 핏물로 범벅이 된 팔을 보고도… 회색으로 물든 가슴….”
“손은 놓고 말하지.”
멱살이라도 잡았나 보자너.
“저 비명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그냥 내버려 두자는 소리를 할 수 있느냔 말입니까! 그가 당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입에 담을 수 있어?! 그게 사람이 할 짓이야! 당신 같은 사람들은… 당신 같은 사람이!”
‘쟤는 저런 말 자주 듣는 것 가터.’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제멋대로 지껄이지 마라.”
그야말로 자존심 강한 두 천재의 대립. 저 명장면을 소리로만 듣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네놈만 신경 쓰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말란 말이다. 멍청한 자식.”
“그렇다면….”
“…….”
“…….”
“녀석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네?”
‘뭔데 그 방법이.’
“그럴 리가….”
“엘릭서를 구해볼 생각이다.”
‘그걸로 되겠어? 아니….’
“…….”
“꼭 그게 아니라도 좋아. 이 원정의 끝에는 분명히 뭔가 있다. 노을빛의 마왕을 죽인 공적치, 녀석이 가지고 있는 아이템 뭐가 됐든 상관없어. 이번이 없다면 그다음이다. 네크로맨시나 시스템의 법칙을 뒤흔드는 역천의 마법 같은 것이라도… 상관하지 않을 거다. 게니우스들을 피떡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을 거다.”
“…….”
“놈은 이 대륙에서 살아가야 해.”
“당신….”
“똥구덩이를 나뒹굴고 시체로 산을 쌓는 한이 있더라도 난 놈을 살릴 테니….”
‘효열아….’
“네놈은 네놈이 할 일이나 똑바로 해라.”
그래. 이런 처절함이 필요했다.
조금 더 처절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눈물 흘리고 피 흘리고 매일 불안해하며 이를 갈아야 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돼.’
적어도 이기영이 녀석을 폐기하지 못하게 하려면 지금보다도 훨씬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